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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의 숭고한 이야기 너머로 (파벨 파블리코우프스키, <이다>, 2015.)

이야기를 끝맺는다는 것 어떤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끝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끝내지 않는 쪽이 더 견디기 쉽기 때문에. 고통의 이야기를 붙들고 있는 한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자이고, 피해자인 한 우리는 아직 심판받지 않은 것들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야기를 끝맺는다는 것은 그 권리를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야기를 끝내는 것을 이토록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바흐친의 말을 빌리면, "존재에 대한 알리바이란 없다." 고통의 역사 앞에서 우리는 그 역사를 증거로 삼아 현재의 책임을 유예할 수 없다. 과거는 언제나 여러 방향으로 열려 있던 순간들의 총합이었고, 우리가 과거에서 오직 실현된 가능성들만을 보려 할 때, 즉 피해의 서사만을 고정된 진실로 읽으려 할 때, 우리는 과거를 잘..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만일, 2016. 노트

20쪽. 쇼아는 “우리 가운데 암흑의 구멍”이에요. 의심할 여지없이, 축소할 수 없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우리에게 최종적인 답을 제공하기보다 오히려 풀리지 않았던 일련의 질문 모두를 드러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먼저 가능한 미적이고 윤리적인 질문,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질문이란 이 “암흑의 구멍” 앞에서, 이 “암흑의 구멍”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입니다. 결국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암흑의 구멍”을 방치한다면, 그 일이 우리를 내면에서부터, 소리 없이, 절대적으로 잠식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 안으로 되돌아가 그것을 응시하고자 하는, 다시 말해 그것에 빛을 비추려, 그것을 어둠에서 끄집어내려 시도하는 일일까요? 우리는 첫 번째 태도가 ~ 군림하는 어둠을 신성시하는 일,..

독서노트 2026.04.22

조나단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The Zone of Interest>, 2024.

'죽음' 이후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아우슈비츠는 해방되었지만, 그 이후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가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희생자의 자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라났고,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기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홀로코스트를 다루는 수많은 영화만으로도 역사를 서술할 수 있을 정도로 많으며,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서 다양한 관점과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아우슈비츠 담장 바로 옆에 정원이 있다. 가족은 차를 마시고, 마을의 아이들은 수영장과 강물을 오가며 논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강과 수영장에 울려 퍼진다. 강물에서의 피크닉은 과거 서구 시대가 누렸던 벨 에포크 시대로 돌아간 듯 평화롭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들을 마치 회화처럼 거리를 ..

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 세미나 : 자크 라캉>, 문예출판사, 2023.

[반철학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해하기] * p.207 반철학은 세 가지 형식적 특징을 갖는다는 점을 상기합시다. 1) 반철학은 이론적인 자만에 빠진 철학을 해임하는데, 이러한 해임은 주로 혹은 대체로 반박의 형식이 아니라 언제나 권위를 실추시키는 형식을 갖습니다. 2) 반철학은 철학적 작용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합니다. 철학으로 가정된 이론적 자만이 실추되는 것의 배후에서 철학 고유의 제스처가 반철학 자체에 의해 식별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 제스처가 대체로 철학으로 은폐되어 모호하거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이렇게 재구성된 철학적 행위에 대해 반철학은 새로운 유형의 행위를, 철학의 해임을 완수하는 전혀 다른 행위를 대비시킵니다. * 철학은 주인 담론의 형상에 잡혀있다. 철학..

독서노트 2026.04.09

그냥 일기

그다지 떳떳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 입시 논술 강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돈 많이 벌고 유명해져서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온라인 강사는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온라인에 노출되면 나의 정체가 드러나고 과거의 실수들이 실제의 나보다 한 발 앞서 나를 가려버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짓고 산 것은 아니었으나, 루시드폴의 이야기처럼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법이니까. 온라인과 매체를 통해 얼굴을 내밀고 강의를 하는 사람들을 한참이나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적도 있었다. 어쩌면 아무런 관심도 없었을 텐데, 자의식 과잉이자 망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IMF 세대이기는 하다. “-이기는 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건, 내가 당시에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라지는 사람과 서사적 권력 : 이창동, <버닝>, 2018.

중요한 건 누가 이야기를 갖느냐는 것이다. 해 질 무렵이다. 들판 위로 노을이 번지고, 해미는 음악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그녀는 술을 마시고, 웃고, 그리고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종수와 벤이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본다. 음악이 커지고, 해미는 눈을 감는다. 잠시 후 그녀는 상의를 벗는다. 그리고 계속 춤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감각 속에 몸을 맡긴 것처럼. 음악이 멈추고, 해미가 말한다. "해 질 때가 가장 슬퍼." 그리고 그 장면 이후, 그녀는 영화에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한 여자가 노을 속에서 춤추는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세 인물 사이에서 작동하는 어떤 권력..

아버지라는 변명 : 박찬욱, <어쩔 수가 없다>, 2025.

IMF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1990년대 말, 수많은 가정의 아버지들이 무너졌다. 직장을 잃거나, 사업이 기울거나,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자존심이 먼저 쓰러졌다. 나는 그 시절을 살아내는 연약한 여성 청소년이었고, 그 풍경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목격했다. 아버지는 말이 없어졌고, 가족은 그 침묵의 의미를 각자 알아서 해석해야 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를 보는 내내 그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의 주인공 만수는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 세 차례의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이 희망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 그 남자는, 어떤 의미에서 그 시대를 버텨낸 수많은 아버지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장이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혹은 지키고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

아니,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나-에드워드 버거, <콘클라베>, 2025.

콘클라베 "아니, 이렇게 엉망일 수가 있나" 영화를 처음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영화가 엉망이라는 게 아니라 에서 묘사한 서사들에 등장한 인물들이 엉망진창이라는 의미였다. '노인들의 가십걸'이라느니, '추기경들의 조별과제'라느니 하는 여러 소문들은 들어서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봐도 '엉망진창'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영화였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차라리 우리 동네 신부님들을 모아 콘클라베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전 세계 신자를 대표해야 하는 교황 후보라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성폭행범, 권위주의자, 독단주의자에 인터섹스라니. 이쯤 되자 여러 신부님들의 증언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더 ..

[항암 일기 ㉒] 근황 그리고 Q&A

그간 글을 쓰지 않았다. 그냥 쓰고 싶은 마음이 처음에 비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처음 발병했을 때는 세상 창작욕이 마구 생기더니, 이제는 조금 지치는 것 같다. 그래도 그동안 블로그에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고, 궁금해하시는 것도 있는 것 같아서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글을 쓰지 못했던 시기의 내 근황 살짝과 자주 물어보시는 질문에 답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1월에 방사선 검사를 시작했고, 32일 정도 치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는 것 같더니 보름 정도 지나고부터는 체력 이슈가 생겼다. 나도 모르는 새에 살이 쭉쭉 빠지고 힘이 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보름 동안에는 살이 4 킬로그램이나 빠져서 다이어트에 성공한 거라 생각했다. 아무..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메모

혐오사회혐오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혐오사회』.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혐오와 증오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 책은 그동안 혐오 문제가 주로 혐오표현과 여성혐오의 층위에서 다루어졌던 것과 달리 혐오가 발생하고 전염되고 확산되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15년 넘게 전 세계 분쟁지역을 누빈 저널리스트이자 여성 성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살려, 현실 문제를 세밀하게 분석해내는 동시에 따스한 공감의 시선으로 사회적 약자가저자카롤린 엠케출판다산초당출판일2017.07.18  * 감정의 원인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정서적 상태 : 감정은 실제로 그것이 향하는 대상이나 본질이나 사건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촉발될 수도 있다.(38) : 공장을 닫아버린 기업에 대한 분노를 당..

독서노트 202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