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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및 기고문들

영국 문화 연구와 텔레비전 / 존 피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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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연구’가 ‘문화’를 대하는 태도는 정치적이다. 보편적인 인간의 삶이나 미학적 산물보다는 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험들, 삶의 방식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문화 연구는 산업 사회에서의 의미의 생산과 유통을 밝힌다. 이는 경제적 토대인 하부구조가 문화적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회는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전제에 따르면 ‘문화 연구’는 사회관계를 지배계급과 종속계급의 항상적인 대립과 투쟁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일반이익’으로 ‘자연화’하려고 하며, 종속계급은 그러한 과정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획득하려고 노력한다.(241)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계급과 종속계급을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상정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과 인종, 더 나아가 국가, 동료집단, 종교, 직업, 교육, 정치적 동맹 등으로 사회적 차별 지점을 확장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 주체와 타자의 설정은 사회의 분화만큼이나
다양해지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배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일반이익인 것처럼 자연화하는 시도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계급 구성원들의 실천 속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새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화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242) 즉, 의식적으로 사고하지 않아도 인간이 생활하는 일상적인 부분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참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구조주의적 관점이 비판적인 시각을 환산시키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의식은 문화, 사회, 역사의 산물이지 진리나 의도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문화연구에 정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배계급이 종속계급을 일방적으로 지배, 제어하는 것만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알튀세르와 그람시는 쌍방의 상호관계를 주장한다. 두 사람은 마르크스사상에 구조주의적 해석을 제시하였는데, 모두 이데올로기의 역동적인 성격을 주장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가 고정되고 정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재생산되고 재구성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는 이데올로기들이 사회제도 안에서 존재하면서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제도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때문에 다른 계급의 이익과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게 은폐한다. 알튀세르는 그와 동시에 계급간의 상호관계 네트워크가 설정되기 때문에 ‘중층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는 고정된 관념이 아니라 일상과 제도 사이에서 관계를 재설정해 나가는 역동적인 사회실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과 일상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주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결정되는 주체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수많은 방법으로 개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알튀세르는 그 중에서도 미디어와 언어가 담당하는 역할을 강조한다. 즉 미디어가 인간을 ‘호명(interpellation)’하여 이데올로기적 주체로 배치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 텍스트가 수용자 대중의 주체를 구성해냄으로써 자본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역시 정적인 권력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힘을 발휘하는 투쟁의 과정을 의미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은 지배계급을 유지하기 위해 종속계급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항상적인 대립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화연구는 이러한 항상적인 대립 위에 연구의 장을 설정한다
.

 
  대표적으로 문화연구자 스튜어트 홀은 텔레비전을 열린 텍스트로 보고 시청자와 텍스트 사이의 협상의 과정을 읽어내려고 한다. 텔레비전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뉴미디어로서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가 적극적으로 드러난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홀의 ‘선호 해독’이론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생산방식과 시청자의 독해(수용)방식을 모두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독자들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배적’해독을 할 수도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새롭게 창작하여 ‘타협적’, ‘저항적’해독을 할 수도 있다. 텔레비전 수용자들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수용’과 ‘저항’의 사이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 텍스트는 지배와 통제를 하는 동시에 저항과 차이성을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텔레비전 텍스트는 이들 사이의 불안정한 긴장상태를 담고 있다.(263) 



 
(지금은 텔레비전 텍스트뿐만 아니라 인터넷 프로그램,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 트위터 등의 장을 통해 문화 전반적인 것들을 스스로 텍스트화하고 분석한다. 텔레비전에서 제공하는 것만이 텍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반의 모든 현상들이 텍스트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수용방식에서 저항을 발건하는 것. 이것을 저항이라고말할 수 있을까? 너무 안일한 태도가 아닌가? 학문적인 저항을 말하는 것인가? 대중문화에 대항하여 학문적인 저항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