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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사도바울> - 개별적의 보편주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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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현성환 옮김, <사도바울>, 새물결, 2008. 


1. 바울, 우리의 동시대인


- 장기간에 걸친 공산주의 독재는 금율 자본의 전 지구화와 자본의 공허한 보편성의 절대주권은 또 다른 보편적 계획-비록 타락하고 피투성이이긴 하지만-만을 진정한 적으로 가졌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미덕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레닌과 마오쩌둥만이 일반적 등가라는 자유주의의 장점들 또는 상업적 소통이라는 민주주의적 미덕들을 거리낌 없이 자랑하려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공포를 안겨주었다는 것을 말이다. ~ 하지만 인종적, 종교적, 국가적,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인정하기 위해 진리들의 구체적 보편성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러한 황폐화가 늦춰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유로서의 진리의 권리들이 통화주의자들의 자유 교환과 그것의 보잘것없는 정치적 부속물인 자본주의-의회주의만을 심급으로 갖게 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의회주의를 장식하고 있는 허울 좋은 단어인 '민주주의'는 현실의 참담함을 가리는 데 점점 더 실패하고 있다. (20) 


- 그(바울)는 보편성에 (율)법과 주체 사이의 특수한 결합 방식을 할당하는 가운데, 그러한 할당을 위해서는 주체의 편에서만이 아니라 (율)법의 편에서도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극히 엄격하게 자문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만일 진리와 주체 사이의 결합관계를 재정초할 수 있게 된다면 진리(사건적이고 우연적인)의 편에서만이 아니라 주체(드물고 영웅적인)의 편에서 어떤 결과들을 견뎌내야 할까. (21) 


- 매번 어떤 사회의 이미지는 그에 알맞는 새로운 생산품들, 즉 전문 잡지들, 말끔하게 단장한 쇼핑몰, '자유' 라디오 방송국들, 특정 계층을 겨냥한 광고망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금 시간대의 자극적인 '시사토론'을 재가한다. 들뢰즈는 '자본의 탈용토화는 지속적인 재영토화를 필요로 한다'는 말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자본은 자신의 운동원리로 하여금 자본의 실행공간을 동질화하도록 하기 위해 주체적, 영토적 정체들의 끊임없는 창조를 요구한다. 게다가 그러한 정체성들은 시장이 지닌 천편일률적인 특권들에 대해 다른 것과 독같은 방식으로 노출될 권리만을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일반적 등가라는 자본주의 논리와 공동체들이나 소수 집단의 정체성적, 문화적 논리는 유기적으로 접합된 하나의 총체를 형성한다. 

이러한 유기적 접합은 모든 진리과정에 대하여 구속적이다. 그것은 유기적으로 진리 없이 존재한다. (26-27)


-문제는 정체성 지향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범주들이 예컨대 정치과정과 같은 진리 과정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범주들은 진리과정에서는 부재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진리도 자신의 영속성을 확립하고 스스로의 내재적인 무한성을 축소시킬 최소한의 기회도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예를 들어 나치즘처럼 철두철미하게 정체성 지향적인 정권들은 호전적이고 범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프랑스의 '공화주의적' 정체성이라는 형태로 그러한 범주들을 결백하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하다. 그들은 결국 필연적으로 자본이라는 추상적 보편과 지역적 박해들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말 것이다. (28)


- 이 모든 것(화폐적 동질성, 정체성 요구, 자본의 추상적 보편성, 부분 집합의 이익을 위한 특수성)과 단절하는 가운데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개별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을 소환한다. 왜냐하면 그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틀림없이 기쁜 소식(복음)을 유대 공동체 안에서만의 가치로 머물게 하는 엄격한 울타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또 그런 만큼 복임이 작용 가능한 일반성들-그것이 국가적인 것이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든-에 의해 결정되도록 놔두어서도 안 될 것이다. (32)


- 1. 그리스도교적 주체는 그가 선언하는 시간(그리스도의 부활)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주체의 실존이나 정체성의 외재적 조건들을 논박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주체에겐 유대인임도 그리스인임도 요구되지 않는다. 그것은 담론들(세 가지:유대 담론, 그리스 담론, 새로운 담론)에 대한 이론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적 주체는 이러저러한 사회계급에 속하거나(진리 앞에서의 평등이론), 이러저러한 성에 속할(여성 이론) 필요도 없다. 

  2. 진리는 전적으로 주체적이다. (그것은 사건에 관한 확신을 증언하는 선언에 속한다.) 따라서 진리의 생성을 법에 포섭시키려는 모든 것을 논박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폐기되고 유해한 유대적인 율법과 오로지 구원의 길들에 대한 현학적 무지일 뿐으로 운명을 우주적 질서에 복속시킬 뿐인 그리스적인 법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불가피하다. 

  3. 선언에 대한 충실성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의 과정이지 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개념이 필요하다. 선언하는 순간에 주체를 명명하는 개념(피스티스, 통상 '믿음'으로 번역하지만 '확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과 이 확신을 투쟁적으로 말건네는 순간에 주체를 명명하는 개념(아가페, 통상 '자애'라고 번역하지만 '사랑'으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리 과정은 완성된 성격을 가진다는 가정에 의해 주체에게 부여되는 전위의 힘에 따라 주체를 명명하는 개념(엘피스, 통상 '희망'으로 번역하지만, '확실성'으로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4. 진리는 그 자체로는 예를 들어 로마 제국의 상태와 같은 정황적 상태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진리가 이러한 상태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부분 집합들의 조직으로부터 빠져나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탈에 상응하는 주체성은 국가(상태)에 대한, 사고방식들 속에서 그러한 국가(상태)에 상응하는 것-의견이라는 정치-에 대한 일종의 필연적 거리다. 바울 말대로 시류적 의견들에 대해 논쟁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집중적이고 진지한 공정이기 때문에 결코 기존의 의견들과 경쟁해서는 안 된다. (33-35)




2. 바울은 누구인가? 


-진리 과정이란 여러 단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한 과정에 참가해 정초적 사건을 선언하고 그에 따른 결과들을 끌어내거나 아니면 그러한 과정에 이방인으로 머물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중간항도 매개도 없는 그러한 구분은 전적으로 주체적인 것이다. 의식과 외부적인 표지들은 그러한 구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줄 수도, 심지어 식별해줄 수도 없다. 바로 그것이 진리가 보편적 개별성으로서의 위상을 갖기 위해 치러햐 하는 대가이다. 어떠한 진리의 과정은 오직-그러한 과정이 실재를 가리킬 수 있는 지점에서-그러한 진리의 개별성에 대한 즉각적인 주체적 인정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 때만이 보편적일 수 있다. ~ 따라서 바울은 어떤 출신이든,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모든 개종자들을 그리스도교를 온전히 수행하는 신자들로 여긴다. (48) 


- 바울은 자기가 두번째 분파를 이끌고 있음을 알았다. 바울이 보기에 그리스도라는 사건은 이전의 표징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새로운 보편성은 유대인 공동체와 어떠한 특권적 관계도 갖고 있지 않다. 분명히 그리스도라는 사건의 구성 요소들, 장소, 그것이 동원하는 모든 것의 거점은 유대인 공동체이다. 바울 본인도 온전한 유대적 소양을 지닌 사람으로서 예수가 살아 있을 동안 했다고 추정된 말들보다 <구약성서>를 훨씬 더 자주 인용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이 그것의 존재에서는 그러한 유대적 거점에 종속될지라도 그것의 진리 효과들에서는 그러한 장소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공동체의 표징(할례, 의례들, 율법의 엄수)이 옹호될 수 없거나 틀려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의 사건 이후적인 정언명령이 그러한 표징을 무관한 것으로(그것이 더 나쁘다) 만들기 때문이다. (50) 


- 중단, 충실, 표징 - 진리과정의 주체는 누구인가? (51)


- 안디옥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는 바울이 되돌아온 안디옥으로 찾아간다. 문제가 된 것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의례에 쓴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가였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이방인들과 동석했으나 야고보의 제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바울은 이것을 아주 언짢게 여겼다. 베드로의 그러한 행동이 이전의 타협을 배신하는 위선적인 태도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텍스트는 맹렬한 격노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55) -갈라디아서 2장 11~14절 



3. 텍스트들과 콘텍스트들 


- 문제는 어떻게 그리스도라는 사건을 선언할 수 있는 확신만으로 무장한 채 지혜(소피아)를 핵심적 범주로 삼고 수사적 우월성을 도구로 삼고 있는 그리스의 지적 환경에 부딪칠까를 아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관련해 우리는 당시 바울이 그리스어로 글을 썼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리스어는 일종의 국제어(거의 오늘날 영어와 같았다)로 당시 동방에서는 일상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일부러 만들거나 자기들끼리만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상인과 작가들의 언어였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말을 당대적이고 일상적인 용법으로 복구시켜야 한다. 수세기 동안 모호한 표현이 난무하는 바람에 그의 말씀은 낡아빠진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의 말들은 교회만의 특수한 방언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그리스어의 미묘함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식자층, 즉 철학자들의 언어는 이미 얼어붙었으며 거의 죽은 상태에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논쟁은 외부로부터, 각자만 이해하지 상대방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을 힘들게 주고받는 방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갈등은 바로 살아있는 일상어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수사학으로 무장한 지혜에 대해 바울은 신의 영(프네우마, 숨결)과 고유한 힘(뒤나미스)를 대립시킨다. 인간의 지혜는 신의 권능에 대립하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중략) 즉 말의 지혜 없이 개입하는 것이다. 이 준칙은 철저한 반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필로소피아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주체의 분출은 우주나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개인적인 순응이라는 수사적 구성물로서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59-60) 


-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은 헌급을 납부하는 것을 역사적 사도들의 우월성에 대한 인정으로뿐만 아니라 동시에 예루살렘을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스도교 운동의 중심지로 선택했다는 의미로 보았다. 따라서 모금은 유대인들의 공동체주의와 그리스도교의 팽창주의 사이의 연속성을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모금을 통해 외부의 그룹들은 자신들이 디아스포라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모금에 대해 그와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한다. 그러한 헌금을 받음으로써 유대 중심지는 이교도-그리스도인 집단들의 정당성을 인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 공동체의 소속도, 그러한 소속의 표징도, 또 이스라엘 땅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도 구성된 집단이 그리스도교의 영향권에 속하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적절한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61) 


- 제1세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아주 풍부하고 상세하게 이야기되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텍스트들에는 이 모든 것이 거의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바울의 서한들에서 예수의 경험적 삶뿐만 아니라 스승의 유명한 비유들도 실제로는 거의 하나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종종 지적되어 왔다. 예수의 기적들처럼 그의 가르침들도 보란듯이 무시된다.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지점으로 귀착된다. 신의 아들인 예수가, 따라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런다음 부활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머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런 현실적 중요성도 없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기로 하자. 나머지(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는 확신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확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심지어 변조가지 하는 것이다. (68-69) 


- 바울이 서한들을 쓴 시기와 복음서들이 쓰인 시기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핵심적인 사건이 있었다. 즉 로마 제국 점령자들에 맞선 유대인들의 봉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66년(바울이 사망한 후)에 시작되어 70년에 티투스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운동에서 예루살렘이 가졌던 '중심'으로서의 의미가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서서히 로마를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수도로 만들고, 역사적 사도들이 머물렀던 예루살렘에 의해 상징되던 동방적이며 유대적인 기원을 역사적으로 지워버리는 과정이 시작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의 핵심의 건설을 보편적이고 탈-중심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바울을 몇가지 측면에서 바로 이러한 이동의 진정한 선구자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70) 


-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읽을 때 우리는 그의 산문 속에서 시대나 장르들 그리고 정황들이 남긴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에 깜짝 놀라게 된다. 이들 산문 속에는 사건의 정언 명령에 따라 견고하고 시간과 무관한 어떤 것, 다름 아니라 사유가 갑자기 출현하는 개별성 안에서, 하지만 모든 일화와는 무관하게 보편성을 향하도록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성가신 역사적 매개 없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다. (74-75) 


- 파솔리니에게 바울은 사회적 불평등, 제국주의, 노예제도에 기반한 사회 모델을 혁명적으로 타파하려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파괴에 대한 성스러운 의지가 있었다. 구상으로 그치고 만 영화 속에서 바울은 분명히 실패하며 그러한 실패는 공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내적이다. 그러나 바울은 세계의 진리를 선언하는데, 그것도 거의 2,000년 전에 말했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용어로 그렇게 한다. (바울의 발언은 시간과 관계없이 정당하다.) (76) 



4. 담론들의 이론 


- 바울의 어휘에서 '유대'와 '그리스'라는 말은 우리가 '민족(people)'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것, 다시 말해 믿음들, 관습들, 언어, 영토 등의 용어로 포착 가능한 객관적인 사람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제도화되고 합법화된 종교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유대'와 '그리스'란 주체적 성향들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바울이 본인이 살고 있는 세계의 두 가지 정합적인 지적형상이라고 생각한 것, 또는 담론들의 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다. 유대인과 그리스인에 관한 이론을 세울 때 바울은 실제로는 담론들의 위상학을 제시하고 있다. (82)


- 바울에게 아들이라는 심급의 출현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 담론'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라는 확신과 결부되어 있다. 신이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보냈다는 도식은 기본적으로는 역사 속에서의 개입을 의미하는데, 그러한 개입에 의해 역사는 더이상 시대의 법칙들에 따른 초월적 예정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니체의 말대로 '두 동강 난다'. 아들을 보내는 것(탄생)이 이러한 단절에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기준이 되는 것은 아들이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에게 더이상 지배 형태를 주장하는 어떤 담론도 믿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86) 


- '사도(아포스톨로스)'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쨌든 경험적인 것 또는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사도가 되기 위해 예수의 동반자였다거나 그리스도라는 사건의 증인이었을 필요는 없다.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본인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본인의 표현에 따르자면 "사도가 되도록 부름받은" 바울은 그러한 사건 안에 있었고 그것을 보았다는 이유로 진리의 보증인을 자임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명백히 거부한다. (87-88) 


- 사도의 주체적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담론의 특징들이 앎(지식)의 미덕들이 사건에 의해 사라지는 표징을 통해 반복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으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게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표징)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7~29절, (91-92) 


- 이러한 주장의 기저에 갈린 생각은 다음과 같다. 즉 사건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현상 중의 하나는, 사건은 언어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실재의 지점(point de reel)과도 같다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93)


- 따라서 바울의 논리를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사건은 신은 존재의 신이 아니며 존재 또한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94) 



5. 주체의 분열 


- 실재를 순수한 사건으로 여기는 그에게 그리스 담론과 유대 담론은, 레비나스의 작업에서 여전히 그러하듯, 더이상 사유를 위한 중요한 차이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못한다. 바로 그것이 바울의 보편주의적 확신의 이면에 숨어 있는 원동력이다. 즉 '민족적(ethnique)' 혹은 문화적 차이-바울의 시대 그리고 로마제국 전체에서는 그리스와 유대의 대립이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는 실재 또는 새로운 담론을 배치하고 있는 새로운 대상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중요한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실재도 더이상 처음의 두 담론을 구별하지 않고, 양자의 차이는 명백함에 맞서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로마서 10장 12절)라고 선언하듯이 말이다. (112-113) 


- 언제나 특수한 아버지는 아들의 보편적 명백성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모든 사건 이후적인 보편성은 아버지들의 특수성을 소산시킴으로써 아들들을 평등하게 한다. 다라서 모든 진리는 파괴될 수 없는 젊음으로 특징지어진다. 

이후 신학은 아버지와 아들의 실체적인 동일성을 확립시키기 위해 온갖 종류의 왜곡에 몰두할 것이다. 바울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러한 질문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아들을 보냄'이라는 반철학적 은유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사건만을 필요로 하고, 이처럼 순수한 도래를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철학적 어휘를 통해 철학적으로 재기입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부활한 아들은 모든 인류를 혈연관계로 만든다. 그것이 앎(지식)이라는 형상과 그것의 전달의 무용성을 구성한다. 바울에게 지식이라는 형상은 그 자체가 율법의 형상과 마찬가지로 예속의 형상이다. 그와 결합되어 있는 지배의 형상은 실제로는 하나의 협잡이다. 지배자를 축출하고 아들들의 평등성을 정초해야 한다. (116-117) 


- 예수는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도래하는 것의 이름이다. (119) 


- 순수한 사건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은총(카리스)'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유산도, 전통도, 가르침도 아니다. 사건은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잉여물이며, 순수한 증여로서 제시된다. (124) 


- 요컨대 우리는 사건을 통한 단절이 주체를 항상 '......이 아니라 .........임'의 분열된 형태로 구성하며, 바로 그러한 형식이 보편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니라'는 폐쇄적 특수성들('율법'이 그것으 이름이다)에 대한 잠재적인 해체인 반면 '.......임'은 사건('은총'이 그것의 이름이다)에 의해 열린 이 과정의 주체들이 동역자로서 임해야 하는 과업과 충실한 수고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보편성은 합의된 적법성이자 세계의 특수한 상태로서의 육체 족에도 또 은총과 진리의 내밀한 거주인 순수한 영 쪽에도 있지 않다. 의례와 율법을 중심으로 한 유대담론은 사건의 넘침에 의해 침식 당하며 동시에 내적 계시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오만한 담론도 폐지된다.(124-125) 


6. 죽음과 부활의 반변증법 


- 부활이라는 주제가 변증법적 체계 구성 속에 포획되었다면 잉여적 증여이자 측정할 수 없는 은총으로서의 사건은 자기-정립적이며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이성의 규약속으로 용해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독일 낭만주의의 이성적 날 끝인 헤겔 철학이 그리스도라는 사건의 포획을 초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헤겔에게서 은총은 절대자의 자기-전개의 한 계기가 되고, 죽음과 고통(고난)이라는 소재는 정신성이 유한성 속에 자기-외화하면서 자기의식의 체험적 강렬함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기 위해 당연히 치러야 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의 입장은 반변증적이며, 죽음은 어떤 식이든 부정성의 내재적 힘의 불가피한 행사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은총은 절대자의 '계기'가 아니다. 그것은 예비적인 부정이 없는 긍정이다. 그것은 율법이 중단되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이다. 은총은 순수하고 단순한 만남이다. (128)


- 바울에게 죽음은 구원의 작용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와 율법 쪽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그것은 육체라는 주체적 길에 의한 실재의 형상화이다. 그것은 어떤 신성한 기능도, 어떤 정신적인 영역도 갖고 있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 (132) 


- 결국 죽음이 요청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신적 개임이 원리 자체에서부터 인간의 유적 성격과, 따라서 그를 지배하고 있는 사유-사유는 주체로서는 '육체'로, 객제로서는 '죽음'으로 불리고 있다.-와 정확히 동등해져야 하는 한에서뿐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 인간들도 신으로부터 분리되기를 멈춘다. 왜냐하면 아들을 보내어 그 자신이 아들이 됨으로써 신은 우리의 사유적 구성물의 가장 깊숙한 내부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 죽음의 유일한 필요성이다. 죽음은 신 자체와 동등해지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사유-그것의 실재가 죽음이다-를 통해 우리가 신 자체와 동일한 요소 속에 있다는 사실이 은총 속에서 주어진다. 여기서 죽음이 초월성에 대한 포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을 내재화하는 장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34-135)


-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신은 자신의 초월적인 분리를 포기하고, 아들이 됨으로써 자신을 봉합하며 분열된 인간 주체의 구성적 차원에 함께한다. 이를 통해 신은 사건이 아니라 내가 사건의 거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한다. 사건의 거점이란 어떤 상황에 내재적이며 그러한 사건 자체의 구성에 개입하며, 그러한 사건을 다룬 상황이 아니라 바로 이 유일한 상황에만 관련되도록 하는 소여를 가리킨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주체적 상황 안에서 부활(부활은 전혀 죽음으로부터 추론되지 않는다)을 운명짓는다는 점에서 죽음은 사건의 거점을 구성한다. (137) 


- 죽음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보편적 '예'의 정초, 바로 이것이 바울이다. (140) 


- 바울의 사유는 부활 속에서 육화를 파기한다. (144) 


7. 율법에 맞선 바울 


- 로마서 7장 11절 인용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54-156)

여기서 바울의 모든 사유는 삶/죽음이라는 대립에 의해 구조화된 주체의 무의식 이론을 향하고 있다. 율법의 금지란 그것을 통해 대상에 대한 욕망이 '무의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죄의 삶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에 의해 주체는 이러한 욕망의 중심에서 벗어나 죽음쪽으로 건너간다. (156)


- 우리는 (죽은) 자아와 (살아있는) 죄의 분리라는 강력한 역설을 주목할 것이다. 그러한 역설은 죄를 짓는 것은 결코 자아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임을 의미한다. "죄가 계명을 통해 틈을 타서 나를 속이고, 또 그 계명으로 나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도덕론자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바울의 관심은 이러한 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죄의 주체적 위치와 그것의 계산이다. 죄는 죽음의 삶이다. 오로지 율법만이 이 죽음의 삶을 가능케 한다. 그것을 위해 삶은 자아의 형태로 죽음의 위치를 점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모든 텍스트를 관류하고 있는 극단적인 긴장은 바울이 주체의 탈중심화, 주체의 분열의 특수하게 굴절된 형태를 분명하게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삶의 주체가 죽음의 위치에 있고, 또 역으로 죽음의 주체가 삶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한편의 지식과 의지는 다른 한편의 행위 또는 행동과 완벽히 분리된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지배하에 있는 실존의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본질이다. 또 이러한 탈중심성은 코기토에 대한 라캉의 해석(내가 생각하는 곳에 나는 없고,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160) 



8. 보편적 힘으로서의 사랑 


- 순수한 주체화인 믿음 자체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 이 보편적 말 건넴을 바울은 '사랑', 아가페라고 부르는데, 오랫동안 이 말은 더이상 우리에게 그리 대단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 '자애'로 번역되어 왔다. 

사랑의 원리는 사유로서의 주체가  사건의 은총을 부여받을 때 - 이것이 주체화(믿음, 확신)이다. - 죽었던 주체가 삶의 위치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주체는 율법쪽으로 추락했던 - 그것의 주체적 형상이 죄이다 - 힘의 속성들을 다시 회복한다. 그는 사유와 행동 사이의 현재적 통일성을 되찾는다. 그리하여 삶 자체가 보편적 법칙으로 바뀌게 된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위한 삶의 접합, 믿음의 길, 법을 넘어선 법으로 회귀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68) 


- 부활에 의해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배열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선언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확신은 '새로운 사람'의 보편화를 보류 상태로 두고, 살아 있는 사유와 행위 사이의 화해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력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율법이 우리와 분리시킨 것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음은 말한다. 믿음은 예수 안에서는 실재적이지만 모두에 대해서는 아직은 실질적이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을 규정한다. 

진리의 사건 이후적인 보편성을 끊임없이 세계 안에 기입하고 이 보편성이 주체들을 삶의 길에 합류시킬 수 있도록 해주는 법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사랑의 임무이다. 믿음은 사유의 가능태적 권능(힘)에 대한 선언된 사유이다. 그러나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갈라디아서 5장 6절) 이고, 바울이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로 아직 그러한 권능(힘) 자체는 아니다. (170) 


- 새로운 사람에게 사랑은 그가 이행한 율법과의 단절을 완성한다. (171) 


- 바울은 타자(Autre)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기를 잊어버리는 헌신적인 사랑의 이론을 말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타자의 초월성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주체가 사라질 것을 요구하는 이러한 거짓 사랑은 나르키소스적인 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네번째 담론, 즉 내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이라는 담론에 속한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주체가 본인과 갖게 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는 오직 그러한 진리를 선언하는 주체를 정립시키는 살아 있는 진리애 대한 사랑일 뿐이다. 이처럼 사랑은 사건과 믿음을 통핸 주체화의 권위 아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사건만이 주체를 사랑할 수 없는 죽은 자아가 아닌 다른 것이 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법은 주체화(확신)에 의해 가능해지는 방식으로 타자(autre)들과 모두를 향한 자기-사랑의 힘을 전개하는 데 있다. 사랑이란 정확히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173)  


- 바울의 직관에 따르면 모든 주체는 주체화와 꿋꿋함의 접합이다. 그것은 또한 즉각적인 구원은 없으며 은총 자체는 가능성에 대한 지시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는 돌발 속에서뿐만 아니라 노력 속에서 주어져야 한다. '사랑'은 그러한 노력의 이름이다. 바울에게 진리는 오로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갈라디아서 5장 6절) 것이다.

스스로를 세계 속에 실존케 하는 진리의 힘은 이 진리의 보편성과 동일하고, 이 보편성의 주체적 형태는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이름 아래 그러한 보편성이 그리스 사람이든 유대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모든 다른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 건네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6) 


9. 희망  


- 바울이 이처럼 공격적이며, 묵시론적인 분위기에 양보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희망을 불경한 이들의 처벌에 거는 일은 더더욱 드물다. 

왜냐하면 바울의 열정은 보편주의이며, 사람들이 그를 '민족들(이방인)의 사도'라고 칭한 것이 우연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명확한 확신은 부활이라는 사건적 형상이 지금 잠시 머무르고 있는 믿는 자들의 공동체라는 실재적이고 우연적인 거점을 넘쳐나리라는 것이다. 사랑의 노동은 아직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제국은 광대하다. 어디를 보건 불경건하고 무지해 보이는 이러저러한 사람과 민족이야말로 이 투사가 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들이다. 바울의 보편주의는 희망의 내용이 우연히 지금 살고 있게 된 신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일종의 특권이 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분배적 정의를 희망의 지시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182-183)


- 사랑이 자기-사랑을 살아 있는 사유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모두를 향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힘인 것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구원의 주체성 그리고 사유와 힘의 통일성의 주체성을 각각의 시련 속에, 모든 승리 속에 현존하는 보편정으로 짜낸다. 거두어진 모든 승리는 아무리 국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보편적이다. ~ '모두에 대함' 없이는 일자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내가 참된 것의 보편성을 위한 인내하는 노동자가 되는 순간부터 내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지칭하고 시험하는 것이 바로 희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희망은 미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것은 현존하는 주체의 형상으로, 그러한 형상은 다시 그가 그것을 위해 일하고 있는 보편성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186-187) 


10. 보편성 그리고 차이들의 횡단 


- 조화를 위해 바울이 사용하는 기술을 우리는 곧이어 균형맞추기(la symetrisation second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당시의 어느 누구도 의문시하려고 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그도 양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위가 그러하다. (중략) 중요한 것은 진리의 보편적 생성이라는 것에 대한 환기가 은연중 이처럼 불평등한 준칙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 곧이어 그러한 규범의 가역성을 언급함으로써 그러한 준칙을 중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중략) 

결국 최종적으로 보자면 진보적 혁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바울의 시도는 보편 지향적인 평등주의가 불평등한 규범의 가역성을 통과하도록 하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규범과 관련된 출구 없는 논쟁에 빠져들지 않고도 보편성이 다시 특수화하는 차이들 속에서 관철될 수 있도록 바울로 하여금 전체적인 상황을 장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201-202) 


- 이렇듯 바울은 이중적인 확신에 충실하다. 우리에게 일어난 것에 비추어, 즉 공적인 선언을 통해 우리가 주체화하고 (믿음), 충실성을 통해 보편화하며(사랑), 시간 속에서 우리의 주체적 확고부동함(희망)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해준 것과 관련해 차이들은 차이가 없어지고, 참됨의 보편성이 차이들을 폐기한다. 진리가 전진하는 세계 속에서 보편성은 모든 차이들에 노출되어야 하고, 그러한 차이들의 분유라는 시련 속에서 그러한 차이들을 횡단하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남자든 여자든,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그들에게 은총처럼 도래한 보편성을 담지하는 것이다. 또 거꾸로 보편성 그 자체는 차이들 안에서 그들에게 도래하는 보편성을 담지할 능력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만 자신의 현실성을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206) 


11. 결론을 맺으며 


- 바울은 어떻게 보편적인 사유가 세계에 퍼져 있는 타자성들(유대인, 그리스인, 여자들, 남자들, 노예들, 자유인들 등등)로부터 동일성과 평등(더이상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없다)을 산출하는가를 세세하게 보여준다. 평등성의 산출, 그리고 사유 속에서의 차이들의 폐기가 보편성의 물질적 표징들이다. 

최근 동일자(Meme)의 산출로 이해되는 보편주의에 맞서 그러한 동일자는 그것의 상징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모두가 죽음에 직면한 육체일 뿐이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평등한 수용소에서 발견했다고 주장되어 왔다. 하지만 그러한 '논법'은 두 가지 주요한 이유에서 협잡이다. 첫째로 프리모 레비나 샬라모프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죽음의 수용소가 매 순간마다 터무니없는 차이들을 생산하고, 현실의 극히 미세한 조각마저도 삶과 죽음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로 만들어버리며, 미세한 것의 이러한 부단한 차별화가 고문과도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떄문이다. 둘째이유는 보다 직접적으로 바울과 관련되어 있는데, 힘으로서의 사유(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환기하자)의 필수 조건은 진리의 투사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물론 본인의 정체성을 보편성에서 출발해 규정한다는 점이다. 동일자의 생산은 그 자체가 동일자의 법칙 내부에 있다. 하지만 나치가 집단 수용소라는 인간 도살장을 만든 것은 그와 정반대되는 원리에 따른 것이다. (211) 


- 중요한 것은 시대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시대에 순응해서는 안 된다. 주체가 갖는 믿음의 명령 아래 변화되는 것은 시대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체 자신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 그러한 '갱신'의 열쇠는 사유 속에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비순응적 사유가 시대 속에서 사유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주체다. 순응이 아니라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내재적 예외 안에 있는 것만이 보편적이다.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