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는 퀴어, 망명, 계급의 문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저자의 신체에 고스란히 그 흔적을 가지고 있다. 여성, 뇌병변 장애인, 다이크, 백인, 성폭력 생존자, 오리건 포트 오포드 출신의 망명자, 계급 노동자로서의 복잡한 '자기'를 스스로 이해하고 글로 옮기는 저자의 적확성과 그 과정에서 경험했을 고통을 표현한다. 이 책은 계급성이 단일한 명명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단일 쟁점 정치에 반대한다.
<장소>
-손상과 장애의 개념
-손상(impairment)과 장애(disability)를 구분하는 장애 모델을 생각했다. 장애 이론가 마이클 올리버(Michael Oliver)는 손상을 "사지의 일부분이나 전부가 없는, 혹은 사지나 신체 조직이나 구조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49)
-올리버는 장애를 "당대의 사회조직이 물리적[그리고/또는 인지적/지적] 손상이 있는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그들을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으로 정의한다. (50)
-장애와 손상을 깔끔하게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 ~ 첫 번째 실패는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한계에, 두 번째 실패는 신체적인 한계에 중심이 놓인다.(51) ~ 이 좌절에서 장애와 손상을 이론적으로 깔끔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실망이나 당혹감도 그렇다. 어느 괜찮은 날엔 '내 몸으로 향하는 분노'가 '바깥의 일상적인 망할 비장애 중심주의로 향하는 분노'를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분노를 후자의 분노로 바꿔서, 후자를 더욱 타오르게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하거나 깔끔하지 않다. 올리버의 장애 모델은 이론적.정치적으로는 타당하지만, 중요한 감정적 현실을 놓치고 있다. (52)
-퀴어 정체성은 최소한 내가 본 바로는 대체로 도시적이다. 신나는 곳, 이벤트, 대화, 강력한 공동체, 저널, 잡지, 서점, 퀴어 조직, 퀴어운동 모두가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시골에도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퀴어 정체성과 문화를 정의하는 사람과 기관들은 도시적이다. (100)
-만약 우리가 시골 조직화에 몰두하여 퀴어 공동체를 실제로 설립하고 퀴어 정체성을 육성하기를 원한다면, 시골의 가난한 노동계급 퀴어들이 이끄는 쪽으로 따랐으면 좋겠다. 나는 도시의 활동가들이 뒤로 물러 앉아서 시골의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 바이섹슈얼이 자신의 공동체를 만들고 강화하도록 지원해줬으면 한다. 이는 도시의 중산층 퀴어들에겐 쉬운 일일 것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퀴어들이 시골 이성애자들과, 도시 사람들이 레드넥, 촌놈, 얼간이, 광신자라 부르는 바로 그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동맹들을 세우고 지원하는 일은 여러 종류의 많은 조직화 활동이 수반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선 무엇보다도 경제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 이는 퀴어 활동가들이 대체로 무시해왔던 쟁점들 - 실업, 부족한 음식과 주거, 비싸고 접근성 낮은 보건 의료와 교육 등의 문제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뜻한다. (106)
<몸>
-'불구자(cripple)'처럼 '퀴어(queer)'는 내가 나 자신과 내 공동체들에 속한 다른 이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러니하면서도 진지한 단어이다. '퀴어'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다이크로서 내 삶에 대해, 내가 지배 문화와 맺는 관계에 대해 많은 걸 알려준다. ~ 나는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저항적인 날카로움과 편안한 내적 진실을 몹시 좋아한다. '퀴어'는 내게 속한다. '불구자' 역시 여러 동일한 이유로 내게 속해있다. '퀴어'와 '불구자'는 사촌관계다. 충격을 주는 단어, 자긍심과 자기에를 불어넣는 단어, 내면화된 혐오에 저항하는 단어, 정치를 구축하도록 돕는 단어. 많은 게이, 레즈비언, 바이, 트랜스가 퀴어란 단어를, 많은 장애인이 '불구자' 혹은 '불구(cripple or crip)'란 단어를 기꺼이 선택했다. '프릭(frick)'은 얘기가 다르다. '퀴어'나 '불구자'와는 달리, 내가 속한 공동체들에서 그 단어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프릭의 날카로움에 상처받고 겁이 난다. (157) '퀴어'와 '불구자'는 나의 언어지만, '프릭'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
-프릭 쇼는 뿌리 깊은 문화적 믿음뿐만 아니라, 퍼포먼스와 날조까지 활용하면서 공들여 계산하여 만들어낸 사회적 구성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 구성물의 중심에는 흥행사가 있다. 흥행사는 맞춤 제작, 상연, 정교하게 지어낸 과거사, 마케팅, 안무를 활용하여 특정 사람들을 프릭으로 바꾸어 버렸다.(159)
-문화비평가이자 장애이론가인 로즈메리 갈런드-톰슨은 때로는 겹쳐지는 이들 집단 간의 차이가 모조리 뒤섞였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프릭 쇼의 가장 두드러진 효과는 매우 다양한 몸들 사이의 뚜렷한 차이를 삭제하여, 타자로서의 프릭이라는 단 하나의 기호 아래 그들을 융합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략) 다르게 보이거나 지배 질서에 위협적이라고 간주된 모든 신체적 특징은 프릭 쇼 무대에서 신체적 차이를 잡다하게 마구 섞어놓은 일종의 합창이 되었다."(160)
-(프릭 쇼에는) 프릭을 얼빠진 듯 쳐다보고 싶어 한 시골뜨기들의 열망, 그리고 비장애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활용됐다. 비장애 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백인 장애인, 유색인 장애인, 유색인 비장애인이 프릭으로 이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한 쌍의 억압적 이데올로기가 없었다면, 모든 장애인과 모든 유색인에게 따라붙는 혐오와 공포, 그리고 자신의 정상성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로서의 타자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그 누가 윌리엄 존슨이 다윈의 잃어버린 고리이고, 바니 데이비스가 보르네오에서 온 야만인이며, 앤 톰슨이 팔 없는 불가사의라는 걸 단 한 순간에라도 믿을 수 있었겠는가? (164)
-여러모로 프릭으로 일하기는 성매매 종사자로 일하기와 비슷했다. 문화 노동자이자 노동계급 학자인 조애나 카디(Joanna Kadi)는 이렇게 쓴다. "좌파 노동계급 분석은 ... 성매매를 자본주의 맥락 안에 놓는다. 생존한 여성들을 찬미하고, 이해하려 하진 않으면서 비난하는 중산층의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조롱하고, 여성들의 이야기와 관점을 중게한다." 이와 동일한 이론적.정치적 인식틀로 프릭이란 직업을 검토해볼 수 있다.(170)
- 돌봄이 필요하지만 가족이 돌봐줄 수 없는 처지의 노동계급 및 빈곤층 장애인들에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빈민구호소, 길거리, 프릭 쇼. 나는 프릭 쇼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훈계나 비난을 하기보다는, 인종차별주의자와 비장애 중심주의와 계급주의를 포함한 전체 맥락을 검토하기를, 그리고 착취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를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하기를 바란다. 조애나 카디가 성매매를 분석하면서 언급한 여성들처럼, 프릭으로 일했던 사람들, 특히 본인을 전시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 통제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은 착취적인 세계에서 착취적 상황을 움켜쥔 것이었고, 그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취했다. (172)
-프릭 쇼의 종식은 장애를 전시하는 우리의 행태나 관음증이 종식되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프릭을 범주화하던 한 인식틀이 또 다른 인식틀로 바뀐 것뿐이다. (186)
-1990년 제정된 미국 장애인차별금지법(Americans with Disabilities Act, ADA)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다. ~ 요컨대 장애 인권 운동은 여성해방과 게이/레즈비언 해방과 같은 사회적 격변에 기반을 두고 생겨나, 흑인 시민권 운동이 만들어낸 활동력과 인식틀에 힘입어 전진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내면화된 억압을 해체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독자적 문화와 정체성 감각을 발전시키고, 현재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활동을 조직하고 있다. (191)
<자긍심>
-자긍심은 내면화된 억압에 직접적으로 맞선다. 내면화된 억압은 수치심, 부정, 자기혐오, 두려움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자긍심은 분노, 힘, 기쁨을 북돋는다. 자기혐오를 자긍심으로 바꾸는 일은 근본적인 저항 행위다. 많은 공동체에서 언어는 이러한 변환을 위한 무대 중 하나가 된다. 때로 혐오와 폭력의 말은 중화되거나, 심지어 자긍심의 말로 변환될 수 있다. ~ "그래, 네 말이 맞아. 나 퀴어야. 나 불구야.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죽길 원하는 자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행동이다. (196)
-1970년대 중반 이래 LGBT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서로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확인시키는 상징으로 분홍색 삼각형을 사용해왔다. 원래 나치는 이 상징을 홀로코스트 동안 거리와 강제수용소에서 비유대계 게이 남성을 표시하는 데 사용했다. ~ 분홍 삼각형은 이제 퀴어 공동체에서 정체성, 증언, 자긍심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 분홍 삼각형은 내부자의 언어로 기능하는데, 이는 억압자는 배제하면서 주변화된 사람들은 포함하려는 언어이다. 분홍 삼각형은 또한 정체성에 대해 더 공공연히 말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 증언의 상징으로 분홍 삼각형은 홀로코스트로 죽어간 게이 남성들을 기억하고 기린다. 분홍 삼각형은 나치의 잔학한 행위에 대한 기억을 우리가 계속 의식하게 한다. 분홍 삼각형은 퀴어 억압의 극한을 상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자긍심의 상징으로서 분홍 삼각형은 '퀴어'나 '불구자'란 단어들과 유사한 정치적 경로를 따라서 증오를 중화시키고 변환시킨다. (205)
<장애의 무성성과 성애화의 양가감정>
-키 크고 날씬하고 이성애자고 모델 산업에서 미를 규정하는 방식대로 아름답고 하반신마비가 있는 엘런 스톨은 이런 더 큰 이야기를 풀어가기 좋은 초점을 제공한다. 1987년 <플레이보이>에 엘런의 화보가 실린 사건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략) 글에는 엘런이 장애를 "극복한" 수많은 방법이 강조되어 있는 반면, 잡지 한 면을 가득 채운 그녀의 소프트 포르노 사진들에는 장애를 드러내는 시각적 단서가 담겨 있지 않다. 이런 사진에서 그녀의 휠체어는 시야 밖에 있다. 사진이 보여주는 엘런은 가슴을 다 드러낸 반나체에 레이스 옷을 입고 진주 목걸이를 걸고 침대에 누워 다리는 이불로 덮어 가린 모습이다. (214-215)
-일부 장애 활동가들은 분노했다 엘런이 특집 기사의 가장 성애화된 부분에서는 비장애인처럼 보였고, 이 이미지는 오직 비장애 여성만이 성적인 존재라는 쓰디쓴 편견을 강화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장애 활동가들은 장애가 최종적으로 표현된 모양새나 아예 장애가 재현되지 않은 점은 유감이지만, 장애 여성이 드디어 성적인 존재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엘런의 화보에 찬성하고 안도하고 기뻐했다. (216)
-'맨캡'은 "정신적인 핸디캡은 평생 남는다. 맨캡도 그렇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장애 자선단체의 진정한 전통을 따른다. 즉 구세주인 척, 빛나는 갑옷을 입은 백기사인 척 구는 것이다. 이 자선단체들은 먼저 어린애 같은 장애인의 이미지를 창조해서 팔아먹고는, 그다음 용맹스럽게 우리를 구출하러 온다. 조금 다른 환경이 주어졌다면, 엘런 스톨되 최소한의 성적인 암시도 없이 수동적이고 서투른 아이처럼 사진에 찍혀, 맨캡 포스터에 나오는 나이 든 여자처럼 될 수 있었다. 그 대신에 그녀는 온전한 성인으로서, 다른 카메라 앞에서 노골적으로 성적인 포즈를 취한다. (223)
-성적 대상화는 섹슈얼리티와 완전히 얽혀 있다. 우리의 성적 욕망은 어떻게 표현되고 재현되는가? 원하는 성적 응시와 원하지 않는 성적 응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언제 그 응시는 누차 모욕과 굴욕감을 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섹슈얼리티를규정하는가? 그리고 언제 그 응시는 우리가 자신을 성적인 존재로 창조하도록 도와주는가? 이러한 질문은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것, 스스로 섹슈얼리티를 정의하고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 둘의 교차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228)
-내가 살고 싶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원치 않는 성적인 응시에 시달리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자신을 성적인 주체로, 성적인 객체로, 성적인 존재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서로의 섹슈얼리티를 인정하는 수백만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중 어느 것도 억압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세상에서 성적 대상화는 아무리 해롭더라도 섹슈얼리티의 강력한 표지다. 따라서 그것의 부재 역시 강렬하다. (232)
▶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엘런의 사진을 급격히 칭찬한다거나 긍정하거나, 미화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와 관련된 논의와 토론이 시작되는 것을 환영하는 것에 가깝다. 장애를 자본주의 사회, 비장애중심적 사회에 편입시킴으로써 공동체에 포함되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다. 그리고 비장애인의 시선을 전유, 주도적으로 쟁취하여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미셸 드 세르토의 이론이 맞닿을 수있는 모양이다.
-현재 장애인과 우리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미지가 결여되어 있는 그 뒤엔, 우리의 현실적인, 실질적인, 제도화된 무성애가 있다. 장애인 성인을 영원한 아동기로 밀어내는 바로 그 힘이 우리를 무성적인 존재로 형성한다. (241)
*각주) '패싱(passing)'은 '커밍아웃'과 더불어 성소수자 정치에서 나온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들은 인종과 장애 관련 소수자 정치에서도 사용되어왔다. 초창기 논의에서 '커밍아웃'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행위인 반면, '패싱'은 그저 사회적 소수자에게 부과되는 낙인을 피하고 다수자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다수자인 척하는 짓이나, 이성애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백인 중심주의, 비장애 중심주의 등 지배 이데올로기에 물든 허위의식의 소산으로 여겨졌다. ~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담론은 커밍아웃과 패싱의 복잡한 역동에 주목한다. 커밍아웃이 결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 내가 커밍아웃한 소수자라 할지라도 매일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커밍아웃하지 않는 이상 '패스'되는 순간은 온다는 점, 특히 비가시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의 경우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커밍아웃한 남들 눈에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으면 그 정체성 선언 자체를 의심받고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받는다는 점, 패싱이 반드시 억압적 체계에 공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대적 환경에 고립되어 있는 소수자에게는 생존을 위한 잠정적 선택일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젠더 이분법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서 여러 이유로 남자처럼 입고 행동하며 다른 이들의 눈에 남자로 여겨졌던 여성들이 있었다는 점 등이 논의되어 왔다. ~ 전쟁과 군사 동원의 역사, 남성 말고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역사는 수많은 패싱 여성들을 탄생시켰다. 나아가 이 경우에 패싱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위치 말고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식도 그들을 설명할 이름도 없던 시대에, 그 경계적 존재들이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지정되고 강요되는 성별 위치를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고 표현하는 방법으로서, 이분법을 교란시키는 정치적이고 인식론적인 실천으로도 평가받을 수 있다.(269-270)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정체성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몸의 그 어떤 측면에 대해서든, 글을 쓴다는 것은 이런 미로전체에 대해 쓴다는 뜻이다. (248)
<번역 관련 옮긴이 후기>
-'크립'은 '절름발이'나 '불구자'란 뜻으로 쓰이던 'cripple'에서 파생된 용어로, 우리말의 뉘앙스를 살리자면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불구'나 '병신'에 가깝다. '퀴어'라는 용어가 규범적인 젠더 내지 섹슈얼리티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욕이었다가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그래 나 퀴어다, 어쩔래!"하고 맞서면서 자긍심의 용어로 재전유된 것처럼, '크립이란 용어 또한 1980년대부터 장애인 하위문화에서 당사자 용어로 활발하게 재전유되기 시작했다.(300-301)
-처음에 역자들은 한국에서 음역이 널리 쓰이고 있는 '퀴어'처럼 'crip'도 '크립'처럼 음역할지를 고민했다. 한국에서는 장애인과 성소수자를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비하와 경멸의 용어가 자긍심의 용어로 변환된 경우가 없다시피 하기에, 아직 당사자 공동체의 담론이 형성되지 않은 멸칭을 번역어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 여겼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 역자들이 이 책을 오래 붙들고 있는 동안, 이 '크립'의 의미와 정치적 취지를 담아 한국에서 '불구'라는 표현이 막 사용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018년 초 한국의 장애 여성 인권 운동단체 '장애여성공감'은 단체 20주년을 맞아 "시대와 불화하는 불구의 정치"라는 슬로건을 내건 바 있다." 따라서 이 한글판에서는 장점적으로 'crip'을 '불구'라 번역했다. 또한 문맥에 따라 'crip'의 양가적 의미의 역사를 다 담아낼 필요가 없거나 담아내기 어려운 경우에는 드물게 '장애인'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302)
-'gawk'도 번역이 까다로운 용어였다. 영한사전에서는 "얼빠진 듯 (멍하니) 바라보다"로 번역되지만, 영여앗전에서 이 용어는 "To gawk at something means to stare at them in a rude, stupid, or unthinking way," 즉 '무례하고 멍청하게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상대를 쳐다보는 행위'로 정의된다. ~ 한국에 사는 여자들 대부분은 이게 어떤 시선인지 알 것이다. 길거리에서 마주 오는 남자가 끝까지 눈 돌리지 않고 내 얼굴과 몸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쳐다보고 평가함 지나가는 그 시선은 여자들에게는 징그러울 만치 일상적인 경험이다. ~ 'gawk'은 좀 더 미묘하고 무의식적인 차원 -스스로 '정상적인 주체'라 믿는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비정상적인 타자'를 발견했을 때의 놀람과 불쾌감-까지 포괄한다. 클레어는 'gawking', 'gaping', 'staring'을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쓰기보다는 장애인을 인간보다 못한 것으로 정의하는 시선폭력의 특징을 묘사하는 말로 섞어쓴다. 더욱이 이 책에서 클레어는 일반적으로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 프릭 쇼 무대에 올라간 장애인을 바라보던 비장애인 구경꾼들의 시선, 백인이 유색인을 타자화하는 시선뿐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가 그런 시선을 맞받아치는 시선을 표현할 때도 'gawk'를 사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번역어를 통일하는 대신 문맥을 살려 '얼빠진 듯 보다', '구경하다', '빤히 쳐다보다' 등 조금씩 번역을 달리했다. (306)
-'여자 같지 않은 여자'를 가리키는 '다이크dyke', '부치 다이크butch dyke', '톰보이tomboy' 같은 이름들은 섹슈얼리티의 위반이 젠더 위반과 깔끔하게 구분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다이크'는 여성의 남성성을 가리키는 속어로, 동성애 혐오적이고 남성 우월주의적 사회에서 여성을 모욕하기 위한 욕으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 당사자의 언어로 되찾은 이름이다. 이런 변화는 부치에 대한 이해 변화와 맞물려 있다. 1970~1980년대에는 남성 우월주의와 이성애 중심주의에 찌든 사회는 물론 이에 대항해 대안적인 여성성을 발굴하려던 제2물결 페미니즘에서도 부치/펨 스타일(특히 남성적 젠더 표현을 하는 부치)을 배척했으며,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다이크는 욕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이런 배척에 맞서 특히 1980년대 레즈비언들이 스스로 '다이크'라 칭하기 시작했고, 특시 1990년대 이르러 여성의 남성성과 젠더 수행에 관한 연구들이 나오고 공동체 문화에서 다이크란 표현히 활발히 쓰이게 되었다. 이 용어는 여성을 사랑하지만 사회에서 이해되고 훈육되는 여성성과 자신을 도무지 연결시키기 어려워하는 부치 여성들과 ftm 트랜스젠더에게는 일반적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으로 정의되는 '레즈비언' 대신 자신을 좀 더 편하게 담아내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진다. (310)
<참고할 자료>
-수잰 파(Suzanne Pharr), <시골조직 : 차이를 가로질러 공동체를 건설하기>
-앨리슨 케이퍼, 전혜은 옮김, <욕망과 혐오 : 추종주의 안에서 내가 겪은 양가적 모험>, 여성이론, 39호(2018), pp.48-86. (퀴어 페미니즘 장애학자)
-로즈 메리 갈런드-톰슨, <보통이 아닌 몸>, 그린비, 2015.
- Coco Fusco and Paula Heredia, <The Couple in the Cage>, 1995.
- 희곡 <신체적 핸디캡 프릭 : 장애인들의 숨겨진 역사>
-일라이 클레어, <눈부시게 멋진 불완전함 : 치료와 씨름하다>
-일라이 클레어, <골수의 이야기 : 움직임 속의 말> (시집)
-주디스 핼버스탬, 유강은 옮김, <여성의 남성성>, 이매진,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