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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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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혐오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혐오사회』. 전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혐오와 증오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이 책은 그동안 혐오 문제가 주로 혐오표현과 여성혐오의 층위에서 다루어졌던 것과 달리 혐오가 발생하고 전염되고 확산되는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15년 넘게 전 세계 분쟁지역을 누빈 저널리스트이자 여성 성소수자로서의 경험을 살려, 현실 문제를 세밀하게 분석해내는 동시에 따스한 공감의 시선으로 사회적 약자가
저자
카롤린 엠케
출판
다산초당
출판일
2017.07.18

 

 

* 감정의 원인과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정서적 상태 

: 감정은 실제로 그것이 향하는 대상이나 본질이나 사건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촉발될 수도 있다.(38) 

: 공장을 닫아버린 기업에 대한 분노를 당사자에게 표출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의 빈 공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린 것이 아닌가? 공장을 비워버린 사람들이 아니라 사용되지 않던 공장건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이다. 오토리브의 경영자가 아니라 잉여 상태가 된 건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을 '강탈과 절도 전문가들'이라고 비방할 수 있다는 말인가?(66) 

: 증오는 그 대상을 그냥 피해 가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두지 못하고, 그 대상을 '파괴'할 수 있도록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가고자 한다.(68) 

: 분노에는 언제나 그것이 발생하고 표명되는 특정한 맥락이 있다. 증오의 근거로 언급되는 이유들, 어떤 집단이 증오해야 '마땅하다'며 갖다 대는 이유들은 누군가가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틀 안에서 산출해 낸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들이 성향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 반복해 거론하고 설명하고 묘사해야 한다.(76)

 

*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 

: 자신과 다르다고 배제하고 싶어 하는 대상이나 집단에게 왜곡된 혐오감정을 언어적으로 표현하거나, 폭력을 통한 상해를 입히는 것 

: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투사적 혐오'라고 말한 것, 즉 단순히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과 걱정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걱정 외에도 사회의 전반적 공감능력을 저해하는 다양한 감정적 힘들이 다수 존재한다. 누스바움은 분노와 투사적 혐오뿐 아니라 나치즘도 그런 감정들 중 하나라고 본다.(51) 

: 속에는 혐오와 원한과 경멸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걱정이라는 모습을 띰으로써 용인할 수 있는 한계점의 위치를 옮겨놓는 것이다. ~ '걱정'으로 위장한다. (52) '걱정하는 시민들', 그 표현 뒤에 숨는 사람들 (53) 

: 이와 관련해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견해는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이 장 폴 사르트르 Jean Paul Sartre를 계승해 내놓은 것으로, 유난히 부정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집단과 환경은 광신과 인종주의로 기울기 쉽다는 성찰이다.(54) 

 

* 타자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 

: 일레인 스캐리는 "기괴함과 비가시성은 타자의 두 아종"이라고 쓴 바가 있다. 

: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행동하도록 이끌었는가?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어디서 기원했는가? 이러한 행동 이전에 어떤 선행시건이 있었는가? 난민을 그들처럼 보는 관점에는 어떤 해석의 틀이 전제되어 있는가? 

 

* 현실을 협소화하는 시각(79)

: 의도적으로 현실을 협소화 하는 시각. 전체를 대표하는 표상 

: 그 세계에는 한마디로 정상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상이라고 주장되는 충격적인 예외만이 있을 뿐이다. 현실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이 모조리 제거되어 있다.(78)

: 난민들을 언제나 집단으로 다룰 뿐 결코 개개인으로 다루지 않고, 무슬림을 테러리스트 또는 미개한 '야만인'으로만 혐오스럽게 묘사하는 토론 포럼이나 출판물의 심각한 문제는 이주자들의 다른 면모를 상상하는 일 자체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상상력을 펼칠 여지가 축소되면 감정을 이입할 여지도 줄어든다. 무슬림으로써 또는 이주자로서 지닌 무한한 존재의 가능성을 단 하나의 정해진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개인은 집단과, 집단은 언제나 그 속성들과 하나로 결합된다.~그리고 남는 것은 미리 만들어진 묘사와 평가에만 의지해 작동하는 축소된 사고뿐이다.(79) "상상력의 훼손"  

 

* "공포의 부당이득자"(90)

: 개입하지 않는 사람들,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동조적으로 용인하는 사람들 역시 증오를 가능하게 하고 확장한다. 어쩌면 폭력과 위협이라는 수단은 지지하지 않더라도, 분출된 증오가 향하는 대상을 혐오하고 경멸하는 이들이 은밀하게 묵인하지 않았다면, 증오는 결코 그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92) "증오의 방조", "증오에의 공모" 

 

* 쉬볼레트Schibbolet - 차이를 규정하는 사소한 기준 

: 상당히 자의적이고 융통성 없는 차이에 불과한 쉬볼레트라는 단어 하나로 사람들을 타자이자 심지어 적으로 규정하고 살해해도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136) "'우리'와 '타자들'을 가르는 분리선"(138)

: '본연성'과 '본원성'(그리고 '순수성')이라는 범주를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믿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162)

 

* 두 개념의 분리와 재결합 

"고대 그리스어의 이 특이한 구문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men'과 'de'로 된 조합이 언제나 대립적인 것만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라고 대니얼 멘델슨은 말한다. "이들은 때로, 아니 자주 두 가지 개념이나 속성 또는 이름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분리하기보다는 결합하고 나누기보다는 배가시킨다. ~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던 구조가 다양한 관계와 연결을 낳는 형식이 된다는 통찰. (189) 

 

* 이야기 깨뜨리기(레베카 솔닛)

: 자신들의 몰락과 억압에 관한 구태의연한 옛이야기를 끌어와 극적으로 표현해 배경으로 깔아 두고, 그 앞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특별히 중대하고 운명적인 것으로 표현한다. ~ 난민을 도우려 하고 그들에게 연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문명사회의 모든 행위자들은 당연히 그들에게는 적이다.(86-87) 

: '자신'과 '이방인', '우리' 대 '그들'로 양분된 세계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적대감은 처음부터 비판을 퉁겨낸다. 비판은 자신의 나라, 자신의 민족, 자신의 국가를 위한 유일하게 진실하고 정당한 투쟁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검열하고 억압하고 조종하는 일로 치부된다.(87) 

: 증오와 폭력을 무턱대고 거부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전략과 은유와 이미지를 가지고 증오를 만들어내며 어디로 그 방향을 돌리는지 관찰하면, 어느 지점을 치고 들어가야 그 이야기의 틀 자체를 전복할 수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197)

 

* 바라봄의 능동적 방식

: 아렌트가 보기에 인간의 조건과 인간 행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모두가 같은 존재, 즉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 중 누구도 한때 살았거나 지금 살고 있거나 앞으로 살게 될 다른 어떤 사람과도 똑같지는 않은,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같은 존재인" 그러한 다원성이다.(230) -> 아마르티아 센 <정체성과 폭력> 참고. "복수로 존재하는 것" 

: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은 다양한 기억들과 경험들도 인정하고 그것들을 명백히 표현하고 공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문화를 유지하는 것도 의미한다. ~ 관점을 다양화해야 하고, 문화적 관습과 신념을 후세에 전하는 인식의 틀과 표준적 지식의 틀도 비판적으로 점검해야 한다. (235) 

 

* 저항의 방식 

: 신성화된 성별의 '정상성'에 맞서는 전략 중 하나는 성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대신 성별의 편성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상징적 차원들의 의미를 부각한다. 성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임을 논증해 밝혀내면 정치적, 규범적으로 자유로울 여지가 생겨난다.(161) 

: 많은 트랜스인들이 전형적인 남성형 또는 여성형으로 여겨지는 각각의 쉬볼레트들을 꼽고, 이를 유희와 전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남성적 또는 여성적인 규준들은 재활용되거나 조롱당하며 말이나 노래로, 드랙drag이나 보깅vogueing으로, 춤이나 의상으로, 패킹packing이나 바인딩binding, 화장이나 수염, 가발이나 면도로, 또는 이 모든 것 없이도 때로는 확정되고 때로는 무시된다. 어떤 이들은 쉬볼레트의 '쉬'를 제대로 발음하거나 흉내 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노력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재차 다시 반복하는Re-iteration 과정을 통해 그 암호 전체를 변화시킴으로써 배제와 경계 긋기의 역학까지 바꿔놓는다.(169) 

: (성별) 이행을 결심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떤 역동적이고 불확실한 일을,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 초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행이 아무리 불법적인 일과 관련이 없고, 의사의 관찰과 국가의 행정적 통제 아래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그 길은 금기의 길이며 상처 입기 쉬운 길이다. (173) "이행에 따른 내외적 문턱" 

 

* 파르헤지아parrhesia

: 미셸 푸코는 <자아와 타인에 대한 통치>에서 고대 그리스의  파르헤지아라는 개념을 빌려와 '진실 말하기Wahrsprechen'의 이념을 전개했다. ~ 푸코는 이를 힘을 지닌 자들의 의견이나 입장을 비판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238) 

: 파르헤지스트, 즉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당당히 나서 폭군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푸코는 말했다. 그러므로 진실 말하기는 언제나 말할 수 있는 권리 혹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의 말하기와 관련되며, 따라서 그것은 말하는 이에게 모종의 위험을 초래하는 말하기다. (239)

: 파르헤지아에 대한 푸코의 서술을 보면 증오와 광신주의에 대해 어떻게 저항을 표현해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즉 주체성을 박탈당한 이들, 피부와 신체와 수치심을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비사회적' 인간으로, '비생산적' 삶 또는 '무가치한' 삶으로, '변태'나 '범죄자'나 '병자'로, 인종적 혹은 종교적으로 '비순수'하거나 '비본연적'이라고 범주화되고 그럼으로써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 이 모두를 보편적 우리에 속하는 개인들로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다.(242)

 

* 행동과 실천 

: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또한 말해진 진실과 동맹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부류는 아니더라도 다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단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가치의 동등함을 명백하게 표현해야 한다. 즉, 압박과 증오에 맞서 실제로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진실이 시적인 상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실현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49) 

: 권력은 사실 그 누구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함께 행동할 때 생겨나고 그들이 흩어질 때 사라지는 것이다. 이 말은 민주적이고 열린 사회의 '우리'에 관한 가장 적절하고 아름다운 묘사일 것이다. (중략) 증오에 저항하는 것, '우리' 안에 한데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용기 있고 건설적이며 온화한 형태의 권력일 것이다.(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