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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및 기고문들

그리스인 조르바 발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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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소개 – 니코스 카잔차키스 

  1883년 그리스 크레타 섬의 수도 메갈로카스트로(이라클리온) 출신. 조부와 부친은 터키지배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카잔차키스는 이런 집안의 영향으로 터키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1990년 크레타에서 터키인 관리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 터키인들에 의해 기독교인 학살이 시작되자 키클라데스 제도 낙소스 섬으로 피신하였다. 

  낙소스 섬에서 프랑스 가톨릭 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고교시절에는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1902년 아테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907년 󰡔동이 트면󰡕이라는 희곡을 발표, 10월에는 프랑스에서 앙리 베르그송과 니체의 철학을 공부한다. 또한 불교에 심취하여 부처를 통해서도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11년 고향 크레타로 돌아와 갈라테아와 결혼, 1925년에 이혼하였다. 1912년 발칸전쟁에 자원하여 육군에 입대하였고, 크레타는 전쟁 승리고 그리스로 편입되었다. 

  1914년 이후 카잔차키스는 끊임없이 여행을 하였다. 여행은 그의 인생에서 방황이자 구원을 위한 목적이었다. 1917년 조르바와 갈탄 광산을 찾기 위해 크레타 해안에서 머물렀고, 그 경험을 󰡔그리스인 조르바󰡕로 집필한다. 󰡔신의 구원자󰡕, 󰡔오디세이아󰡕, 󰡔영혼의 자서전󰡕 등을 집필하였다. 


2.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 - “신체야말로 큰 이성이다”

  서양 철학에서는 오랫동안 신체와 영혼, 육체와 정신을 분리하는 철학을 강조해왔다. 철학자들은 정신이나 영혼만이 참된 진리를 소유한다고 말하고, 성직자들은 그것들만이 불멸하여 천국에 이른다고 강론한다. 한국 축구의 패인을 ‘정신력 부족’으로 몰아붙였던 과거의 해설가들처럼, 철학자들은 사람들의 행동이 정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성직자들은 심판의 날이 오면 영혼에 그 죄를 물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신체는 그들에게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니체와 조르바는 “영혼이야말로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감각과 정신은 도구일 뿐이며, 신체가 전달하는 정보에 귀 기울일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인간의 영혼은 육체라는 뻘 속에 갇혀 있어 무디고 둔한 것(11쪽)"이라던 '나'는 조르바를 만난 이후로 육체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난 별로 시장하지 않아요.”

  조르바가 자기 넓적다리를 탁 치더니 갑자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시장하지 않으시다! 하지만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들지 않았어요? 육체에는 영혼이란 게 있습니다. 그걸 가엽게 여겨야지요. 두목, 육체에 먹을 걸 좀 줘요. 뭘 좀 먹이셔야지. 아시겠어요? 육체란 짐 싣는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두목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나는 당시 육신의 쾌락을 업신여겨 왔다. 가능하면, 먹어도 부끄러운 짓이라도 하는 것처럼 은밀하게 먹어 치웠다. (52) 


  “먹은 음식으로 뭘 하는가를 가르쳐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말해 줄 수 있어요. 혹자는 먹은 음식을 비계와 똥을 만들고, 혹자는 일과 좋은 유머에 쓰고, 내가 듣기로는 혹자는 하느님께 돌린다고 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16, 11쪽.) 


3. 쾌락과 욕망에 솔직하게 대처하는 조르바

  60대 중반의 광부이자 산투르라는 악기의 명인이며, 인생에 통달한 인물 조르바. '나'는 조르바를 만난 후 조르바가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22)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22)였다. '나'는 수도원 안에서 인간의 영혼을 고양하는 장소를 발견하지만, 조르바는 오히려 교회와 제도 안의 위선과 기만을 파악한다. 조르바에게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지 못한 삶은 무의미하다. 욕망은 삶의 원초적 토대다. 생의 도약이다. 조르바의 위대함은 욕망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되 결코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 데 있다.

  나는 생각했다. “여기에서라면 온화하고 맑은 정신이 인간의 수준에 맞는 종교적 경지를 함양할 수 있으리. 험준하고 초인간적인 상정도, 게으르고 방탕한 평지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다운 맛을 잃지 않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곳으로는 더도 덜도 아닌,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이런 곳은 영웅에게도 돼지에게도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인간에게 어울리는 곳이다.” (277) 

  “도대체 이놈들은 다 무엇이오?” 조르바가 역겹다는 듯, 내게 물었다. “사내도 아니고 계집도 아니고. 저치들은 노새요. 퉤퉤! 목이나 매고 뒈지라지!”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에 휘둘리지도 않습니다. 조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한때 그걸 너무 좋아하다 그것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 버렸지요. 그때부터 그것 때문에 괴로울 일이 없어요.” (282) 


4. 오르탕스 부인, 신체에 각인된 전쟁의 기억, 이용된 신체 

  크레타 섬에서 만난 오르탕스 부인은 퇴물 카바레 가수다. 그녀는 크레타가 전쟁 중일 때 수많은 국가의 장교들과 관계를 가지고 평화를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는 순간 버려진 늙은 과부가 된 인물이다. 오르탕스 부인을 처음 만난 조르바는 곧장 그녀가 자신의 황금시대를 떠올릴 수 있도록 돕는다. 조르바에게 여자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들의 외적인 면을 지우고 그들 삶의 정수에 가닿으려 움직인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해보려 하는 것, 미추, 노소, 빈부 등 문명적 가면을 벗겨버리는 것, 그것이 현대에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게 된 조르바의 사랑법이다.

  그 사람들은 그저 웃기만 합디다. 사내란 다 그런 거지. 이들은 영국 파운드, 이탈리아 파운드, 프랑스 나폴레옹, 러시아 루블을 잔뜩 집어 줍디다. 나는 돈을 내 스타킹, 브래지어, 그리고 구두에 잔뜩 넣었지요. 이별하기 전날 밤 내가 어찌나 울었던지 제독들도 불쌍했었나 봐요. 욕조에다 샴페인을 가득 채우더니 날 거기에다 집어넣더군요. 그러고는 날 위로하는 뜻에서 그 샴페인을 퍼 마시더군요. 술에 취하자 제독들은 불을 껐어요. 

  아침이 되어 일어나 보니 내 몸에서는 네 가지 향수 냄새 (바이올렛, 오드콜로뉴, 사향, 파촐리)가 골고루 나는 거예요. 네 강대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을 나는 바로 이 무릎 위에도 올려놓고 이렇게 이렇게 데리고 논 거예요.“ (62) 


5. 니체의 춤, 디오게네스의 정신

  “나는 노보로시스크에서 동광 일을 하느라고 러시아에 가 있었지요. 러시아 말은 대여섯 마디, 일하는 데 필요한 정도밖에 몰랐어요. 예, 아니요, 빵, 물, 사랑한다, 오너라, 얼마요? …… 그러나 나는 러시아 친구 하나를 사귀었지요. 철저한 볼셰비키였답니다. 우리는 매일 밤 항구의 술집으로 갔지요. 둘이서 보드카 몇 병을 까고 나면 세상이 돈짝만 해집니다. ~ 우리는 손짓 발짓으로 대충 합의를 봤어요. 그 친구가 먼저 말을 한다. 내가 듣다가 못 알아먹겠으면 곧바로 <그만!>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그 친구는 벌떡 일어나 춤을 춘다……. 두목, 내 말 알아듣겠어요? 그 친구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춤으로 추었습니다. 나도 똑같이 했습니다. 입으로 하지 못하는 말을 발로 손으로 배로 하고, 괴성을 섞어 질렀습니다. 하이! 하이! 호플라! 호헤이!” (중략)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나는 인생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레를 찾아 내가 배운 것,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깡그리 지우고 조르바라는 학교에 들어가 저 위대한, 저 진정한 알파벳을 배울 수 있다면……! 내가 선택하는 길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내 모든 감각을 완벽히 단련함으로써, 몸이 즐기고 몸이 이해하게 하리라. 달리기를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승마를, 조정을, 운전과 사격을 배우리라. 내 영혼을 육신으로 채우리라, 내 육신을 영혼으로 채우리라. 그리하여 마침내 저 영원한 두 적대자가 내 안에서 화해하게 만들리라. (중략)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조르바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의 길이 옳은 길이다. (109-111)  

6. 제도, 윤리, 종교, 법을 초월하는 자유로운 정신 

  조르바는 전쟁터를 누비면서 모순과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터득한 인물이다. 그래서 조국이나 신, 혹은 이상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제도, 윤리, 종교는 인간을 예속시키고 광적인 열기에 휩싸이게 한다. 조르바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진정한 자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조르바를 지켜보는 '나'는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깨닫는다. '나'는 허무하게 폐허가 된 그리스의 문명도시를 바라보며, 진정한 자유와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이 이룩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참혹한 전쟁에 대하여. 전쟁으로 얻는 자유에 대한 회의>

  “두목,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시오? 터키 놈들의 목을 얼마나 자르고, 터키인들의 귀를 얼마나 술에다 절였는지 뭐 그런 이야긴 줄 아시겠지만, 천만에요, 그 이야기는 아니오. 하고 싶지 않아. 창피하니까.” (중략) “두목, 여기 기적 비슷한 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웃기는 기적이어서 기가 막힐 지경이오. 우리는 반란군이 되어 그 지랄을 했는데, 사기 치고, 훔치고, 죽이고 했는데, 그 덕분에 게오르기오스 왕자가 크레타로 왔답니다. 그러고는 자유라니!” 


  이런 게 자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정열을 품는 것, 황금 조각을 그러모으는 것,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정열을 무찌르고 보물을 사방에 날려버리는 것. 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이상을 위하여, 종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훨씬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의 한계에 이르지 않은 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자유일까? (38-39) 

  <폐허의 도시, 문명의 몰락>

  소도시의 폐허가 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잠시 홀린 듯이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정오, 햇빛이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며 빛으로 바위를 씻어 내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는 위험한 시각이다. 대기는 망령의 함성과 소란으로 가득하다. 나뭇가지가 부러져도, 도마뱀이 달려 나가도, 지나는 길 위로 구름이 그림자를 던져도 알 수 없는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어디를 밟든 무덤이어서 그 아래 망자의 신음이 들려온다. (중략) 

  도처에 조그만 가게, 기름집, 대장간, 목공소, 도자기 공방이 보였다. 교묘하게 설계되고 안전한 위치에 잘 세운 개미탑이었지만 그 개미탑의 주인들은 수천 년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장인의 손에서 떨어진 정은 수천 년 뒤에 미완성 작품 옆에 놓인 채로 발견되었다. 영원한 의문, 허망하고 어리석은 질문(왜? 무엇 하러?)이 가슴에 독소처럼 와 닿았다. 장인의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던 열정이 한순간에 꺾여버린 미완성 항아리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비탄으로 차올랐다.(243) 


7. 지성인과 야만인의 사이에서  

  '나'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앞서 책을 버릴 수 없는 인물이며, 시대정신을 버릴 수 없는 인물이다. 조르바를 동경하고 '조르바'라는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싶지만, 지향점은 계속 어긋난다. '나'는 이론과 현실, 이상과 실천을 조화하는 공동체적 유토피아를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조르바는 그러한 이념적 인간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진창과 같은 현실을 대면하지 않는 혁명이나 이상은 모두 '허깨비'에 다름 아니다.

  <지상의 생활과 하늘의 왕국을 화합하는 유토피아를 욕망>

  “이봐요, 두목. 제발 좀 끼어들지 마시오. 내가 아무리 애써 놓아도 당신이 몽땅 무너뜨리고 말아요. 오늘 인부들에게 한 이야기, 그게 뭐요? 사회주의라고? 개코 같은 소리! 당신은 목자요, 자본주요? 결단을 내리쇼!”

  그러나, 어떻게 결단을 내린단 말인가? 나는 이 양자를 결합하는 희망, 양극이 화합할 길을 모색하여 지상의 생활과 하늘의 왕국을 동시에 얻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생각은 오래 전, 어린 시절부터 가꾸어 온 것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친우회>라는 비밀 단체를 만든 적이 있었다. 내 침실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근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불의와 싸우겠노라고 맹세했다. 손을 가슴에다 얹고 선서할 때는 눈물까지 흘렸던 것이다. 

  유치한 이상이여! 그러나 그런 이상을 비웃는 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친우회 회원들이 뒤에 돌팔이 의사, 삼류 변호사, 저질 식료품 업자, 표리부동한 정치가, 베껴 먹는 저널리스트가 되는 걸 보면 내 가슴은 미어지는 듯하다. 나 자신은 어떤가? 나는 깨닫고 있거니와 이성에 질식당하지 않았다. 하느님을 찬양할진저! 나는 아직도 돈키호테의 편력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낀다. (80)  


8. 최후의 인간, 붓다

  '나'는 크레타에 들어오면서도 붓다에 대한 글을 놓지 못하고 있다. 조르바를 만난 이후에는 붓다에 대한 고민과 붓다의 삶에 대한 성찰을 더욱 깊게 하게 된다. '나'는 20세기 초의 격변, '노동과 행동', '투쟁과 혁명'이라는 이상이 타락해가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놓지 못한다. '나'는 '나'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붓다에 경도된 것이다. 그러나 최후에 '나'가 깨닫는 것은 붓다 역시 하나의 미망이라는 것, 붓다에 대해 쓰는 일 대신에, 내 안에 있는 붓다라는 이상에게서 해방되어, '자기'를 찾는 것이 붓다를 닮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식, 문학에 느끼는 염증>

  나는 다시 시집을 펼쳐 읽어 보았다. 이런 시들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순수시라고! 여기에 인생은 한 방울의 피도 끼어들지 않은 밝고 투명한 놀음이 되어 있었다. 인간의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살과 고통의 절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이런저런 연금술로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버린다면?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이 모든 것들이 이날 아침에는 지적인 곡예, 세련된 협잡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문명이 쇠퇴하는 모습이다. 순수시며 순수 음악, 순수 관념이라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과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은 자신을 구성하는 진흙 덩어리가 정신으로 축소되어 버렸다는 것을.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 나는 소스라쳤다. “붓다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 붓다에 대해 쓰는 일은 더 이상 문학적인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내부에 도사린 무서운 파괴력과 생사를 건 싸움이며, 내 가슴을 고갈시키는 거대한 부정(否定)과의 결투였다. 이 결투의 결과에 내 영혼의 구원이 걸려 있었다. (196) 

9.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승리자일 때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적인 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조르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 날 밤, 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는 굉장한 강풍이 일었지요. 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작 버팀목을 대고 필요한 곳은 보강해 둔 터였지요. 나는 불 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네.’”

  조르바의 이 짧은 이야기에서 나는 강력하고도 맹목적인 필연이라는 것에 맞설 때 인간이 어떤 태도와 어조를 취해야 하는지를 감득했다. (415-416)  

  “조르바 씨, 이야기는 끝났어요, 나와 같이 갑시다.” (중략) 

  “마음이 내키면, 알죠? 마음이 내키면 말이요. 일이야 당신이 바라는 만큼 해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마음이 내키면 칠 거요. 또 노래도 할 거요.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추고.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