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은 비평을 배신한다.
사실 이 말을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작과 비평은 늘 상대적이며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비평이 창작의 한 부류라는 것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비평은 창작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때가 많다. 혹은 창작의 일부분을 떼어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비평이 창작의 우위에 있는 듯한 모습들이다. 창작은 사실 친절하지 않으며, 비평은 친절을 가장하여 자신을 포장한다. 창작이 많은 과정을 거쳐왔듯이, 비평 또한 수많은 이론들로 무장하며 자가발전해 왔다. 하지만 비평이 창작의 또 한가지 장르라 해도, 현실의 중력을 이길 수 있는 건 강한 창작력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 <인셉션>이 오랜 비평이론이었던 정신분석학을 차용한 흥미로운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오랜 시간동안 정설로서, 이색적이면서도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창작을 비평하고 분석하는 것이 용이하면서도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세상의 빛을 본 이래로 정신분석학은 유럽과 미국이라는 두 방향으로 파생된다. 미국에서는 정신과 치료라는 실용적인 부분으로 발전했다면, 유럽에서는 니체, 맑스와 함께 근대철학 비판의 무기로 사용된다. 프로이트 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인간 정신의 무의식을 발견했다는 점, 즉 이성이 인간행위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인간이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공간을 발견하고, 구조 안에서 체계화되는 존재, 혹은 어떠한 체제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라캉, 지젝, 등의 후기 철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전이, 욕망이론 등을 발전시키며 근대문화를 비판하였고 현실구조를 붕괴시키려는 노력으로 이어갔다. 이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너무 강한 비평의 잣대가 되어 모든 창작을 애욕의 문제나, 가족관계의 문제, 혹은 작가의 개인적인 트라우마 등등으로 몰아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비평이론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정신분석학을 방법론으로 이용하기는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효용도나 적합성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정신분석학의 효용도보다는 이 정전화되어버린 비평이론이 이제는 어떻게 차용되는가, 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인셉션>은 이 정신분석이론을 구조화 함으로써 구성되었다. 이는 약 100년간 강한 영향력을 지녔던 비평이론을 전유함으로써 해체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더 이상 그 이론으로는 나를 분석할 수 없다"는 도전이기도 하다. 정신분석 비평이론은 작품 안에 있는 무의식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내면에 들어있는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이론은 탈식민지 이론과 결합하여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인셉션은 그 스스로가 꿈의 구조를 만들어 내었고, 그가 사용했던 모든 이론들을 시각화하였다. 이 영화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가 없다. 비평을 제치고 한발짝 앞으로 나아간 창작의 반란이다. 실로 신세대적 감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 영화의 비평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든, 그러한 화두를 던진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래서 난 헐리웃 키드일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덧. 한참 지나고 보니 인셉션 논란은 재미냐, 내용이냐 하는 문제로 흘렀던 듯하다. 나는 뭐 늘 헐리웃 영화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느다. 나같은 고리타분한 인문학도의 뒷통수를 치는 참신한 아이디어와 고도의 문제제기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충만한 게으름 때문에 아무도 인셉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요즘같은 때에서야 후기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