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몽상가들>(I Sognatori, 2003)
여기에 한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신발과 옷들이 벗겨진 몇몇의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총을 쥔 군중들은 화염이 자욱한 도시를 뒤로 한 채 전진합니다. 전진하는 군중들에게 발밑의 쓰러진 사람들과 애원하는 여인에게 시선을 줄 여유는 없습니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양 가슴을 확연히 드러낸 채로 프랑스의 깃발을 들고 있는 자유의 여신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조금 이상합니다. 군중을 이끄는 준엄한 표정의 여신이 아니라 화폭바깥을 농염하게 응시하는 여인이 보입니다. 입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힌 채 실눈을 뜬 이 여인, 마릴린 먼로의 얼굴은 그 유명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얼굴 위에 부자연스럽게 몽타주 되어 있습니다. 뾰족하게 잘라진 먼로의 목덜미 아래로 보이는 자유의 여신의 가슴은 원본과 달리 더욱 섹슈얼함을 풍깁니다. 들라크루아에 의해 정의와 평등과 자유의 담지자로 그려졌던 여신의 모습은 섹스어필을 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혁명의 깃발에 오버랩 되는 섹슈얼리티의 이미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몽상가들> : 성적 유희에 담긴 인간해방의 이미지
위의 이미지는 2003년 개봉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에 등장합니다. 이 영화는 배경인 6.8혁명과 섹슈얼리티을 밀접하게 그립니다. 위의 몽타주는 이 영화의 상징적인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6.8혁명은 일상생활에서 문화적 저항과 정치적 저항이 융해되어 표출된 혁명으로, 대학교육의 대중화, 성의 혁명을 통한 여권의 성장, 엘리트 문화의 대중화라는 성과를 낳았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정리하려는 감독의 자전적 성향이 결부된 영화가 <몽상가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권위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항하고 개인의 자유와 일상성의 민주주의의 추구,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엄준한 구분을 거부하고 육체와 욕망을 따르는 것, 권태를 거부하고 억압된 사회구조를 전복하고자 하는 열정이 당대의 대표적 분위기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혁명을 생각할 때마다 섹스가 하고 싶다”는 당시에 유행했던 언설은 혁명이 권위주의를 탈피하는 것을 가장 핵심적인 사항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내비칩니다. 빌헬름 라이히는 ‘성 정치’와 ‘성 경제학’을 개념화함으로써 쾌락을 억압하는 기제를 제거하고 왜곡을 줄이는 것이 ‘성 혁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혁명이란 혁명 진영 내부의 금욕과 성적 금기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쌍둥이 남매인 테오와 이자벨은 자신들이 샴 쌍둥이와 같다고 주장하는 6.8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들입니다. 이들의 성적 유희와 가치관들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적 분리관계를 벗겨내는 인간해방의 이미지를 지님과 동시에, 현실에 추상적으로 대응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도 갖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테오와 이자벨이 화염 속으로 사라질 때, 그들과 결국 동화되지 못하고 그들을 떠나보내는 매튜의 뒷모습은 6.8혁명의 한계와 불완전함을 추억하는 당대 사람들의 허무함을 남기고 있습니다.
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우리의 신체에 새겨진 파시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네 명의 인물들이 상호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기대와 실망, 도약과 실패를 1948년의 시대상황과 함께 엮어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육체와 정신의 분열과 연계 안에서 삶의 무거운 진리들을 헤집습니다. 여기에서는 네 명의 인물 중 테레사에게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토마스는 섹스를 수집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여성편력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테레사를 사랑하게 되지만(다르게 보자면 책임지게 되는 것일 수도 있지요), 사비나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 그는 성관계를 맺을 때 ‘벗어!’라는 권위주의적 명령으로 여성들을 대하면서 권위와 정복욕을 성관계를 통해 드러냅니다. 테레사는 그러한 토마스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서로가 결여를 채우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테레사가 토마스를 만나는 이유는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테레사는 토마스를 통한 신분상승의 욕구를 충족하려 합니다. 그가 진창에 있는 자신을 구원해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출세에 관한 그의 욕구는 혁명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납니다. 테레사는 혁명의 광장을 사진으로 찍어 신문사에 제공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찍은 혁명의 찰나를 관능으로 인식합니다. 혁명은 진창 속의 자신을 구원할 상승의 이미지로 그녀 자신에게 박힌다. 그러한 그녀에게 혁명이 또 다른 이름의 파시즘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테레사는 모든 권위주의를 탈피할 것을 원하지만, 그 자신이 그 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인지 쉽사리 벗어나지 못합니다. 테레사에게 토마스와 혁명은 억압과 권위의 상징이자 동시에 관능입니다.
보헤미아를 떠난 지 일이 년 뒤, 그녀는 소련 침공 일주년이 되는 날 우연히 파리에 있었다. 그날 항의 시위가 있었고, 그녀는 그 시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젊은 프랑스인들이 주먹을 치켜들고 소련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슬로건을 외쳤다. 그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으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입을 맞추어 구호를 외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놀랐다. 그녀는 시위 대열 속에 단 몇 분밖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체험을 프랑스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 “점령당한 너의 나라를 위해 투쟁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소리야?”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색함을 느끼고 말을 딴 데로 돌렸다.(118)
테레사에게 모든 억압은 ‘근본적인 어떤 악’입니다. 그리고 그 억압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키치”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합니다. 키치란 사람들에게 단순히 특정 감동을 전달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기본 과제인 커뮤니케이션입니다. 그래서 키치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감동을 파는 것, 정서적인 반응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밀란 쿤데라에 의하면 “하나의 정치적 흐름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면 그것은 “전체주의적 키치”가 됩니다.(239) 특정 주체가 의도한 감정을 유발하지 못하면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불필요한 쓰레기로, 가차 없이 던져버리는 것. 그렇다면 그것은 모두 “개신교 키치, 유태인 키치, 공산주의 키치, 파시스트 키치, 민주주의 키치, 페미니스트 키치, 유럽 키치, 국가주의 키치, 국제주의 키치”(294)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주의적 특징들은 토마스에 의해 테레사의 신체로 각인됩니다. 테레사가 토마스에게서 느끼는 고통은 자신이 초래한 것임과 동시에 사회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혁명과 사랑 속에는 일방적인 어떤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진보주의자의 섹슈얼리티를 이야기할 때 늘 빠뜨려놓는 한 축. 그것은 다양한 삶의 그림들이며 사람들입니다. 테레사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혁명과 사랑, 문학에 자신을 던졌지만 정작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슬픔과 회한, 연민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혁명과 섹슈얼리티를 잇는 중요한 두 번째 이미지는 우리의 신체에 새겨진 파시즘을 클로즈업하는 렌즈인 셈입니다. 반복되는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우리 안에 숨겨진 폭력을 끊임없이 끄집어내고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지요.
필립 카우프만, 프라하의 봄 (1988)
1) 베르톨루치 감독의 인터뷰 참고. http://www.mixedreviews.net/extrahelpings/bertolucci_interview/bertolucci_interview.shtml 2) 빌헬름 라이히, 황선길 역,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2006.
3) 움베르트 에코, 윤종태 역, <매스컴과 미학>, 열린책들, 2009.
("critic-al.org" 2013년 11월 22일자 이원경<혁명과 섹슈얼리티를 잇는 두 가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