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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후지타 쇼죠, 조성은 옮김, <정신사적 고찰>, 돌베게, 2013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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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상실의 경험>

골목길은 집의 내부와 출입구를 경계 삼아 바로 연속해 있는 친근한 밖의 세계이며, 사람들이 다목적으로 사용하는 공동의 공간이다. 그것은 관공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곳에서 관계한다는 의미에서 공공 공간이다. (9) 

들어온 돈의 액수 증감에만 정신을 뺏길 뿐 아니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자각도 분명하게 갖지 못하는 경우, 돈은 필요 이상으로 벌지만 그 대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가치와 기준을 잃어버리고는 무엇을 위한 경제활동인지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돼 버리곤 한다. 그것이 신중상주의의 니힐리즘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정신적 골격이 사라진 사회 상태는 더 이상 충분한 의미로 사회라 부르기 어렵다. ~ 그리고 이런 때야말로 곧잘 사회 바깥쪽에서 '생활에 목표를' 부여하겠다고 설치면서 '국가를 위해'라는 가짜 '가치'가 횡행하기 시작한다. (10) 

'작자'가 인간 사회의 역사 속에 공기와 같은 보편성으로 존재하면서, 각 지역마다 특징적인 요소와 몸짓을 지니면서, 그러면서도 동일한 주제를 동일한 구도로 전개하는 것이 동화와 놀이의 세계인 것이다. (15) 

거의 모든 동화의 주제는, 나이 어린 자가 여러 가지 형태의 비유적 죽음을 거친 뒤 다시 한 번 재생함으로써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적 외양(形姿)을 획득함에 있으며, 그에 대한 상징으로서 결혼의 성립이나 왕위의 획득 등이 이야기되는 것이다. (16) 

동화는 과거의 고전적 제식 구조체, 그 안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작용하던 일련의 경험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 동시에 '실재성의 역설 강조'를 포기하고 비실재적으로 경험의 존재를 보이는 방법을 체득했다. (23)

겸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의 태반을 기르는 것이 동화와 숨바꼭질의 세계라고 말한 것도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점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이다. (24)

'승리자가 명심해야 할 것은 패배의 경험을 패배자에게만 맡기지 않는 것이다. 승리자 스스로도 패배의 경험을 파악하고, 패배자와 패배를 공유해야 한다.' (28) 


<어느 역사적 변질의 시대>

일단 '메이지'라는 칭호는 궁정의 형평에 따른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신이라는 사회변동의 결실로서 발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천황가의 세습을 의미하는 데 불과한 '다이쇼'나 '쇼와'와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또한 사회의 안쪽에서 출현한 자생적인 사회적 힘에 의한 자주적 사회 활동의 한 성과로-불충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성과의 하나로-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동요에 대해 궁중(雲上)이 늘상 대응적으로 취했던 옛 원호와도 사정을 달리한다. (112)  입국의 시대. 

(후쿠자와 유키치) "입국(立國)은 사(私)다. 공(公)이 아니다."(114) ~ '사적'인 책임과 신의의 태도가 사회적 삶의 방식 면에서 '공적' 올바름을 실현할 때의 중심이 된다는 점을 늘 그렇듯이 지적 의외성으로 가득한 극단적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적으로 충격을 주는 한마디였던 것이다.(115) 

후쿠자와는 지나칠 만큼의 발군과 소피스트적 능력을 보임으로써 역사적 조건의 제약 속 특정 상황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인간에게 올바른 삶의 방식이란 대체 무엇이냐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 특별한 고려를 촉진하기 위해, 바로 이를 위해서 '특수'를 거치지 않는 '보편'으로서 이 명언을 설정한 것이었다. ~ 오히려 반대로 일정한 조건하에선 '철학의 사정(私情)이 입국의 공도(公道)임을 밝히며, 과거의 자타에 대한 책임 때문에 권위나 지위의 유혹에 맞서 일부러 역경 속에 머무르는 '사'적 의협심이야말로 오히려 모든 인간의 동권성과 만국의 평등성을 구체적으로 보증하는 데 불가결한 '대본(大本)인 연유를 명쾌하기 그지없게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116) 

이처럼 후쿠자와의 명언 '입국은 사(私)다. 공(公)이 아니다'라는 건 메이지 시대 '입국'의 목표성을 부정하지 않을 분 아니라, 나아가 '역경' 속의 '입국' 정신이 얼마나 당시를 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의 '사적' 신의와 연동되는 소중한 가치인지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117) 

그는 전형적 시대가 갖는 '공'과 '사'의 변증법적 구조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정신적 대표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기구적 관리사회가 '공', '사'의 엄격한 일원적 구별을 사회적 행동양식의 뿌리에까지 관철시킴으로써, 결국 늘 '공'적 모양내기만을 목표로 삼는 생활 태도를 외적 세계에 불러일으킨 결과 생활 속에서 오로지 법규에 적합한 것(합법성)만을 신앙해 의심치 않는 정신 상실 상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메이지의 '입국'이 비교적으로 건강할 수 있었던 건, 소량이나마 이 같은 정신적 요소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20) -> 근대적 특성

그 역사 과정의 해석이 주로 '공로'의 유무대소를 사정(査定)하고 '영예'의 분배량을 판정하는 각도에서 행해졌다는 점이다. 그런 이상 그 해석의 경쟁 속에서는 불가피하게 '영예'의 현세적 원점이 발생한다. 경험적 역사 과정이 '권위'를 뽑아내기 위한 장소로 인식될 때 그로부터 정치적 신화가 태어난다. 상대적인 역사 과정을 질적 차별을 지닌 권위의 상하 관계로 환치하는 작위적 의식과 정치적 신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126) 

메이지 후반의 경향은 지금 말한 바와 같은 구조로 러일전쟁 후에 완성되었다. ~ 그들은 생생한 권력의 겉무대에서 모습을 감춤으로써 오히려 정치신화적으로 절대화된 바, '원훈'은 이윽고 진짜 '원로'가 되어 은거한다. 이리하여 메이지 20년대부터 선구적 정론가들에 의해 문제시되어온 '덴포(天保)의 노인'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세대 교체는 권력의 장에서도 완료되었다. (128) ~ 이렇게 '입국'의 시대는 끝나고 국가는 더 이상 혼돈 속에서 만들어 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되었다. (129) 

메이지 20년대 전반까지는 일본 국내 자체가 '적 세력'과 '중립 세력'과 '아군 세력'이 서로 교착하는 하나의 국제사회였기 때문에 당시의 전략전술적 사고 또한 외국만이 아니라 모든 보편적 상황을 대상으로 작동하는 것이어야 했던 것에 비해, 청일전쟁 직전부터 일본은 지극히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반대파를 '대외 강경'이란 형태로 변화시키고 이어 거국일치 상태를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전략전술적 사고는 점차 이전의 보편성을 잃고 주된 대결 감각을 오로지 외국을 향해 쏟게 되었다. ~ 이른바 '국체론'이라는 것도 이러한 상황, 즉 국내 사회를 무대립 사회로 생각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욕구로부터 태어났던 것이다. (138) 


<이치무라 히로마사의 "도시의 변두리"에 대해>

메이지 중기에 이르러 '골목 뒤 우라다나 세계'는 과거 가세이 시대에 지녔던 정치사회적, 생활사회적, 두 가지 의미에서의 분방함을 박탈당한 채 차츰 국가적으로 통제되어 갔다.(158) 

그러나 그 수라의 분노와 복잡한 혼돈을 스스로의 등에 짊어지고 사회의 대세에 대해 자유자재로 비평을 펼치는 류호쿠나 조민 같은 존재는 더 이상 없었다. ~ 직업 기자는 빈민굴의 '르포르타주' 만들기에 전념해 공감능력과 비판 정신을 잊고, 사회문제가는 수라장의 불결함과 혼란에 압도되어 공포와 자혜적 동정을 보이는 게 고작이었다. 거기서 나온 의견은 '기친야도 개조론'이자 '빈민굴 정리론'에 불과했다. (159-160) 

현세적 이익과 성공만을 추구하는 지금 일본의 압도적인 초실리주의 분위기 속에서,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패배하면서도' 패배라는 중요한 경험을 경험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펼쳐나가는 '열자 열위성'의 가능성과 세계 형성성을, 약간 돌진성은 부족하더라도 그처럼 기개 높게 말할 수 있는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 나는 기원해 마지않는다. 그 축복이란 아마도 그가 그려 낸 바와 같은 류호쿠나 조민의 길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굴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이리라. (161) 


<'쇼와'란 무엇인가>

원호를 사건의 결과에 따라 고친다는 것은 사건에 대한 감수성과 상징에 대한 자각이 다소간이라도 연동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또 한 가지, 원호라는 통치 체계의 상징이 상대적으로 다른 두 상징들과는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존재였다는 점 또한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일으킨 세계전쟁에서 패배하였다는 최소한 '개원'은 당연한 필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 천황제가 천황이라는 칭호는 그대로 보존한 채 새로운 형태의 제도로 개조돼, 말하자면 '특수하게 근대화'돼 '일대일원호'(一代一元號)화 되었으므로 사태에 대응하는 '원호 감각'은 우선 천황제 지배자의 내부로부터 사라졌다. (176) 

언어에 대한 현대적 소외(즉 다른 것으로 변해 버리기)의 선구가, 다른 것도 아니라 일반적으로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천황제의 행동양식 속에 있었다는 역설은 우리에게 더욱더 고도의 해부를 요구하지만, ~반대로 '제국'적 거대함의 모의적 획득을 염원하던 모던한 '율령국가'의 상징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갈아 입히며 현대적 제국의 권력 상징으로서 기능시킬 것인가, 하는 목표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자체로도 이 역설에 대한 여기서의 시사적 답변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181) 


<전후 논의의 전제> 

경험이 고형의 '물체'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경험이 아니라 경험의 소외태이며, 사고가 완결적인 '물체'가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사고가 아니라 사고의 소외태인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정신 상황이 가진 특질의 심부에는 경험과 사고의 소외가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경험의 소멸'과 '사고의 고형화'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 그런 만큼 자의적으로 미화할 수도 있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다는 '허위의식의 소재'가 된다. 인식(과 이해와 상상력)이 자기 위신을 걸고 온 힘을 발휘해야 하는 건 이때다. 경험이 소외태가 되어 '이용의 소재'로 화할 때, 그때 소외태라는 '태고의 화석' 속에 태고의 살아 있는 모습을 재형성하는 것이 인식에 부여된 영광스런 의무인 것이다. (189) 

제도화가 전 사회에 관철되었다는 건, 단적으로 말해서 일의성의 지배다. 우리는 직접적 생활 물자의 풍부함을 손에 넣은 대신에 일물일가와 일문일답이라는 편차치적 일렬종대의 압력 속에서 지금 양의적 부피를 완전히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전후 체험'을 바라보면 비참함은 단지 비참함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경험이라는 '상호성의 덩어리'의 상실은 이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191) 

우리가 국가로부터 이탈한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일본인이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단체 의식이 과잉된 일본을 바로잡아 공평한 감각을 갖춘 일본으로 바꾸어 가는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 이탈 정신을 포함하지 않는 단순한 '참가'주의는 '익찬'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좌우대소의 갖가지 추수주의(追隨主義)를 낳는다. 이는 이미 역사가 통렬하게 가르치고 있는 점이다. 

'이혼'의 자유라는 원칙적 위기를 끊임없이 내포할 때야말로 '결혼'이라는 결합의 적극성이 존재할 수 있다. 분리와 결합, 이탈과 소속 등의 변증법은 바로 그런 것이다. 민족 문제에 대해서든 조직에 대해서든 이 진리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진리의 실현태를 밑받침하는 정신적 기초의 열쇠는 다름 아닌 이탈 정신의 존부(存否)에 있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전 구성원들의 탈출과 망명 가능성이 항상 고려될 때에야 비로소 국가를 포함한 모든 조직 단체는 건강할 수 있다.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