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에 개봉한 레즈비언 영화들을 보면서 여성해방의 정서를 느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생각하며. "레즈비언 페미니즘"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았는데, 사실은 이것에 오래된 페미니즘 용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시... 페미니즘을 알지 못하는 나... 처음부터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노트를 시작한다.
<여성과 동일시한 여성>에서 레즈비어니즘은 일종의 성적 분류로보다는 정치적 자세로 쓰인다. '레즈비언은 폭파 직전 지점에 있는 모든 여성들의 분노'인 것이다 <급진레즈비언>의 글은 레즈비언에 대한 증오는 남성지배의 효과라고 주장하며 레즈비언을 남성 동성애자들보다 이성애 여성들과 더 가깝게 만들었다.
"레즈비언은 하나의 말, 이름표, 여성들을 한 선상에 놓는 조건이다. 레즈비언은 남성들이 자신들과 동등해지려는 어떤 여성에게든, 자신들의 (모든 여성을 남성들 사이의 교환수단의 일부로 만드는 것을 포함한) 특권에 도전하는 어떤 여성에게든, 스스로의 욕구를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어떤 여성에게든 덧씌우기 위해 발명한 이름표다." (같은 책 163)
레즈비어니즘은 페미니즘의 논리적 확장. "레즈비어니즘은 여성들과 관계하는 여성이, 여성에 대한 그리고 여성과 함께 여성 해방의 핵심에 있으면서 문화 혁명의 토대인 새로운 의식을 창조하는 여성이 으뜸으로 여기는 것이다."(같은 책 167)
"<전국여성단체>는 레즈비언이 겪는 이중 억압을 인지하고 있음을 결의한다. 자신의 인격에 대한 여성의 권리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규정하고 표현할 권리와 자신의 생활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포함하고 있음을 결의한다. 그리고 <전국여성단체>는 레즈비언이 겪는 억압이 적법한 페미니즘 사안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결의한다."(Abbott and Love, 1973:134)
"만약 레즈비언 지속체(lesbian continum) 안에 모든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고려해보면 우리 스스로가 이 지속체 안으로 그리고 밖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고 규정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같은 글;54) 게다가 리치가 말하고 있는 레즈비어니즘은 젠더 범주들 내에서 가장 생산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어서 리치식의 레즈비어니즘은 게이 남성들과의 제휴 가능성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멀어졌다.
"레즈비언이 남성 동성애의 여성 형태로 '포함'됨으로써 레즈비언 자체의 정치적 존재성은 역사적으로 박탈당해 왔다. 레즈비언과 남성 동성애자 모두 낙인 찍힐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레즈비언의 존재를 남성 동성애자와 등치시키는 것은 여성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지워버리는 일이다. 레즈비언 존재사의 일부는 레즈비언들이, 일관성을 갖는 여성 공동체의 부재로 인해, 동성애자 남성들과 일종의 사회적 삶을 공유하며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데에서, 분명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경제적, 문화적인 특권이 없고, 여성들 사이의 관계와 남성들 사이의 관계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의 익명적 성행위와 성적으로 매력적일 수 있는 기준에 관해 남성 동성애자들이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연령주의 등이 있다. 나는 레즈비언의 경험이, 마치 모성처럼 완전히 여성적인(female) 경험이며 단순하게 그것을 성적으로 낙인찍힌 다른 존재들과 함께 괄호 쳐 놓는 한 이해될 수가 없는 특정한 억압과 의미,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같은 글 318-319)
"언제나 남성이 여성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은... 다른 모든 형태의 착취와 불법적인 통제의 본보기가 되어 왔다."(같은 글;68) 따라서 (게이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들이 레즈비언의 자연스러운 정치적 동맹이다. 게이 남성들은, 그들이 남성인 한,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전복하고자 전념하는 억압적 사회 구조의 부분이다.
연합 정치와 성적 신분을 강조하는 퀴어 이론의 친연성은 섹슈얼리티를 젠더의 부산물로 보지 않는 레즈비언 페미니즘 류와 분명히 관계되어 있다. 퀴어는 또한, 세 가지 중요한 점에서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제시하는 것을 생산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젠더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 섹슈얼리티를 개인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제도적인 것으로 틀짓기, 그리고 강제적 이성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애너매리 야고스, 박이은실 역, <퀴어이론 입문> 여이연, 2012.
============
젠더는 페미니즘 담론에서 파헤쳐지고 있으며, 또한 생산되기도 한다. 그리고 경험이라는 개념은 통일이나 차이라는 부수적인 개념과 더불어 이 생산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순수한 남성/여성 구성틀 속에 각인된 젠더는 모니크 위티그(Witting, 1980, 103-10)가 이성애중심적인 계약이라 명명한 것을 더욱 강화한다. 이때 차이는 남성/여성의 구분선을 따라 구성되며, 분석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남성에 반대한 존재로서) 여성의 존재이다. 정체성은 남성 혹은 여성 둘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이와 비슷한 경험적 정의가 레즈비언 정체성을 도모하는 데 활용된다. 케이티 킹의 분석이 이를 잘 드러낸다.
"마술적인 기호로서 레즈비언주의라는 용어 속에서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하나의 패턴이 되었다. 최근 몇 년 진행된 이같은 페미니즘의 분류학적 정체성은 그 패턴으로 스스로를 동화하고 있다. 레즈비언주의와의 동일시는 개인이 정체성이나 결사를 통해 이성애중심주의나 동성애혐오에 대한 모든 지식을 마치 마술처럼 알게 된다는 잘못된 의미를 전달한다. 레즈비언주의의 "경험"은 이성애중심주의적인 실천이나 동성애혐오적 실천으로부터 개인을 구제하는 것처럼 간주되어, 이들이 제도적.구조적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인 것처럼 제공된다. 특권화된 기표로서의 레즈비언주의의 권력으로 이성애중심주의와 동성애혐오를 분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직관적 도전의 필요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King, 1986)
킹의 분석은 레즈비언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경험"이 갖는 권위와 현존을 문제 삼는다. 그녀는 레즈비언/이성애중심주의적 구성틀 속에 차이가 단순히 각인되어 있고, 그 속에서 "경험"이 검토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범주로 기능하는 페미니즘 분석을 비판한다. 이는 위티그가 주의를 기울였던 여성/남성 구성틀과 비슷하다. 등식화 개념은 서로 다르지만 "경험"의 지위나 개념 정의는 똑같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여성" 혹은 "레즈비언"으로 존재하는 것에 놓인 정치학이 여성이나 레즈비언으로 존재하는 경험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적 존재와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며, 여기서 여성으로 존재하는 경험은 삼투작용을 통해 우리를 페미니스트로 변환시킨다. 페미니즘은 고도로 경쟁력 있는 정치영역으로 정의되지 않고, 단지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결과로 정의되는 것이다. 이것에 페미니즘의 삼투압 테마이다. 여성들은, 우리를 여성으로서 구성하는 경험과 결합하여, 그리고 그 경험과의 동일시를 통해 페미니스트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경험을 이론화하는 난제를 피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우리 대부분은 페미니즘 정치의 영역이나 범위를 무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드 로레티스가 이런 특징을 매우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준 바 있다. "페미니즘은 스스로를 정치적 지점으로 정의한다. 단순한 성 정치로서가 아닌 일상생활의 정치학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리고 이는 후에..... 표현이라는 공적 영역으로 진입해 실천을 창출하고, 미학적 위계 질서나 유전학적 범주를 대체함으로써 ...... 준거나 의미의 서로 다른 생산을 위한 기호학적 발판을 만든다."(1986,10)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문현아 옮김, <경게 없는 페미니즘>, 여잉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