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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및 기고문들

사이토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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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private)이란 타자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 아렌트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장소를 박탈당한 사람들'(displaced persons)이다. ~ 버림받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의'를 스스로 의심하는 데 있다. '사적'으로 사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잉여자라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14-15)


  근대의 '공공성' 정의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종교나 신앙을 '사적인 것'(pricatize)으로 다룸으로써 공공적인 쟁점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신체 특히 성적인 것도, 한편으로는 '생명-권력'의 표적이 되면서도 비가시적인 개인적 차원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근대의 '공공성'은 많은 테마를 '사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해온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공사(公私)를 나누는 경계선은 담론에 의존하는 유동적인 것이지, 담론 이전의 것, 정치 이전의 것은 아니다.(35)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상의 공간 안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서로를 '무엇'으로서 처우하는 공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간을 '현상의 공간'과 대비하여 '표상의 공간'(the space of representation)이라고 부르자. '표상'은 타자의 행위나 논의를 '무엇'이라는 위상, 즉 타인과 공약 가능한 위상, 교체 가능한 위상으로 환원하는 시선이다. 표상의 시선으로 보는 한, 나는 타자 앞에 '나타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표상이 지배하는 정도만큼 '현상'가능성은 봉쇄되는 것이다.(60-61)

  아렌트는 공공적 공간을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who)인가를 리얼하고도 교환 불가능한 방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 정의한다.  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행위하고 말하는 것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내보이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능동적으로 드러내며 인간 세계에 현상한다." (62)

  친밀권과 소가족과 '사랑의 공동체'를 동일시하는 시각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문제는 가족과 '사랑의 공동체'를 등치시키는 데 있다. 가족과 사랑을 결합하는 '가족애'의 이데올로기는 한 구성원에게만 일방향적인 봉사와 헌신을 요구하는 장치로서 작용해왔다. 게다가 그 '사랑'이 오로지 이성애를 가리킨다면 그러한 '가족애'이데올로기는 동시에 이성애주의를 재생산, 강화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성애로 결합된 부모, 애정에서 나오는 돌봄이라는 모델에 적합하지 않은 가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에 반해 최근 제기되고 있는 다른 식의 접근법은 '가족의 다원화'이다. 이것은 다양한 생활방식을 취하는 동거의 형태, 예를 들면 친구끼리 노후생활을 함께하는 동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공동가정'(group home) 등도 가족으로 적극적으로 재정의하려고 한다. (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