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히스테리적 육체, 몸으로 글쓰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한 히스테리 분석
p.96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분열'과 그 분열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적 욕망'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여자들'이 히스테리 여성들. ~ 이들은 가부장적 현실을 초월한 혁명적 여성 주체들이 아니다. 이들은 가부장적 현실 속에 들어가 아버지가 정해준 법을 따르면서도 법의 균열을 통해 완전히 삭제되지 않은 자신들의 욕망을 병리적 증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여자들이다. '몸의 증상'으로 드러나는 여성들의 욕망은 의식의 통제 너머에 있다. 그것은 '내 속에 내가 어쩔 수 없는 이방인'으로 들어와 있는 '무의식적 감정'이다. 히스토리를 거론한다는 것은 바로 이 '여성적 무의식'이라는 논의의 지평을 열어 '여성 주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다.
▶저자가 '성차'를 끌어오는 방식. '내'가 어쩔 수 없는 내 안의 '여성적 무의식'을 고찰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주체'를 탐구하는 것.
p.95-96
1990년대 여성주의 운동에서 여성의 욕망과 성이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긴 했지만, 이런 욕망의 정치학도 여성 개개인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에 충분히 주목한 것 같지는 않다. 설령 무의식을 고려하는 경우에도 개인을 호명하여 특정한 '정체성identity'를 부여해주는 이데올로기적 '구성' 기제로서만 논의되었을 뿐, 이러한 구성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넘어서는 '주체'의 측면은 간과되어왔다. 현대의 다양한 '담론 구성주의'의 흐름 속에서 담론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부분, 혹은 담론적 구성에 저항하는 부분은 가려져온 것이다. 하지만 히스테리를 겪는 여성들이 온몸으로 제기하는 문제는 담론적 구성을 넘어서는 '무의식적 주체'의 반란이다. 이들은 가부장적 상징 담론이 가하는 억압에 맞서 '자신도 모르게' 주체적 반란의 몸짓을 감행해왔다. ~ 이 글이 히스테리에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실천의 포기가 아니라 개인의 무의식적 선택을 통과한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무의식'인데 어떻게 '주체'를 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되는 단락. 구성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로서 주체적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 다시 말하면 무의식적 행위, 병리적 현상이 실재로 사회문화적 타격을 입힘으로써 발휘되는 효과가 주체의 '무의식적 의도'가 될 수 있다는 것. 뭐.. 어떻게 보면 새로운 이야기는 아님. 정신분석학의 의의에 해당하는 이야기.
p.99-100
근대 정신의학의 대두와 더불어 히스테리는 그 병인으로 간주되던 생물학적.주술적 요인들에서 벗어나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 이제 이들 정신의학 담론에서 히스테리는 육체적 질병이 아닌 여성들의 과도한 지적 활동에서 기인하는 병으로 해석되는데, 이런 담론화가 도달한 필연적 귀결은 사회적.지적 활동을 중지시켜 가정과 모성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그녀들을 복귀시키는 것이다.~ 가부장적 담론은 성역할 구분에 혼란을 초래하는 이 신여성들의 대두에 맞서 전통적인 여성다움과 모성을 발명하는 한편, 바로 그 담론적 발명품을 통해 여성의 지적활동을 억압.통제하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런 전략에 의해 병리화된 존재가 히스테리 여성이다. 이런 여성의 통제와 함께 히스테리 남성도 정신의학의 권력 그물망에 걸리게 된다.
p.101
정신분석학은 이 분열된 인간들을 문화라는 정상적 규범 속으로 순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병리적 증상을 통해 문화적 질서의 억압성을 드러내고 인간과 문화가 '덜 억압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이르러 히스테리의 육체는 성적 존재로서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는 텍스트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p.109
폭력이라는 명백히 끔찍한 외상적 사건에 대한 기억과 그것의 육체적 전환이 여성의 욕망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앞서 거론한 히스테리 증상에 대한 두 정의는어떻게 연결되는가? ~ 외상이란 주체를 감싸고 있는 심리적 보호막이 강력한 충격에 의해 붕괴되는 것을 말한다. 외상을 가리키는 영어 단어 '트라우마trauma'의 그리스어 어원은 '상처wound'라는 뜻으로, 말하자면 외상은 심리에서 난 상처이자 심리적 보호막에 뚫린 구멍이다. 문제는 심리적 상처를 가져오는 이 충격이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온다는 점이다. 강간, 추행, 전쟁 같은 실제 사건은 외적 충격이지만 우리가 앞서 죽음충동이라 부른 섹슈얼리티는 의식의 방어막을 위협하는 내적 충격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을 압도할 정도로 위협적인 자극이나 흥분으로 충동을 정의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충동은 그 자체가 잠재적으로 외상의 요인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심리장치가 적절히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분출되어 나오는 충동을 "내적 외상" 혹은 "구조적 외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히스테리 증상은 외적 외상에 내적 외성이 겹쳐짐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폭력으로 여성은 어떠한 피해를 겪게 되는가. 신체적 폭력이 어떻게 정신적 폭력으로 이어지는가. 그것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프로이트적 설명.
p. 121
히스테리 증상으로 현시되는 억압된 욕망은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가 호명하는 '정상적 여자'로 정착하기를 거부한다는 육체적 증거다. 하지만 이 저항은 동시에 당사자 자신에게 육체적 마비를 가져오는 병적인 것이기도 하다. 히스테리 여성 환자들의 저항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녀들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체 자신을 마모시키는 이 저항을 생산적 힘으로 전화시키려면 히스테리적 저항의 방식도 바뀔 필요가 있다.
▶소설이나 영화 텍스트에서 히스테리컬한 여성이 주체가 되는 이유. 일종의 저항 텍스트로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
p.122
줄리엣 미첼에 의하면 히스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히스테리 현상을 기술하는 의학적 사유 체계와 명명법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한다. 과거 히스테리라는 통칭으로 불렸던 현상이 경계성 질병borderline disease, 외상 후 스트레스성 증후군Post Traumatic Stress Syndrome, 히스테리성 인격장애 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 식이장애 등으로 세분화된 것일 뿐 현상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미첼은 정신분석학이 개발한 '대화 치료'와 더불어 히스테리가 선택하는 '표현 매체'에도 변화가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이제 여성들은 '몸의 증상'보다는 '말'을 통해 자신들의 억눌린 욕망을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증상적 문장들'
p.125
히스테리에 걸려 남성적 의학 권력의 혹독한 감시와 훈육의 대상이 되었다가 후일 여성운동가로 거듭난 살럿 퍼킨 길먼의 <누런 벽지>는 히스테리적 글쓰기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작중 여주인공은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의사인 남편은 치료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한적한 시골 요양원에 가두고 어떤 정신적 활동도 하지 못하게 한다. ~ 푸코의 지적처럼 그것은 근대 의학 담론이 여성의 몸에 가하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 행위, 공적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여성들을 사적 영역에 가두고 출산과 양육을 통한 안정적 노동력 공급원으로만 여성의 몸을 묶어두려는 지배 담론의 의학 버전이다.
<제4장. 포르노 트러블>
p.135-136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성 자유주의 담론은 남성의 무제한적 성적 자유를 위한 전제이자 알리바이로 여성의 성해방을 거론한 측면이 다분하다. 금기를 말하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도처에 성이 넘쳐나고 '즐기라'는 명령이 또다른 형태의 외설적 억압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성을 말한다는 것은 더이상 금기를 깨는 위반도 해방도 아니다. ~ 정치적 혁명성이 거세되고 쾌락에 대한 도착적 집착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어떤 성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고려 없이 성의 자유 그 자체를 절대화할 수는 없다. ~ '당신은 당신의 성적 자유에 책임을 지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즐긴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생략할 때, 주체의 (자유주의적) 권리의 정치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가해자의 폭력과 피해자의 권리가 충돌하고 국가가 개인의 권리에 개입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식의 자유주의적 틀 속에 갇히게 된다.
p.139
행동주의 이론에서 전제하듯 인간의 행위는 외부 환경이나 자극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 아니다. 인간의 행위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면서 주체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을 포함한다. 우리는 인간에게 주체적 선택의 몫을 남겨두면서도 사회문화적 재현 체계가 주체의 행위에 미치는 구성적 효과를 인정해야 한다. 문화 생산물의 주체 구성적 힘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책임을 면죄받고자 하는 태도는 비겁하다. 그것은 재현이 지닌 구성적 힘constituting power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재현은 현실과 무관한 이미지만의 세계거나 언어만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고 생산한다. 재현이 지닌 구성적 힘의 문제는 법적 차원의 검열과 규제가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지적하고, 비판하고, 해체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p.141-142
프랑스혁명을 전후한 서구 근대에 포르노그래피는 구체제에 대한 정치적 공격과 연관되었던 자유사상, 인쇄 문화, 물질주의 철학 등 (남성 중심의) 민주주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린 헌트의 지적처럼 당시 포르노에서 여성의 육체는 "모든 남성에 의해 동등하게 구입이 가능한 대상으로 상정되었다는 의미에서 민주화 되었지만" 이것이 "여성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르노그래피는 "관음증과 여성의 물건화가 복합적으로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형제애"를 낳았다. 이 형제애는 "사회적 평준화라는 의미에서 민주적이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그것은 대부분 남성만을 위한 평준화였다." 따라서 근대 포르노그래피의 출현 속에는 형제애에 기초한 근대 민주주의 젠더 모순이 깊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