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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칼 슈미트, <정치적인 것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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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국가와 정치


  칼 슈미트는 1장에서 국가와 정치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채 혼동되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정치적인 것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을 주장한다. 슈미트는 “국가는 오늘날의 용어법에 의하면 어떤 지역적인 일체감 속에서 조직된 국민의 정치적 상태”라는 기존의 정의가 모호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정치적 상태”라는 것이 왜곡되는 한 국가의 개념 또한 정의될 수 없다고 본다. 즉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가 국가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문적인 법률서적에서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말바꿈이 많이 보이는데, 그러한 말바꿈은 논쟁적·정치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한 개별적 사례의 법률적 내지 행정적 처리라는 실무상·기술상의 관점에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즉 법률·행정상의 업무만이 정치적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문화, 종교, 사회, 경제, 학문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것’과 구분할 수 있다.(18세기에서 20세기 사이) 반면에 “국가와 사회가 서로 침투함에 따라서 국가적=정치적이라는 등치는 옳지 못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모든 공동사회는 국가와 동일시되는 ‘전체국가(der total Staat)’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정치적이며, ‘정치적인 것’을 구분할 수 없어진다. 그의 예언은 부르크하르트가 「세계사적 고찰」에서 “민주주의, 그것은 국가와 사회 간의 경계를 말소하고, 사회가 아마도 실행하지 않는 것을 모두 국가에게 요구하고, 더구나 모든 것을 끊임없이 논의가능하고 변경 가능한 것으로서 유보하려고 하며, 마침내 개별적인 신분계층에 대해서 노동과 생존에 대한 고유한 권리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제2장 정치적인 것의 규준으로서의 동지와 적의 구별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궁극적인 구별로서 “적과 동지”를 구별할 것을 제안한다. “고유한 궁극적인 구별”이란 도덕적인 영역, 경제적인 영역, 미적인 영역과 구별되고, 서로 대립하는 규범을 의미한다. 적과 동지의 구별은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가장 强度인 경우를 나타낸다는 의미”이며, 적은 “타인, 이질자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어떤 타인이 이질자라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도덕적 선·악의 개념이나 미·추의 개념은 포함되지 않는다. 슈미츠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정치적인 것의 존재로서의 사실성과 독립성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3. 적대관계의 현상형태로서의 전쟁


  슈미트에 의하면 “동지와 적” 개념은 절대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해야 한다. 자유주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경쟁’이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논쟁’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려고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의제나 규범이 아니라 이 구별의 존재로서의 현실성과 현실적 가능성이다.”


  여기에서 “적”은 경쟁상대나 감정적으로 증오하는 대상이 아닌 공공의 적(hostis)이다. 공적은 국가의 외부에서 투쟁하는 인간 전체를 의미하며, 이 때 “국가는 조직된 정치적 통일체”로서 존재한다. “통일체인 국가”와 그의 적은 정치적인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을 등치시키는 태도는 국가 내부의 대립과 적대라는 제2차적인 ‘정치’개념을 만들어낸다. 즉 정치공동체는 국가와 그 외부의 관계만을 설정해야 하는데, “타락한 정치들의 형태”까지도 ‘정치적’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칼 슈미트는 포괄적 통일체가 약화되고 당파정치적 대립이 더 강도를 지니게 되는 “내란”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그의 개념에서 ‘정치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적대관계’를 통해 내부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본질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현상은 오직 적과 동지의 결속이라는 현실적 가능성과 관련을 가짐으로써만 이해되는 것이며, 거기에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어떠한 종교적·도덕적·미학적·경제적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


  “전쟁”은 적과 동지의 구별 가능성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정치적 수단이다. 전쟁은 실제로 일어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필연성도 지니고 있다. 언제라도 등장할 수 있는 ‘위급한 사태’를 전제로 할 때 인간의 일상생활은 ‘정치적 긴장’을 획득한다.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목적이 아니고, “현실가능성으로서 항상 존재하는 전제이며, 이 전제가 인간의 행동과 사고를 독특한 방법으로 규정하며, 그것을 통하여, 특히 정치적인 태도를 실현하는 것이다.”



제4장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와 다원론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에 목적이 있으며, 스스로를 규정한다. 따라서 한 국가의 정치적인 힘이 전쟁을 저지할 뿐,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의지나 능력을 지니지 못할 때에 정치적 통일체는 붕괴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는 인간생활의 다양한 분야에서 힘을 얻는다. 종교·경제·도덕적 기타의 대립들에서 정치적인 연합과 분리의 강도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인간생활의 여러 분야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순수한’ 종교, 정치, 경제, 문화적 규준이나 동기가 정치와 결합함으로써, 대립이라는 정치적 특성의 지배를 받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 통일체는 모든 결정적인 사태를 장악한다는 의미에서 ‘주권’적이다.


  정치적 통일체는 전쟁의 가능성을 지향하고 대비하며 행동하는 공동체이며 필연적으로 주권을 지닌다. 정치적 통일체만이 주권을 지닐 수 있으며, 적을 상정할 수 있다. 만약 그 통일체의 내부에서 내란이 발생한다면, 그 공동체는 진정한 정치적 통일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키는 다원적 국가론을 근거로 국가와 국가에 대항하는 종교단체나 직업조합을 동격으로 간주하는데 슈미트는 이를 오류로 지적한다. 국가는 결정적인 통일체이기 때문에 교전권을 잃은 교황이나 사회주의 노동조합에 의해 해체될 수 없다. 다원적 국가이론이 국가에 대항하는 모든 종류의 공동체를 국가와 동급으로 간주하는 것은, 국가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통일체는 이익사회나 정치적 단체를 초월하는 것이며 그것들보다 본질적인 것이다.



5장. 전쟁과 적에 대한 결단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통일체로서의 국가에는 교전권이 있다." (55)


  칼 슈미트는 책의 처음부터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 종교, 윤리, 경제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인 것이란 그런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는 가능성이다. "즉, 현실의 사태 속에서 자신의 결정으로 적을 규정하고, 그것과 싸우는 현실적 가능성이다." (55) 그럼 교전권을 가진 정치적 통일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칼 슈미트는 '성전'이라는 이름이든, '계급투쟁'이라는 이름이든, 적을 구별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순간 그것은 모두 정치적인 것으로 수렴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결성된 통일체는 주체적으로 내부의 적도 규정할 수 있다. "프랑스 인민이 그 의사를 표명한 이상, 그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주권 밖에 존재하며, 주권 밖에 있는 자는 모두 적이다." (56)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행위를 결정한 이상, 주권 안에서는 어떤 외부인도 존재할 수 없다.


6장. 정치적 다원체로서의 국가


 
소위 정치적 통일체로서의 국가는 이질적인 타자를 전제로 성립한다. 전지구 혹은 전인류를 대표하는 정치적 통일체란 존재할 수 없다. '인류'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자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타자를 매도할 뿐이다. 정치적인 것에는 적과 동지의 구분이 있을 뿐 어떤 가치판단도 없다. "국가이론은 국가 내적 다원론과 별개의 의미이지만 다원론적이다." (65) 칼 슈미트는 상호간의 투쟁이 사라지는 세계공화국(칸트)을 조소한다. 국가동맹은 독립적인 국가를 상정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질적 적을 외부인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체로 기능한다. "제네바의 국제연맹은 그것이 국가를 해소하지 못하듯이 전쟁의 가능성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68) "보편적인 인류조직으로서의 국제연맹의 경우에는, 첫째로 모든 기존의 인간집단으로부터 교전권을 실질적으로 빼앗고, 둘째로는 더구나 자신의 교전권을 인수하지는 아니한다는 곤란한 작업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69) 주권의 이양, 교전권의 이양, 타자의 목숨을 해할 수 있는 권능의 이양만이 전지구적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는 이 진술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7장. 정치이론과 인간론


  “모든 국가이론과 정치이념은 그 인간학을 음미하고, 그것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본성상 악한」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 「본성상 선한」 인간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71) 슈미트는 모든 국가 이론과 정치 이념은 선악에 대한 판단, 경제에 대한 생각으로 이루어짐을 고발한다. 슈미트가 보기에 정치적인 것은 “타자를 죽일 수 있는 힘(자연상태)”를 전제로 해야 한다. “이 자연상태는 부단한 위험과 협박의 상태이다.” 사회는 합리적 이성이라는 선의 소산이고 국가는 우리들의 악덕의 발현이라는 시선으로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믿음 위에 국가를 무조건적인 ‘악’이라고 규정한다. “즉 적이란 그 살아있는 전체성에서 부정되어야 할 타인으로서 인륜적(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민족이라는 영원한 것」에 있어서의 「절대적 생명」이란 입장에서의 이질적인 것이다.” (75) “인륜상 이러한 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민족의 적뿐이며, 적 자신도 한 민족인 경우에 한정된다.”(75)


  위 문장의 ‘민족’을 ‘정치적 통일체’로 바꾸면 모든 문장은 성립한다. ‘계급’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가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행동을 결의하는 순간 그들은 정치적 통일체로서 ‘국가’가 된다.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 타자의 목숨을 해할 수 있는 능력, 경쟁이라는 이름, 투쟁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기본전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단, 홉스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개인의 존재양식을 의미하는데 반해, 슈미트는 국가(정치적 통일체)의 존재양식으로 투쟁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각각의 이론은 다른 방향을 향하며,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8장. 윤리와 경제의 양극화에 의한 탈정치화


  “자유주의는 어떤 중요한 인간의 활동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자유주의에 의한 중립화와 탈정치화도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다.” (83) 순수하게 논리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이념을 획득할 수 없다. 자유주의적 개념은 사유재산과 개인의 자유를 보호해야 할 의무로서의 국가만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적 개념들은 윤리와 경제라는 이름으로 “침략적 폭력”으로 현실 위에 기능하는 정치적인 것을 파기하려고 한다. 전쟁과 평화라는 상이한 상태는 영원한 경쟁과 영원한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환원되어 정치적인 개념을 오염시킨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도덕, 법, 규제, ‘규범’의 ‘지배’는 항상 구체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