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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및 기고문들

Death is Not the end. But only a tran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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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Dream Theater의  <Metropolis PT2 ; Scenes from a memory>앨범의 가사에서 발췌하였다.  


이 글은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평을 찾아보다가 내가 하도 억울해서 메모한다. 

  인상평만 먼저 간단히 적어보자면, 2013년 1월에 본 두 개의 혁명 영화 중에서 더 위안이 되었던 것은 <레미제라블>이 아니라 <클라우드 아틀라스>였다. 2013년 1월, 한국에서 얻은 <레미제라블>의 큰 흥행이 기만적으로 느껴진 반면,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흥행실패가 적지 않게 아쉽다. 내가 매우 사랑하는 이동진 씨마저 "내적 연관성이 없기에 서로 묶이지 않는 요소들을 억지로 묶어내는 데서 오는 폐해는 각 에피소드들 간에 심한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합니다."라면서 실망감을 느꼈다고 하니, 내가 본 내적 연관성과 내가 느낀 감동요소를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하려고 한다. 워쇼스키 형제와 영화 <향수>에 대한 내 애정을 기반으로 했을 때, 이 영화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1.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매트릭스>의 확장판이다. 

  <매트릭스>의 주제가 흔히 시뮬라시옹과 시뮬라르크의 분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좀더 본질적인 주제는 - 매트릭스 광팬들이라면 알겠지만 - 인간본연의 탐욕이 가져오는 산업화시대의 최종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현대적 종말론이자 묵시록이다. 매트릭스가 보다 SF의 향기와 오락요소를 지니면서 고도로 추상된 미래를 보여주었다면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좀더 친절하게도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고 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아마 속편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매트릭스>의 네오는 손미-451로 재등장한다. 네오가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했다면 손미는 복제인간, 즉 반인간으로 등장한다. 이건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컨셉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변함없이 계몽주의적 시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감독의 고집스러움이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손미는 네오와 마찬가지로 죽음으로써 신념을 전하고 하나의 의미이자 상징이 된다. 

  "근대적 이성"에 대한 "반근대적 광기"의 승리를 영화화 했던 톰 티크베어가 워쇼스키 감독의 작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매트릭스>가 단순히 신화적 계몽주의가 아닌 본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통주제에 동의하고 있다. 


2.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주제는 "윤회"가 아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좀더 직접적으로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점은 근대화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반복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촌스럽고 유치하게 해석하자면 그 이후로 끊임없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이자, 그것을 획득하고 유지하고 게걸스럽게 확장시키려고 하는 보수층의 계급의식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산업혁명 이후의 1849년의 노예계급제, 식민지배의 모습과 기계적 노동자를 양심 없이 착취하는 2144년의 서울의 모습이 일치되고 있음이다. 우리는 과연 진보하는가. 미래사회는 과연 발전적인가. 그에 대한 회의적 의심은 2346년 지구의 모습에 담겨 있으며, <매트릭스>의 원시적 "시온"에 담겨 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주제는 "윤회"가 아니다. 단지 윤회라는 요소를 차용하여 우리의 삶이 반복되고 있음을, 극복하지 못할 거대한 보수주의에 갇혀 있음을 피력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다양한 분장을 한 주인공들의 반복적 등장에 열광할 필요는 별로 없을 듯하다.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의 의식적 차원일 뿐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하다. 대신 그들은 무언가의 상징이다. 유치하지만 아주 직설적으로 그렇게 그리고 있다. 


3. 모든 문제는 다시 자본이다. 

  인간의 권력욕, 기존의 가치관을 보수하려는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계급구조를 지적한다. 옛 이름은 식민주의고 지금은 신자유주의이자 공포정치이며 언젠가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먹어버리게 될, 극단적 원시주의가 될 것들. 그곳엔 빠짐없이 자본가이자 계급적 보수주의의 화신들이 등장한다. 


4. 왜 우리는 항상 실수를 할까. 

   한 세대의 실패, 한 인물의 실패는 끝이 아니라 사랑으로, 신념으로 비이성적인 믿음으로 이어진다. 실수는 이어지지만 그 인연과 시도는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막연한 믿음, 그것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자기 스스로가 음악이 되어 세상에 머물겠다고 한 프로비셔처럼. 


5. 두려운 것.

  휴 그랜트는 자본가, 휴고 위빙은 그 자본을 유지시키려는 정치적 보수주의자, 톰 행크스와 할리 베리는 이 세상의 비단절성, 연속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절대 악으로 등장하는 휴고 위빙과 휴 그랜트. 자본가와 보수주의는 우리의 영원한 적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절대악에 대항해야 하는가. 그들과 소통을 맺고 그들도 '타자'가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이 오게될까. 아직까지도 그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