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서구 문학의 주류에서 나타나는 페미니즘 이론의 흐름을 정리한 부분. 공부가 부족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여성주의 문학이론에 관하여 아주 정리가 잘 된 서문이다.
p.9
길버트와 구바가 19세기 여성 글쓰기에서 찾아낸 젠더 특수성은 페미니스트의 분노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대목뿐 아니라 여성의 불안과 광기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비유에도 드러난다. 이들은 '하위 텍스트sub-text', '분신double', '대항 플롯counterplot', '침묵과 공백' 등 텍스트의 주도적 플롯과 인물 및 장르적 관습에 도전하거나 역행하는 요소에 주목함으로써 여성문학의 특수성을 밝히고자 했다. 남성들에 의해 남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에 갇혀 있던 19세기 여성 작가들은 지배적인 남성적 가치와 미학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깊은 불안과 불온함을 숨기고 있었다. 이 은폐와 위장이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글쓰기를 표층과 심층이 분열된 양피지적 글쓰기로 만든다. ▶19세기 여성문학에 드러나는 은페와 위장. 이중적 글쓰기. 식민주의 문학과의 연관성이 드러나는 부분.
p.11
특히 버사 메이슨을 제인의 분신으로 읽어내는 길버트와 구바의 해석에 대한 가야트리 스피박의 비판은 매섭다.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에서 스피박은 『제인 에어』가 페미니즘의 숭배 텍스트의 위치에 올라선 것은 서구 페미니즘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공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성의 주체적 결정에 초점이 맞춰진 이 작품에서 자메이카 크리올 출신의 버사 메이슨은 주체의 위상을 부여받지 못하고 '인간에 미달하는 타자'로 존재할 뿐이다. 비서구 여성에 대한 이런 타자화는 영국의 문화적 가치를 문명화된 것으로 규정하는 이념적 기획으로 영국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다. ▶19세기 서구문학에서 페미니즘은 오히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협력함으로써 그 주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때문에 페미니즘을 강조하는 문학에서는 제국주의적 차별의 시선을 찾아볼 수 있다는 내용.
p.12
나는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듯 미친 여자의 소멸을 성급하게 예단하기보다는 '성차화된 정신분석학적 주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내가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기획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일정 정도 수용하면서도 젠더 대립 구도를 넘어선 지점에서 발현되는 비대칭적 차이로서 (잉여적) 여성성을 견지하는 이유다. 성차sexual difference는 사회문화 질서가 구성해낸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정체성을 위협하고 전복하는 무의식적 구조의 차이, 라캉식으로 표현하면 실재적 차이다. 이 실재적 차이로서 성차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차이는 사회질서가 구성해내는 담론적 산물이 아니라 그것을 전복하는 억압된 무의식에 속한다.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현대로 올수록 '성차'를 지워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저자의 반대의견. 이 책이 전체적으로 '성차'의 의미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캉의 이론이 기초가 됨.
<제1장. 젠더 트러블과 성차의 윤리학>
p.23 - '여성성의 범주를 포기한 보편주의'로 성차를 이해하기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동등권 주장이나 보부아르의 초월성 옹호는 결국 거추장스러운 성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중성적 주체에 도달하려는 불가능한 꿈, 아니 중성성을 가장한 남성적 보편주의에 견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후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제기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리가레가 여성 혹은 여성성의 범주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성차를 담론 속에 기입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중성적 주체에 대한 꿈이 남성적 동일성의 논리에 또다시 함몰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성'을 지우려는 초기 페미니즘의 시도를 비판. 중성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남성성에 동일시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 다시 말해 여성주의 이론에서 보편주의를 시도한다는 점을 불가능한 꿈으로 보는 것.
p.24 -'여성성의 본질화.실체화'로 성차를 이해하기
~페미니즘에서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런 2단계 페미니즘은 여성 혹은 여성성을 본질화.실체화 한다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남성과 여성, 혹은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 이분법적 대립을 설정한 후 지금까지 부당하게 폄하되어 온 여성 혹은 여성성을 찬양하는 것은 기존의 이분법을 뒤집기만 하는 것일 뿐 이분법적 사유를 지배하는 동일성과 정체성의 문제틀 자체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 p.25 여성이라는 범주를 해체하되 '정치적 효용'을 위해 그것을 전략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이 '전략적 본질론strategic essentialism'은 이후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구성주의/본질주의 논쟁의 교착 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제3의 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두 번째 흐름은 '여성성'을 본질화하고 여성적 특성을 고착화하는 것. 이 방법은 오히려 남성주의 이론을 뒤집어서 공고화하는 것뿐이라고 다시 반박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것도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나타나는 특성과 유사하다. '흑인성'을 거세하고 인류 보편주의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흑인성'을 강조한 민족주의로 나아가느냐에 대한 논란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p.27 -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엄청난 분노를 자아낸 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토막난 채 인용된 이 문장의 나머지 부분을 함께 읽어야 한다. 라캉이 말한 원문은 "보편을 가리키는 대문자 w로 쓰인 그런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There is no such thing as Woman, with a capital W indicating the universal"이다. 이 문장을 통해 라캉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보편'으로 존재하는 여성은 없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자기 동일적 남성 담론능력을 벗어난 여성적 존재의 '있음'을 남성 담론의 틈새나 균열 속에서 찾는 이리가레의 입장과 양립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개별자로서의 여성적 존재를 긍정했던 뤼스 이리가레와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 라캉의 주장이 대립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 라캉은 보편적으로 일관된 여성성이 아니라 개별적 여성성의 존재를 주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p.27-28 - 반사적 여성성과 잉여적 여성성
반사적 여성성은 남성이라는 하나의 성만 존재하는 일원론적 이행 대립 구도에서 남성을 반사하는 종속적 대립물로 구성되는 여성성이다. 하지만 잉여적 여성성은 이런 일원론적 이분법의 구도에 속하지 않으며 이분법에 기반을 둔 차이의 담론을 통해서도 잡히지 않기 때문에 명명되거나 지시되거나 형상화될 수 없다. ~ '파열적 잉여disruptive excess'란 이런 역설적 방식으로 존재하는 여성성을 가리키기 위해 이리가레가 고안한 용어다. 뒤에 다시 거론하겠지만 남성적 상징질서에 의해 지워진 채 존재하는 여성성, 상징질서의 결여와 틈새를 통해 부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여성성을 라캉도 '여성적 주이상스feminine jouissnce' 혹은 '보환적報還的 주이상스supplementary jouissance'라 부르고 있다. 그것은 남근적 재현질서 '안'에서 남근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과는 다른 여성성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여성성의 존립 가능성은 라캉적 의미에서 대상a로서 가능.
p.29
이러한 담론의 자장 안에서 등장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1990)은 성차에 대한 기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인식의 지형을 변모시킨 책이다. (중략) 성차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은 어느 한 젠도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고정시킬 수 없는 성소수자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결하려는 실천적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페미니즘에서 당연시되어온 섹스, 젠더, 성차 등의 범주를 심문에 붙이려는 강력한 해체적 충동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중략) 남은 것은 수행적 행위를 통해 가변적으로 구성되는 복수적 젠더들의 유희다. ▶저자는 주디스 버틀러의 입장에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해체주의적인 버틀러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비판하며 '성차'의 개념을 되살리고자 하고 있음.
p.33
인간 주체는 담론과 권력의 효과라는 푸코의 초기 입장이 보여주듯, 반인간주의적 담론 구성주의에서는 인간이 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담론이 인간을 만든다고 본다. 버틀러처럼 수행성performiticity 개념을 도입하여 구성하는 행위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행위 뒤에 행위자가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행위가 행위자의 의도를 투명하게 반영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행위자는 행위를 통해 가변적으로 구성되며 행위자의 의도를 초과해서 형성된다. ~ 담론 혹은 기표로 명명되는 우연적 의미화의 영역(젠더)이 사회적 투쟁의 장이 되면 의미화할 수 없는 것(섹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버틀러가 섹스를 문화에 선행하는 자연적 소여가 아닌, 문화적 구성물로, 따라서 섹스/젠더의 구분 자체를 구분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이유가 이것이다.
p.39 - '성차'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상징질서에 종속되어 상징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그것이 즉각적 욕구 만족의 세계에서 '결핍lack'이 존재하는 세계(타자에게서 만족을 구해야 하므로 필연적으로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한 곳이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완전한 합일이나 지배로부터 주체가 이탈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 열리는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연에서 떨어져나와 다른 인간들이 거주하고 있는 상징적 재현의 질서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는 법이 정신분석학의 '상징적 법the Symbolic Law'이다.
p.41
정리하면, 성차란 남자와 여자가 실재와 맺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을 가리킨다.
p.42
라캉에 따르면, 남성의 '갖기'와 달리 여성은 '되기'를 취하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라캉은 프로이트가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받았던 비판과 동일한 비판, 즉 여성을 욕망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타자화한다는 비판에 몰린다. '갖기'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남성은 남근을 획득하려는 욕망의 '주체'로 설정되지만, 여성은 '되기'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남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버틀러 또한 여성이 남근이 되고자 하는 것은 남성을 '위한' 대상이 되는 것이며to be the phallus 'for' man, 이는 그녀 자신이 욕망하는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되기'를 취하는 여성의 위치가 과연 남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떨어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성적 '되기'는 남성적 '갖기'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p.55
내가 그(버틀러의 젠더트러블)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은 그의 논의에서 배제된 실재의 차원이 인간의 삶에서 생략되어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주체'는 사회적.상징적 정체성'들'로 포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내부에서 위협하는 잉여적 영역과 만나며 형성되는 것인데, 이 차원이 그의 논의에서 누락되어버리는 것이다. 상징화에 포괄되지 않는 실재를 지워버리는 것은 권력과 담론의 구성에 저항하는 차원을 삭제함으로써 주체를 상징질서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p.56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대사회에서 개개 여성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집합적 정체성들이 서로 충돌하고 연대하는 복합적 과정에 페미니즘이 훨씬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위다. 하지만 이런 당위가 여성 속에 잠재해 있는 실재의 차원을 지워버림으로써 여성을 상징질서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실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 주체의 존엄성
p.57
"하나가 아닌 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리가레가 주목하려는 것도 바로 여성에게 있는 이 존재의 영역, 남근이라는 '하나'의 논리가 지배하는 남성적 질서에서 지워졌지만 잔여이자 잉여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아닌) 존재의 차원이다. 이 차원을 가리키기 위해 이리가레가 남성질서를 되비추는 반사적 여성성과 구분하여 잉여적 여성성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점은 앞서 언급했지만, 이 새로운 여성성은 여성 자신에게도 낯선 이질성으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여성이 자기 내부의 타자로 존재하는 이 여성성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남성적인 하나의 논리를 되비추는 여성성으로 길들여지거나 남성적인 하나의 세계에 편입됨으로써 유사類似 남성이 되려는 유혹 모두를 뿌리치면서 남성적 상질질서 자체를 거스르는 '존재의 모험'이 필요하다.
p. 58
그렇다면 여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이 되는 것은 하나 속으로 고유한 차이들을 통합해 들이는 폭력을 거부할 때, 여성 개개인을 여성이라는 집합적 보편성 속으로 끌어들이는 폭력을 거부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라캉이 성 구분 도식에서 '여성'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La Femme'에 빗금을 그은 것도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이란 총체적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적 존재라는 점을 가리키기 위해서다.
<제2장 누가 안티고네를 두려워하는가?>
p.62-63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초기 그리스 사회가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궁극적으로 이 대립은 국가에 의해 '지양'된다고 본다. 안티고네의 요구는 가족이라는 사적 세계에 갇혀 보편성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 영역을 사유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가족에 개입하여 공적 세계를 사유화하는 여성을 공동체의 적으로,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로 만든다. ~ 이 여성은 동성同性 사회적homosocial 국가에 아들을 낳아 길러주지만 국가의 경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버려지는 존재, 국가의 존립에 결정적 기여를 하지만 바로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쓸쓸히 사라져야 하는 존재다. (중략) 라캉과 버틀러의 목표는 헤겔에 의해 산 죽음으로 내몰린 안티고네라는 여성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살려내는 안티고네는 동일하지 않다.
p.65-66 - 버틀러의 라캉 비판
버틀러는 라캉의 상징적 법이 신의 법이 아닌 인간 문화의 법이라는 점에서 '초월적 근거'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을 넘어 인간을 규정하는 '보편적' 법인 한 '초월적 효과'를 발휘한다고 비판한다. ~ 상징계를 초월적 효과를 발휘하는 보편적 구조로 설정함으로써 '사회적인 것'이 배제된다. 버틀러가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연적인 사회적 실천들과 그 집적체로서 제도적 규범을 말한다. 사회적인 것은 특정 집단의 사회적 실천에 의해 형성되는 만큼 언제든지 변화, 수정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p.67 - 저자의 라캉 옹호, 라캉의 이론을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한 글을 본 적이 있는가.
정신분석학이 문제삼는 것은 인간이 상징적 질서로 진입하여 말하는 주체로 탄생하는 순간 발생하는 '존재와 언어', '몸과 기표' 사이의 근원적 불일치, 그리고 인간에게 결코 역사화될 수 없는 무의식적 잉여를 형성하는 이 불일치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라캉이 '실재the Real'라고 표현하는 것은 상징적 기표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주체가 잃어버리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을 뒤에 남기는 대상이자, 주체가 자신의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을 수 있는 '물the Thing'이다. 그것은 상징질서가 배제하려고 하지만 결코 배제되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 어떤 것, 상징계의 출현과 함께 생산되지만 상징계를 넘어서는 초과이자 잉여이며 상징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역사 속의 "비역사적 핵심unhistorical kernel"이다. 특정한 역사적 제도들과 사회적 양식들은 이런 분열과 불가능성을 봉합하려는 노력이다. ~ 하지만 정신분석학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이것과는 다소 다른 문제, 다시 말해 이런 제도들과 양식들의 구성이 궁극적으로는 '실패한 시도'일 수밖에 없다는 점, 어떤 치명적 대가를 치르고서야 이루어지는 상징적 통합의 시도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주체를 사회적 제도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위치들의 총합'으로 보는 입장은 주체가 이런 사회적 제도들과 갖는 '문제적' 관계를 드러내지 못한다.
p. 69
라캉은 안티고네를 대상을 떠나보내되 대상에 대한 욕망은 간직한 애도자로 읽는 반면, 버틀러는 대상을 떠나보내지 않고 자아 속에 합체하는 우울증적 주체로 읽어낸다.
p.72-73-74 - 버틀러의 안티고네 해석 (미쳤.....)
안티고네가 부르는 오빠는 폴리네이케스일 수도 오이디푸스일 수도 에테오클레스일 수도 있다. 그녀가 '오빠'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는 오빠는 이 다수의 오빠들 중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발화되는 순간 말은 발화자의 의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가 이름을 불러주는 한 오빠는 폴리네이케스이고, 다른 오빠들은 친족 체계의 제도적 규범에 의해 말해졌으되 '말해지지 않는 것the unspoken' 혹은 '말해질 수 없는 것the unspeakable'으로 밀려난다. (중략)
'나'라고 부른 정체성이 실은 상실한 대상들과의 우울증적 동일시에 의해 형성된 것이라면, 나는 이미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사랑했지만 떠나보내지 못한 타자들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프로이트의 우울증적 동일시를 활용하는 지점이 여기다. ~ 이제 '정체성idendity의 정치학'은 고정된 정체성을 해체하는 '동일시identification의 정치학'으로 바뀐다. 이를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가 발전시킨 수행성 개념과 연결시킨다면, 정체성은 수행적 행위performatice act의 효과에서 '수행적 동일시perfomative identification'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확장되면서 주체 내부에 심적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이런 구도에서 보면 우울증적 동일시는 그 병리적 성격을 벗고 타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 나를 타자에게 여는 개방적 행위가 된다. 이것이 버틀러가 안티고네의 우울증에 부여하는 윤리적 성격이다.
p.76
우울증이 자아의 외부에서 내부로 되돌아간 '반사적 움직임reflexive movement'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안에서 밖으로 외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우울증이 억압된 욕망과 공격욕을 외부로 돌리는 몸짓을 감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전환을 이루어낼 수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 저항의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본다. 말해지지 못한 채 자아 속에 합체되어 초자아의 공격 대상이 된 욕망을 말해주는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규범적 권력 때문에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금지된 욕망을 행할 '공적 제도'를 갖는 것이 우울증적 분노를 병리적 차원에서 해방시키는 길이다.
(중략) 이 '인정'과 '언표화'의 과정은 개인적 차원만이 아닌 공적.제도적 차원을 포함하며, 이를 통해 우울증을 정치화할 수 있다.
p.90-91
(버틀러가) 라캉뿐 아니라 여성성(라캉의 용어로 말하자면 여성적 주이상스)의 정치성을 이야기하는 프랑스 페미니즘 일반에 대해 그가 갖는 불만이다. 라캉과 그의 페미니스트 후예들은 버틀러가 상징적 영역과 구분짓는 '사회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투쟁을 말하기보다는 상징질서 이전의 정치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런 정치성 이전의 정치성pre-politics으로는 현실적 권력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 버틀러의 판단이다.
p.79 프로이트 이론의 재해석을 통한 버틀러 비판 / 라캉의 안티고네 해석
프로이트가 애도라는 것으로 말하고자 했던 합리적 핵심은 바로 억압된 성충동과 욕망을 특정 대상에 대한 고착에서 풀어내 자유롭게 흐르게 만드는 것이다.
p.80
라캉에게 상상적.상징적 동일시와 욕망은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안티고네가 포기하지 않는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은 주체가 상상적.상징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너머에-존재하는 실재적 대상이다. 안티고네는 이 물物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물은 외부에 존재하는 '특정' 대상이 아니라 주체에게 욕망을 추동시키는 '부재' 혹은 '공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이 대상을 욕망하는 것과 특정 대상에 고착되는 것은 같지 않다. ~ 지젝에 의하면 애도자를 우울증적 주체와 구분하는 결정적 차이는 대상 a의 유지 여부다. 애도자는 대상을 잃는 대신 욕망의 대상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대상a'를 유지하는 반면, 우울증 환자는 대상은 유지하는 대신 대상a를 잃는 사람이다.
p.81-82
실재에 대한 욕망은 버틀러 자신이 배제해버린, 리비도의 자유로운 이동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반면 라캉이 안티고네에게서 적극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다름아닌 구속당하지 않는 리비도의 분출, 승화라는 이름의 억압 없는 만족이다. ~ 이 순간 주체는 지배적 상징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기표와 담론을 생산한다. 이런 시각에서 애도자는 욕망의 실현을 통해 새로운 담론을 생산해내는 존재다.
p.82
라캉이 읽어내는 안티고네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이다. ~ 그녀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관계로부터 단절하고자 하는 죽음이면서 동시에 죽음충동의 실현이다. 그녀가 죽음을 불사하면서 땅에 묻어주려고 하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은, 따라서, 상징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라캉이 '물the thing'이라고 부르는 실재-대상이다.
p.92
자기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공동체의 법 바깥으로 추방되는 안티고네의 비극적 행위를 통해 공동체는 갱생의 기회를 얻는다. 그녀의 윤리적 행위는 상징적 법을 비틀어 예외를 만드는 주체의 해방적 힘을 예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