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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중 "가능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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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죽음>


  시는 시인에게 그가 다가갈 수 있는 진리나 확실성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시인인지 모르고, 시가 무엇인지, 시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시는 그에게 달려 있고, 그의 탐구에 달려 있다. 이러한 의존관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가 찾는 것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만든다. 


  나는 죽을 수 있는가? 나는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빠져나갈 통로가 거부되었을 때에만 힘을 얻는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조건에 대한 확신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온 힘을 모을 때, 인간의 염려는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다. 그에게 있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두 번에 걸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즉 존엄하게 극단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127) 


  "자신을 제거한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존경받을 만한 행위이다. 우리는 살아갈 권리를 거의 모두 여기서 획득한다."(니체, 백승영 옮김, <우상의 황혼>, 2002.) 자연적인 죽음은 "가장 경멸스러운 조건 속에서의 죽음, 와야 할 때 오지 않는 자유롭지 못한 죽음, 비겁한 죽음이다. 삶에 대한 애정으로 사람은 전혀 다른 죽음을, 우연도 놀라움도 없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죽음을 갈망해야 하리라." 니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자유의 메아리처럼 울린다.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살할 수 있다. 여기에 경이로운 방법이 있다. 손이 미치는 곳에 이러한 산소통이 없다면 사람들은 질식하고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다. 자기 가까이 있는 유순하고 확실한 죽음은 삶을 가능하게 한다. 죽음은 바로 공기와 공간과 즐겁고 가벼운 움직임을 주기 때문이다. 죽음은 곧 가능성이다. 

  자의적 죽음은 윤리 문제를 제기하는 듯 보인다. 자의적 죽음은 고발하고 판결하고 최후의 심판을 내린다. 혹은 자의적 죽음은 하나의 도전처럼, 외부의 전능에 대한 도전처럼 보인다. "나는 나의 불복종을, 나의 새롭고 가혹한 자유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살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악령>) (128-129) 


  분명 그가 죽음을 자신의 완전히 인간적인 가능성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절대적 자유에 도달하고, 그는 인간으로서 절대적 자유에 도달하며, 그는 인간에게 절대적 자유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혹은 달리 말해서, 그는 사라져 가는 의식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의식이 될 것이고, 자신의 의식에 의식의 사라짐을 온통 그대로 덧붙이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실현된 총체가, 모든 것의 실현이, 이른바 절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 불멸의 특권보다 한층 더 우월한 특권이다.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