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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라캉 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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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자크-알랭 밀레 엮음, <<세미나>>, 새물결, 2008.


타자의 장, 그리고 전이로의 회귀


16. 주체와 타자(Ⅰ) - 소외


*성적 동력학
: 성욕은 두 가지 결여(manque)로 인해 운동한다. 한 가지는 주체가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고유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결함(défalt)이다. 이것은 주체가 타자의 장에 속해 있는 시니피앙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유성생식의 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실재적 결여' 때문에 발생한다. 실재적 결여란 '생명체가 유성생식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하면서 자신의 살아있는 일부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체가 출현하는 순간, 즉 주체가 성에 종속되는 순간 개체로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309-310)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포기한다는 것, 이것은 이 장의 주제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는 '아파니시스(aphanisis)'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아파니시스는 '사라짐의 운동 속에서 주체가 모습을 나타내는 수준에 위치'(314)하는 것이다.


*피아제적 오류
: 아동심리학자인 피아제는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호성이라고 말하며, 아동에게 이 상호성이 결여되는 단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을 '자기중심적' 담화라고 명명하는데, 라캉은 피아제의 의견에 반대한다. 피아제는 아이들이 상대방과 무관하게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라캉은 아이들이 상대방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타자는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이 '무대 뒤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라캉은 피아제적 오류를 통해 주체는 타자의 장에 속해 있는 시니피앙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해석'이라는 것은 이 시니피앙을 지시할 따름이며, 어떠한 시니피앙과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주체는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 피아제적 오류를 대신하는 라캉의 논지는 '벨'에 있다.


*‘벨’
: '벨'은 논리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논리공식이다. 라캉은 이것을 소외(aliénation)의 연산으로서 이용한다. 이 분열은 "한편으로 시니피앙에 의해 생산된 의미(sens)로서 나타난다면 다른 한편으로 ‘아파나시스’로서 나타난다".(318) 다시 말해 주체의 소외는 주체와 의미 사이의 선택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의미 없는 주체를 선택하느냐, 의미를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320쪽 그림을 참고하면, 의미가 타자의 장에 속해있기 때문에 존재의 한 부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돈이냐 목숨이냐"는 문제를 설정하면 벨의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때 돈 없는 목숨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에 목숨을 선택해야하는데, 이것이 인간을 영원한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소외를 야기하는 '벨'은 '죽음'을 욕망한다.


*‘왜?’ 라는 것
: 벨의 첫 번째 연산이 소외를 야기한다면, 두 번째 연산은 '분리'를 보여준다. 소외는 주체와 의미 사이에서 내재적으로 발생한다면,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간파하면서 발생한다. 주체는 타자의 담화를 통해 그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을 포착하려고 한다. 하지만 타자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동시에 주체는 결여를 맞이하며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에 도달할 수가 없다. 주체가 자신의 죽음이나 사라지는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은 주체가 이러한 변증법에 개입되었다는 증거이다. (325)



17. 주체와 타자(Ⅱ) - 아파니시스


*vorstellungsrepräsentanz 문제
: 라캉은 프로이트가 사용했던 Vorstellung(표상)과 Repräsentanz(대표)의 결합인 이 단어를 '표상의 대표자'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단어가 곧 아파니시스, 주체의 분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주체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가 걸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앞서 언급했던 소외의 본질을 보여준다. Repräsentanz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 시니피앙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주체는 시니피앙에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체가 의미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다른 한쪽에서는 사라진다(fading). 다시 말하면 여러 시니피앙 중에 한 가지가 주체를 대표하게 되면, 다른 한 가지의 시니피앙으로 대표되었던 주체는 소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항적 시니피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를 ‘표상적 대표자’라고 번역할 경우에는 모든 시니피앙이 표상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으므로 오독이라는 것이다.
  철학적 관념론이나 심리학은 하나의 표상에 하나의 주체가 깃들여있다는 것을 신뢰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논의를 이끌어나간다. 하지만 그것은 아파니시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주체는 소외라는 근본적인 분열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라캉은 위의 예시를 통해 주체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해야만 의미의 차원에서 나타날 수 있으며, 타자의 욕망에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환유적 구조에 속해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욕망
: 라캉은 데카르트의 사유구조를 분석하면서, 데카르트의 사유에도 아파니시스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데카르트가 “나에게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있다. 이는 나의 행동에 대해 명석하게 보기 위해서이며 이 삶을 확실성을 갖고 걸어가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 것은 명확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는 확실성을 추구하여 주체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회의주의는 벨에 다다르는 길이었으며, 결국 확실성의 추구는 욕망의 차원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끊임없는 의심이라는 고행을 추구한다는 점, 인간의 사유를 분리로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이는 인간주의(humanisme)보다 훨씬 생산적이다. 인간주의라는 개념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인 신을 소환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모든 지식을 보장하려고 한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법은 과학의 중심이 되었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방법을 이용하여 정신분석학의 위치를 과학의 장 안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18.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 최초의 이항체, 선에 대하여


*분석가에게 주어진 신뢰
: 데카르트가 그러했듯이 정신분석에도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가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분석가는 실제로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알고 있다고 가정된 주체의 기능이다. 이 기능, 신뢰가 발휘되는 순간 전이가 시작된다. 사실상 분석이 시작될 당시에 환자들은 분석가를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환자가 분석가를 신뢰하는 지점이 등장한다. 이 지점은 환자가 타자인 분석가의 욕망을 원하는 지점이다. 이 과정에서 욕망하는 것과 욕망하고 싶지 않은 것이 동질의 성격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지점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분석가의 욕망이며 타자의 욕망인 것이다. 분석과정 자체에서 타자의 욕망을 원하는 주체의 모습이 등장한다.


*쾌락 속에서의 소외
: 라캉은 쾌락원칙을 364쪽의 그림처럼 표시하면서 쾌락원칙 안에서의 소외현상을 그린다. 여기에서 Ich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자아, Lust는 쾌락을 유발하는 것, Unlust는 불쾌를 유발하는 것이다. Ich와 Lust가 만나는 접점인 Lust-Ich는 "거울 속의 이미지,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 대상에서 만족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옆에는 Unlust가 항상 존재하고 있다. 쾌락원칙 안에서도 선과 악, 쾌락과 불쾌가 공존하고 교차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동성, 나르시시즘, 양가성 등의 여러 요소들이 쾌락의 변증법을 지배하는 특성이며 동일시(identification)를 향해 나아간다.


19. 해석에서 전이로


*해석
: 주체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시니피앙 사이의 의미화과정은 라캉이 은유로 설명한 바가 있다. 즉 한 시니피앙이 다른 시니피앙을 대체함으로써 의미를 일시적으로 창출한다는 것이었다. 주체는 은유에서 볼 수 있는 시니피앙에 의해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해석이란 이 시니피앙을 분석하는 데에 있어야 한다. "본질적인 것은 주체가 그 의미효과 너머에서 과연 자신이 주체로서 어떤 시니피앙-무의미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트라우마적인 시니피앙-에 예속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380) 인간은 성장과정을 통해 시니피앙의 탈락, 대체과정을 겪게 되며 그때마다 다른 시니피앙에 예속된다. 시니피앙은 무의식과 주체의 관계에 특정한 의미효과를 남기며, 기존의 시니피앙을 무화한다. 그래서 라캉은 "인간은 결국 매 순간 자신이 정복한 모든 것, 말하자면 주체로서 정복한 것을 잊어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383)따라서 타자의 욕망과 만나는 수많은 접점을 찾아내어 주체의 무의식적 욕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분석가의 역할이다.


*사랑, 전이, 욕망
: 전이효과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적인 것이어서 본질적으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을 내포한다. 전이를 환자가 과거에 겪었던 일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분석가의 욕망이나 분석가와 환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호적인 영향은 간과하는 것다. 환자, 즉 주체는 속임수를 사용하여 분석가가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자 한다. 그것은 주체의 욕망이기는 하지만 분석가라는 타자와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주체의 욕망이다. 이는 "타자의 욕망에 의한 절대적 섭정을 인정하는 것"이다.(386)


*동일시와 분리
: 첫 번째 유형의 동일시는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로 Ich의 장에 속한다. 두 번째 유형의 동일시는 단항적 표지로 욕망의 장에 속한다. 욕망의 장은 시니피앙의 지배아래,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장이다. 따라서 단항적 표지의 장은 타자의 장이다.
  자아이상(I-Ideal)은 Lust의 장, 나르시시즘적인 일차적 동일시의 장에서 속해 있다. 한 소녀가 거울을 바라보면서 동일시하는 것은 자아이상, 거울 속의 존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스스로 사랑스럽기를 욕망하는 것이 이상적 자아(Ideal-I)라고 볼 수 있다. 분석의 원동력은 바로 자아이상의 기능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분리과정에 의한 동일시도 있는데, 대상a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대상a는 "충동 속에서 인간의 삶에 성의 의미를 등장시키는 것이 시니피앙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390) 충동의 장에서 본 것처럼 인간에게 성과 그 의미효과는 죽음과 맞닿아 있다. 대상a를 통해 주체는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소외의 본질을 만드는 의미, 즉 욕망의 대상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욕망 대신에 그 주위에 있는 것들을 향하는 것이 충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a를 환각, 환상(목소리, 응시로 대표되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지어야 할 나머지


20. 네 안의, 너 이상의 것을


  분석가의 해석은 모든 것을 의미하거나 모든 것을 무화하지는 않는다. 분석가의 욕망이라는 것은 일반인과 같은 욕망이 아니라 "주체가 최초의 시니피앙에 직면해 처음으로 그것에 복종하는 위치에 오게 될 때 개입하는 그 절대적 차이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이다.(415) 다시 말하면 주체가 동일시하려고 하는(욕망의 대상) 대문자 I와 충동의 대상인 대상a 사이의 거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주체가 어떠한 시니피앙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고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분석가의 역할이다. 욕망하는 것은 실패할 수 없다. 따라서 대상과 일치될 수 있다는 이상화를 떨쳐내는 것, 동일시라는 국면을 뛰어넘는 것이 분석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본질은 속임수이다."(404) 사랑은 주체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주체인 '나'를 이렇게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주체는 "대상 a에 의해 초래된 결여"(407)로 바라보는 지점 또한 지니는데, 이 두 가지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속임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은 종교와 철학이 망각한 것, 욕망의 대상, 응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과학의 장 안에 위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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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소리가 절로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