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앙리 베르그손
- 출판
- 아카넷
- 출판일
- 2005.01.20
제1장 생명 진화에 관하여, 기계론과 목적론
-우리 삶의 각 순간들은 일종의 창조이다.(28)
-의식적 존재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성숙하는 것이며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30)
<무기체들>
-과학이 물질적 대상이나 고립된 계에 부여한 추상적 시간 t는 일정수의 동시성들simulaneites 또는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응점들correpondances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대응점들을 서로 분리하는 간격들의 본성에 관계없이 그 수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역주 : 핵심적인 변수인 시간 t는 베르그손의 입장에서 말하는 흐름 즉 지속이 아니라 그것을 정지점들의 합으로 재구성한 것, 곧 동시성들을 표현할 뿐이다.)(32)
-t라는 수는 언제나 같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대상들이나 계의 상태들과, 그것들이 그리는 선의 점들 사이에서 여전히 같은 수의 대응점들을 헤아릴 것이며, 이 그려진 선은 이제 <시간의 흐름>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적] 잇따름succession은 물질세계에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고립된 계들에 대한 우리의 추론이 그 계들 각각의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가 부채 모양으로 한꺼번에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암시를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래도 이 역사는 마치 우리의 지속과 유사한 지속을 점유하고 있는 것처럼 점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만약 내가 설탕물 한 컵을 만들려고 한다면 서둘러도 소용이 없고,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한다. ~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나의 조바심, 즉 마음대로 늘이거나 줄일 수도 없는 나의 고유한 지속의 몫과 일치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사유된 것이 아니라 체험된vecu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 아닌가? 한 컵의 물, 설탕, 그리고 설탕이 물에 녹는 과정은 아마도 추상일 것이다. 그러나 내 감관과 지성이 그것들을 전체로부터 분리할 때 이 전체는 아마도 의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할지도 모른다. (34)
<유기체들>
-물체들 les corps bruts은 자연이라는 천에서 지각에 의해 재단된 것이며, 지각이라는 가위는 말하자면 행동이 지나갈 길들의 점선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을 수행할 물체, 실제적 행동을 완수하기 전에 이미 물질 위에 자신의 잠재적 행동들의 계획을 투사하는 물체, 즉 실재의 흐름flux de reel을 결정된 형태로 고정시키고, 그렇게 하여 다른 모든 물체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단지 감각 기관들을 그 흐름 위로 향하게 하기만 하면 되는 물체, 한 마디로 생명체les corps vivants는 다른 물체들과 같은 물체일까?(37) >개념
-과학은 반복된다고 간주되는 것, 즉 가정상 지속의 작용을 벗어나는 것 위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 한 역사의 잇따르는 순간들에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인 것은 과학에 의해 포착될 수 없다. 이러한 환원불가능하고 비가역성을 표상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근본적인 요구들에 부응하는 과학적 습관들과 결별해야 하며, 정신esprit을 위반하고 지성의 자연적 경향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철학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63)
-우리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유일한 문제는 생명체라 불리는 자연적 체계를 과학이 무기물질에서 절단해 내는 인공적 체계와 동일시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라리 그것을 우주 전체인 이 자연적 체계와 비교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명이 일종의 기계장치mecanisme라는 데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 전체 또는 실재 전체에서 인공적으로 고립될 수 있는 기계장치인가?(65)
-사실인즉 곡선이 직선들로 구성되지 않은 것처럼 생명도 물리화학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66)
-생명체에 지속의 흔적이 나타날수록 유기체는 단순한 기계장치mecanisme와 더욱 명백하게 구분된다. 기계장치에서 지속은 침투하지 않고 미끄러져 나간다.
-기계론적 설명은 우리의 사유가 전체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시키는 체계들에 대해 유용하다. 그러나 전체 그 자체와 이 전체 속에 그것의 이미지를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체계들을 기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시간은 무용하게 될 것이고 심지어 실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계적 설명의 본질은 사실상 미래와 과거를 현재의 함수로 계산할 수 있다고 간주하고,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74)
-지성은 흐르는 것을 혐오하고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고체화한다. 우리는 실재적 시간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생명은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화 그리고 순수 지속 속에 있는 모든 사물의 진화로부터 우리가 갖는 감정이 거기에 있어서, 이른바 지적 표상의 주위에, 밤 속으로 사라져가는 불분명한 가장자리를 그린다. 기계론과 목적론은 중심에서 빛나는 핵만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들은 이 핵이 그 나머지[가장자리]가 응축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것 그리고 생명의 내적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응축된 것[핵]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전체, 즉 유동체du fluide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87) >유사어로 '가장자리의 모호한 표상', '무용한 가장자리'
-우리가 지향하는 생명 철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 부조화discordance를 상당히 인정한다. ~ 이 에너지를 자신의 자신의 고유한 이익에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적응은 바로 그러한 과정 속에 존재한다. 이처럼 종과 개체는 각기 자신만을 생각한다.-생명의 다양한 형태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거기서 비롯한다. 따라서 조화는 사실적인 en fait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권리적으로 en droit 존재한다. 말하자면 원초적 약동은 공통의 약동이며, 위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다양한 경향들이 더욱더 상보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치 사거리에 불어닥친 바람이 분산된 기류로 나뉘어도 [여전히] 그 모두가 단 하나의 같은 바람인 것과 같다. 조화 또한 차라리 <상보성complementarite>은 거시적으로만 드러나며 상태들보다는 경향들 속에서 나타난다. ~ 생명에 인간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목적을 부여하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94)
-미래는 재현된 목적의 형태로 현재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일단 실현된 후에는 현재가 미래를 설명했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잘 현재를 설명할 것이다. 미래는, 그것이 결과로써 생각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의 목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지성은 미래를 자신의 습관적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고려할 권리가 있다. 지성 자체가 바로 미래를 도출한 원인 위에서 조작된 추상이기 때문이다.(97)
-그러나 유기체가 살아야 할 조건들에 대한 적응에 대해 말할 경우, 자신의 물질을 기다리는 형태가 어디서 미리 존재하고 있는가? 조건들은 생명이 삽입되고 자신의 형태를 받아들이게 되는 틀moule이 아니다. 그와 같이 추론할 때 사람들은 은유에 속게 된다. 형태는 아직 없으며 자신에게 만들어진 조건들에 적합한 형태를 창조하는 것은 생명의 몫이다. ~ 적응한다는 것은 여기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repliquer하는 것인데, 이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104)
<생명의 도약 Elan vital>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경과하는 생명의 근원적 약동 elan originel이라는 생각이다. 이 약동은 진화의 여러 노선들로 나뉘어 그 위에서 보존되면서 적어도 규칙적으로 유전되고 서로 첨가되어 신종을 창조하는 변이들의 심층적 원인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들이 공통의 뿌리에서 분기하기diverger 시작하면, 그러한 분기는 진화를 향해 전진하면서 가속화한다. 그러나 공통적 약동의 가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은 일정한 지점 위에서 동일하게 진화할 수 있고 심지어는 그럴 수밖에 없다.(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