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노트

토마시 할리크, 차윤석 옮김, <그리스도교의 오후>, 분도출판사, 2023.

728x90

 

 

노트를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내 삶의 태도와 방향성,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윤리규범이 되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연구에는 적합하지 않은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취약점이겠지만, 

어찌 보면 처음부터 이 공부를 시작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인지 인문학을 연구했던 20대는 내내 내 안에서 충돌을 겪었던 것 같다. 

20대는 인문학에 대한 열정,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정을 지님과 동시에, 

개인적 의미로 종교적 체험을 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하고 괴리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고, 두 세계로 나뉘어 나의 삶을 파편화하고 있었다. 

두 가지 삶의 방식이 겹쳐지게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혹은 한쪽 방향의 가치관을 지나치게 설파하기도 했다. 

오늘 아침까지도 이 책을 읽으면서 표지의 제목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광신도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며, 가톨릭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독선과 독단에 내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간접적으로 저항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 책의 독서 후기를 남기려는 이유는, 이 책이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주 이 책을 읽으면서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던 두 가지 가치관의 충돌이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그리스도교가 절대적 신비에 '인격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화적 특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30)"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는 무신론자인 넌스nones와의 관계 맺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보편적 교회의 외연 확장이라는 주장에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는 가톨릭 교회의 개혁과 목적, 그리스도교가 추구할 새로운 변혁이자, 예수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고민과 실천, 죽음과 부활의 예식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오랜 역사를 통해 가톨릭 교회가 무시해 왔던 많은 의제들, 즉 여성인권, 이방인의 인권, 전쟁과 죽음, 동성애를 비롯한 여러 성과 관련된 기존 가톨릭 교리의 문제, 비신자와의 관계, 장애인의 인권, 환경문제, 정치권력의 문제 등을 재고해야 할 중대한 시기에 도래했다는 지점까지 이른다.  

내가 이 책 한 권을 읽고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내 안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분명히 이러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중요해 보이는 단락들을 소개하겠지만, 내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에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므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전권을 읽어보기를 적극 추천드린다. 

 

 

 

 

 
그리스도교의 오후
저자 토마시 할리크는 영성가 안셀름 그륀과 나눈 대담집 1권을 포함해서 우리말로 번역된 네 권의 책을 통해 이미 눈 밝은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오후」는 그리스도인은 물론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이나 성 소수자에게도 말을 걸 수 있는 보편적 그리스도를 찾아 나서는 신앙 여정을 탐색한다. 할리크는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넘어서 ‘인류’의 관점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와 미래를 그리고 있으며, 지치고 좌절한 지금 이 시대에 자기초월적 그리스도교와 더불어 새로운 도전을 해 보자고 독자들을 초대한다.
저자
토마시 할리크
출판
분도출판사
출판일
2023.04.20

 

 

<신비 체험과 실천적 신앙> 

-그리스도교가 절대적 신비에 '인격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 관계에 대화적 특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31) 

-이런 신앙 이해와 불가분인 또 다른 개념은 창조적인 전달과 증거의 살아 있는 흐름을 가리키는 전승(Trandition)이다. 전승은 끊임없는 재맥락화와 재해석의 움직임이다. 전승을 연구한다는 것은 불연속성에서 연속성,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매번 새로운 현상들의 다원성에서 정체성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32) 

-내가 이 책에서 언급하는 신앙은 단순히 '교회 권위가 제시한 신앙의 교리들에 대한 이성적 동의'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다. 복음이 요구하는 메타노이아, 즉 회심, 신앙의 수용은 세계관의 변화뿐만 아니라 실존적 회귀이며, 거기서 생겨난 시각과 인지의 관점 변화이다. 이는 깨어서 새로운 삶의 길로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33)   

 

 

<시대의 표징 읽기> 

 

-나는 이 책에서 적용한 신학적 접근법을 카이롤로지(Kairologie, 결정적 시간론)라고 부른다. ~크로노스(chronos)는 양적인 시간으로서 시, 일, 년의 순서 즉 우리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 가능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킨다.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로 기회, 무언가를 위한 때, 무르익은 때, 엄습의 순간이다.(39-40)

 

<종교적 그리스도교 또는 비종교적 그리스도?> 

 

-바오로 사도는 '첫 번째 개혁'을 대표한다. 그는 신생 그리스도교를 당시 유대교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모세 율법의 엄격한 해석자들과 빚은 예수의 갈등을 급진적으로 심화시킨다. 그는 모세 율법의 엄격한 해석자들과 빚은 예수의 갈등을 급진적으로 심화시킨다. 그는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우선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의무, 즉 할례를 비롯해 모세 율법의 많은 의례 규정을 받아들일 의무를 면제해 주고,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핵심으로 삼는다. 이로써 그는 '경건한 이방인'(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대교에 동조하며 철학적 유일신을 믿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는 동시에, 품이 많이 드는 유대교의 규정들에서 막 해방된 이들 공동체가 고대 문화의 더 넓은 세계로 더 쉽게 편입되도록 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견지에서 신앙은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고, '새로운 창조'의 일부이다. (73-74) (갈라, 3,28 참조) 

-렐리기오, 즉 사회를 통합하는 힘이란 의미에서의 종교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 역할을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제는 맡지 않는다. 다른 현상들이 현대사회의 '공통 언어'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렐리기오란 의미에서의 종교와 분리된 후 비종교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차츰 종교의 다른 형태, 즉 근대의 세속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 형태를 받아들이고 있다.(82) 

-교회가 근대성과 화해하려는 노력은 너무 늦게 시작되었다. 역설적으로 그 노력은, 근대성이 다시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려는 순간에 이루어졌다. 세 가지 의미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한 교회의 노력, 즉 그리스도인 간의 일치, 이웃 종교와의 대화, 세속적 인본주의 및 '비신앙인들'과 친교를 위한 노력은 의미 있는 진전을 가져오긴 했지만, 아직 절반 정도밖에 이루지 못했다. (87) 

 

<정오의 어둠> 

 

-이 장에서 나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정오에 닥친 위기를 이야기하려 한다. 아서 케스틀러의 소설 제목 <정오의 어둠>에서 따온 것인데, 그의 소설은 세계의 이목이 러시아에서 스탈린 정권의 범죄에 집중되도록 한 최초의 문학작품 중 하나였다. 이 제목은 명확히 정오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어둠이 온 땅을 뒤덮었다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암시한 것이었다.(94) 

-가톨릭교회는 서구 문명 전반에 걸쳐 중대한 성직자의 위기를 겪고 있다. 광범위하게 구설에 오르는 성적 학대 추문들은 성직자가 겪고 있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각한 위기의 한 양상일 뿐이다. 사제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으며, 교회와 사회에서 그 역할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기존의 대답들은 사회 변화와 특히 앞서 언급한 위기로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99) 

-수십 년간 계속해서 하느님께 사제의 소명을 청해 온 교회 전체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라면, 아마도 하느님은 무응답으로써 우리가 당신이 닫으신 문을 고집스럽게 두드리는 대신 다른 문과 다른 해결책을 찾기를 바라진다고 말씀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혼 남성의 서품과 최소한 여성의 부제품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채택할 수밖에 없지만 바티칸이 아직 주저하고 있어서 아마도 너무 늦게 취해질 조치들도 이런 위기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교회가 지역 교구의 본당 공동체 모델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사목적 직무 모델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사제의 소명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한, 새로운 스타일로 사제를 양성할 여건과 남녀 평신도가 교회 생활과 활동에 더 참여할 여지를 만들지 않는 한, 이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100-101) 

-노동 사제들의 활동이나 공산주의 치하 체코슬로바키아 지하 교회의 사제였던 우리 경험처럼 현장에서 제기된 많은 제안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진한 교회 분권화인 시노달리타스(동반 여정의 정신) 모델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리가 추측한다. 왜냐하면 구체적 해결책은 항상 각 나라의 사회적.문화적으로 구체적인 여건들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101)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교회 안에서 견해의 차이점이 드러났다.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성적 학대의 책임을 이른바 1960년대 성 혁명의 결과로 성직자들의 도덕이 해이해진 탓이라고 여겼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담하게 이런 현상들의 뿌리 깊은 원인이 성직주의, 승리주의, 교회에서 권력과 권위를 다루는 문제라고 진단했다. (103-104) 

-카를 야스퍼스 같은 사상가들은 독일 국민 일부가 그 이름으로 한 일에 대하여 국민 전체가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야스퍼스도 공동 책임의 정도를 구별했다. 이제 교회의 일부 대표들이 '거룩한 권력'과 권위를 남용한 것에 대하여 교회의 책임을 따져 봐야 할 시간이다. 아마도 바로 독일에서, 특히 이른바 동반 여정의 맥락에서 지역 교회가 이런 질문을 긴급하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독일 역사 기억의 도덕적 민감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104-105)

-예수님은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였다. 사제의 의례적인 종교와 그것을 비판하는 예언자적 비판가들 사이에 긴장이 있을 때, 그는 예언자들 편에 섰다. ~ 그는 제자들에게 권력 세계와 종교적.정치적 조작에 도발적으로 맞서는 이들이 되라고 권한을 부여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빵을 나누어 주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 자기부정, 자기 증여를 따라 실천할 사명을 맡겼다. (105) 

-사제는 숭배를 받는 아이돌이 되어선 안 된다. 성직주의와 싸움은 건전한 방식의 우상 파괴이다. 교회에서 사제로 불리는 이들은 직무 사제직이란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가진 사람들로 예수님의 계명을 이행하고, 모든 이들의 가장 하찮은 종이 되라는 사명이 있다. 이것이 사제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이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도적 계승'의 특징이다. (106-107)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은 죽음과 부활로 구성된 부활 사건에 반복적으로 들어가면서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오후라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기 전에 드리운 정오의 기나긴 암흑은 일종의 아남네시스(anamnesis), 곧 부활에 대한 기억을 현재화하여 부활을 일깨우는 신호와 같다. (12)   

 

 

<신이 되돌아온다고?> 

 

이 장에서는 유럽 문화의 역사와 공명하면서 서로 대응하는 변화를 맞아왔던 가톨릭 교회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모더니즘, 프로테스탄티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나치즘, 68혁명과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문명적 변화들과 어떻게 공명하였는지, 그 결과 현대의 가톨릭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정착되었는지를 기록한다. 직접 읽어보는 것이 훨씬 유용할 것이라 생각하여, 노트에는 생략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중앙집권주의 완화, 공동 합의 정신(시노달리타스)의 원칙 강화, 지역 교회에 더 큰 자율성과 책임감 부여에서 확실한 해결책을 찾고 있다. 하지만 지역 교회 내부의 긴장들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장상들, 특히 주교들이 자기 역할을 왕정 시대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 안에서 대화의 중재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남성과 여성 신자 개개인이 각자의 은사를 발휘할 여지를 만들어 주고 이를 지켜 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는가? 여성이 신앙 공동체에서 동등하게 공동 책임을 질 자격과 능력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137-138)

 

 

<근대 종교의 계승자>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경쟁자는 세속적 인본주의와 무신론이 아니라 교회에서 벗어난 종교심이다.(139) 

-그리스도교 상징과 수사학을 정치적으로 남용하고 오용한 사례가 미국의 종교적 우파인데, 그들은 비도덕적 대중영합주의자인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의 수장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유럽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극우 정치 선동가들과 민족주의 대중영합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서구 그리스도교 가치의 옹호자들이 있다. 이 상황은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체코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공격하기 가장 좋아하는 과녁은 유럽연합과 이슬람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이러한 민족주의 추세는 현재 대기업 수준으로 가동되는 러시아의 선전 선동으로 조직적으로 조장되고 있는데, 가짜 뉴스와 허위 정보를 소셜 네트워크에서 퍼뜨리고 있다.(142)  

-넌스(nones)의 일부는 교회, 특히 가톨릭교회를 떠난 사람들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신자가 교회를 공적으로 떠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교회에서 심각한 성적.정신적 학대 사례가 줄지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뭔가를 영성적으로 찾는 사람들인 구도자들seekers이 넌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나는 그리스도교의 미래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 넌스 중의 영성적인 구도자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150-151) 

 

-특정한 가치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교가 그 많은 본질적인 특징들을 각인해 온 역사를 관통하며 흘러온 신앙의 흐름과 관련이 있다. 누군가가 인간 인격의 존엄성과 인권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을 계몽주의에서만 도출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그는 계몽주의가 이런 사상을 어디서 창출했는지 더 깊이 빠져 봐야 할 것이다. 그 사상은 종종 과거에 신학과 주로 교회의 현장에서 충분히 실현되지 못한 복음의 사상으로, 때때로 교회 기관의 정치적 입장과 배치되어 관철되었다. 

-찰스 테일러는 여러 저서에서 교회가 정치적 권력을 잃은 뒤에야 비로소 복음의 사상이 유럽 정치문화의 필수 요소가 되었음을 입증했다. 비슷한 방식으로 한스 퀑은 프랑스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에 담긴 그리스도교의 정통성을 지적하고, 그 기원이 복음에 있음을 언급한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가 "제3의 교회일치운동"의 길에서, 즉 계몽주의에서 비롯된 세속적 인본주의와 열린 대화의 길에서 가톨릭의 보편성을 강화하길 바란다면, 역사에서 종종 이용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불신했던 유산 중 많은 것을 이 대화에서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