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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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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 불의가 추상적으로 상정되는 상황 속에서 개개인이 져야 할 구체적 책임은 모호해진다. ~ 자신이 보편적 불의의 희생자인 양 자신의 책임을 전가한다. 이전투구 판에서 각별한 선인이라고 부각된 사람은 대개 이러한 '맑음'을 가불해서 쓰고 있는 사람들이다. 악하지 않은 인간이란 무균질 인간의 삶이 아니라 각별한 수치심을 가지고 안절부절못하면서 곤궁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41) 


* 소외는 바로 사람들 간의 거리가 소멸되는 데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주고받고, 토론하고 그 결과를 실행하고, 통제하고 그 통제의 틀 안에서 역할을 행하고 하는, 즉 몸과 몸이 부딪치는 관계 속에서만 서로를 함께 묶는 정교한 그물망을 위한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며 한 인간에게 있어 그러한 바깥이 있을 때에만 안도 여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 대화는 그 대신 본래의 대상 주위를 나선형 모양으로 맴돌 수밖에 없다. (63) 


* 물물교환은 허용되지 않는다. (선물, 기부행위의 비판) (64) 


* 영화 줄거리가 보통 그렇듯 남자들이란 본래의 체질상 마조히스트일지 모른다. 거짓은 그들의 사디즘 안에 숨어 있는데 강한 척하는 위선 속에서 그들은 정말 사디스트가, 억압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허위는 억압된 동성연애가 유일하게 인정된 이성 간의 성생활로 나타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옥스퍼드에서는 학생들을 두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하나는 터프 가이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인 타입이다. 후자는 이러한 대립 설정에 의해 곧바로 여성화한 남자와 동일시된다. 여러 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재로 나가는 도정 위에서 지배 계층이 이러한 양 극단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 결국 터프가이들이야말로 여성화한 자들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연약한 자들과 같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제물로 연약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총체성과 동성연애는 한 통속이다. 주체가 파멸하면서 주체는 자신과 같지 않은 모든 것을 부정한다.(69)


* 공습을 전하는 뉴스에서는 비행기를 생산한 회사들의 이름이 빠지는 적이 거의 없다. 이런 회사의 이름들, 포케-불프, 하인켈, 랑카스터는 저 옛날 갑옷 기병, 창기병, 경기병이 언급되던 자리에 나타난다. 삶의 재생산, 삶의 지배, 삶의 파괴라는 메커니즘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며 그에 따라 산업, 국가, 선전은 합병된다. 회의적인 자유주의자의 해묵은 과장, 즉 전쟁은 사업이라는 주장은 실현되었다. 


* 흄은 나름대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아가 스스로 자아라고 설정한 것은 실제로는 단순한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며 추상적인 지배의 중심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실체화한 것으로서 이러한 정황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개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는 해체되고 남은 잔재를 더욱 손쉽게 지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92) 


* 삶이 한눈을 팔지 않고 규정된 대로 살게 된다면 그러한 삶은 오히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규정에 어긋날 것이다. 늙어서 나무랄 데 없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식으로 죽는 사람은 어깨에 보이지 않는 배낭을 메고 매 단계를 오점 없이 끝마친 모범생과 같을 것이다. 그렇지만 게으르지 않은 사유에는 어디나 완전한 정당성은 불가능하다는 의식이 낙인처럼 찍혀있다.(114) 


* 우리는 직장에서 매일매일 수행되는 여성의 초라한 일과나, 폐쇄적 가사노동에 의존하는 노동 조건이 산업사회에서도 어처구니없이 존속되고 있는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여성 자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성들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기꺼이 '지배'를 재투영해내면서 '지배'와 자신들을 동일화한다. 여성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남성 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원리를 여성에까지 확장시켰으며, 그에 따라 희생자들은 질문 자체를 더 이상 질문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의 재화가 여성들에게 허락되자 여성들은 자신의 운명을 감격하여 받아들이며 '사유'는 남성들에게 맡기고는, '문화산업'이 선전하는 여성상을 혐오하는 어떤 '반성'에 대해서도 분개하면서 스스로는 자신의 성(性)을 실현한 것으로 여기는 '부자유' 속에서 흡족해하고 있다. ~ 입센의 시대에도 이미 시민적으로 한자리를 차지한 여자들은 대체로, 사방으로 둘러쳐진 벽에 자신들을 가두는 사회라는 감옥을 깨고 나오려는 무망한 노력을 나름대로 해보려는 히스테릭한 자매들을 매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손녀들은 그런 문제가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그런 히스테리를 너그럽게 웃어넘기고는 사회보장의 친절한 돌봄에 자신을 의탁할지도 모른다. (127) 


* 여성적 성격이나 이의 모델이 되는 이상적 여성상은 남성적인 사회의 산물이다. 왜곡이 없다면 왜곡되지 않은 자연이라는 이미지도 없다. 후자는 전자로부터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이 곧 인간적이라고 내세우지만 실상은 위에서 군림하는 남성 사회가 여성들을 통해 자신의 교정역을 육성하는 것이며 그러한 교정역의 한계를 통해 자신이 단호한 주인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여성적 성격은 '지배'의 음화이다. 그 때문에 똑같은 정도로 나쁜 것이다. 시민적인 현혹연관(Verblendungszusammenhang)에서 자연이라 불리는 것은 불구화된 사회의 상흔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은 자신의 신체구조를 거세의 결과로 여긴다는 정신분석학의 명제가 맞다면, 여성은 자신의 노이로제 상태 속에서 진리를 예감할지 모른다. (131)

* 참고 적응하는 곳에 자연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짓이며, 오히려 인간의 문명에서 자연이라고 통용되는 것의 실체는 자연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 스스로 객체가 되는 순수한 과정이다. 본능에 의거한다는 모든 종류의 여성성은 실상 모든 여성이 온갖 폭력-남성적인 폭력-으로써 스스로에게 강요해야만 하는 그것이다. (131) 

* 자연의 해방이란 인간 스스로가 설정한 자연관념을 폐기하는 것이리라. 여성적 성격을 찬미하는 것은 그러한 성격을 지닌 사람 모두에게 굴욕을 가하는 것이다. (132) 

* 현혹(Verblendug)은 어둠 속에서 밝은 곳으로 나갈 때 일어나는 일시적 장님 상태를 일컫는다. 아도르노에게서 절대적 부정성을 표상하는 '사회'는 진리에 대한 인식이나 진실된 삶을 차단하는 현혹연관, 총체화된 기만연관, 지배연관, 죄의 연관으로 설정된다. '사회'의 대항 관념인 '자연'은 변증법적 사고방식에 걸맞게 독립적 실체로서보다는 이러한 '사회'에 대한 '타자'로서 구상된다. (131) 


*  문어체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자들의 은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반동적이다. ~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배고픔에 의해 씌어진다. 가난한 자는 자신의 공복을 채우기 위해 언어를 씹어 먹는다. 그는 사회가 거부하는 강력한 자양분을 언어의 객관적 힘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깨물어 먹을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입을 언어로 가득 채운다. 그런 식으로 그는 언어에 복수를 하는 것이다. ~ 문어가 계급의 소외를 기호화한다면 그러한 소외는 구어로 돌아감으로써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객관성을 그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물고늘어질 때 극복할 수 있다. 문제를 자신의 내부에서 지양하는 말하기야말로 인간의 말을, '말은 이미 인간적이다'라는 허위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140) 


* 흑인에게 그는 백인과 동일하다고 납득시키려 드는 것은 - 사실은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 그 자체로 이미 흑인에게 다시 한 번 은근히 불의를 가하는 것이다. 흑인은, 체계의 압력 아래서는 자신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또한 충족시키기에는 현실성이 없다고 의심되는 기준을 적용받음으로써 친절한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통일 지향적인 관용의 옹호자는 항상 순응하지 않는 집단에 대해서는 비관용적이 될 경향이 짙다. 유대인의 무례에 대한 분개는 흑인의 평등에 대한 비타협적 열광과 잘 조응한다. 모든 것을 녹여 뒤섞는 용광로는 고삐 풀린 산업자본주의의 장치였다. 이 용광로 안에 뛰어들려는 사유는 민주주의가 아닌 고문사를 주문으로 외우고 있는 것이다. (141) : 동화주의가 억압과 차별의 또 다른 얼굴임을 언급함. 내재된 억압.

*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의 닮은꼴이라는 관념의 패러디이다. '병적 투사'의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는 원리는 칼을 쥔 자들이 인간을 자신의 닮은꼴로만 생각한다는 것-인간이란 얼마나 다양한가 하는 것을 자신 속에서 투영시키기보다-이다. ~ 인간인 것은 사물이 되어버리며, 그처럼 돌이 된 인간은 어떤 자극으로도 광기어린 시선을 거역할 수 없게 된다. (144) 

* 투사(投射, Projektion)  또는 잘못된 투사는 미메시스와 반대되는 것으로서 미메시스가 주변 세계에 유사해지려고 한다면 잘못된 투사는 주변세계를 자신과 유사하게 만들려고 한다. 투사를 통해 주체는 자신에게 부과된 고통을 객체의 탓으로 돌리고 외부에서 제물을 구하려 한다. <<계몽의 변증법>>, <반유대주의적 요소들-계몽의 한계> 제6장은 '투사'관념에 의거한 반유대주의를 자세히 설명한다. (144)  


* 계몽된 사회에서 모든 공포는 공포 동화(童話)가 된다. 왜냐하면 '진실은 진실이 아닐 거야'라는 무의식이 학수고대하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공포가 출연하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파시즘은 실제로, 다른 곳에서는 숨겨져 있는 지배의 원리를 공공연히 선포한다는 점에서 덜 '이데올로기적'이다. 민주주의자들이 휴머니즘적 가치로 파시즘에 대항하려 든다면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이 용감하게 내팽개친 것이란 진정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그것의 기만된 모습일 따름이라고 장난스럽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라 문화를 믿는 사람들은 점점 더 절망적이 되었다. (148) 


* 노동운동의 몰락에 일조하는 것은 그 신봉자들의 공식적 낙관주의이다. ~ 사회의 운명이 실제로 바뀌리라는 합리적 기대가 점점 더 멀리 사라지면서 점점 더 큰 경외심을 가지고 그들은 낡은 기도문, 즉 대중, 연대, 당, 계급투쟁 같은 것을 반복해서 외쳐댄다. 정치경제 비판에 나오지 않는 사상은 그 어떤 것도 좌파 신봉자들에게 확실한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그동안 노선에 충실한 사람들의 귀는 이론을 내팽개친 슬로건들을 비판하는 소리에는 아무리 작아도 아주 예민하게 반응한다. (154-155) 


* <제국주의 속성에 대한 비유 - 동물원/화해와 동화라는 위선> 

 동물원은, 종 전체에 덮친 불행을 그 종을 대표하는 한 마리나 한 쌍이 이겨냈다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 철창 안의 동물은 자유로운 곳에 사는 동물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 이로써 하겐백은 휴머니즘의 진보가 무엇인가를 서술하고 있다는 것은 감옥의 불가피성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해준다. 감옥의 불가피성은 역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동물원의 본모습은 19세기 식민제국주의의 산물이다. ~ 자연을 향해 창문을 여는 문화의 합리화는 자연을 완전히 빨아들려서는 '차이'와 함께 '화해의 가능성'이라는 문화의 원리를 제거해버린다.(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