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상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죽음은 우리의 삶 안에서 쉽게 겪을 수 없는 현상이자, 불시에 들이닥치는 손님이기도 하다. 스티브 잡스는 죽음이야말로 인간 최고의 발명품이라 말했고, 서양철학사를 돌이켜 보아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선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인간의 삶을 앗아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곁에 존재하며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친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죽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친근한 이미지가 아닐뿐더러 생을 돌아볼 여유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최근 몇 년 간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다가와 있고, 친밀해져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고, 강남역에서 해쳐졌으며 지하철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지금-여기에 서 있다. 최근 사회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고 있다. 이만큼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동질화되는 경험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 이념과 사상을 떠나서 한 개인의 죽음에 통감하고 함께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들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데에 공통의 의견들이 모아지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의 ‘우리’는 타인의 공감에 공감하는 ‘우리’들이다- 우리 앞에 놓인 이 죽음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라는 작품을 통해 공동체에 공통적으로 주어진 ‘죽음’이라는 부조리를 체험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남겼다. 어쩌면 카뮈가 답을 건네줄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며 1947년의 소설을 다시 펼쳐보고자 한다.
<알베르 카뮈와 반항하는 인간>
알베르 카뮈는 한 공동체 앞에 놓였던 무자비한 ‘죽음’ 앞에서 고민했던 사람이다. 카뮈는 1913년 아버지가 군인으로 복무하던 알제리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난다. 다시 말하면 피식민국가에서 태어난 식민지인이였던 셈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한다. 카뮈는 태어나자마자 부조리한 생의 그림자를 밟고 서 있었다. ‘실존’이라는 것은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과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후 평생을 불의에 저항하고, 타인의 생명과 삶에 연대의식을 느낀 자가 알베르 카뮈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행동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카뮈는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인용하며 “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언급함으로써 부조리한 세상과 싸우는 인간을 언급한 바 있다. 반항과 저항이 인간 삶의 조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저항과 죽음인가. 카뮈는 반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편협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현실과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인간적 오만이 펼쳐보이는 그 광경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평가절하하려고 제아무리 애써보아야 헛수고가 될 것이다. 정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이 규율, 불 속에서 통째로 단련해낸 이 의지, 그리고 정면대결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현실의 비인간적인 면 때문에 바로 인간이 더욱 위대해지는 것인데, 이러한 현실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한다는 것은 곧 인간 자신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나는 내게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는 이론들이 어찌하여 설명과 동시에 나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런 이론들은 나 자신의 삶에서 짐을 덜어내준다. 그러나 이 짐은 나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회의적 형이상학이 포기의 모럴과 손잡는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거부를 고무한다. 중요한 것은 죽더라도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지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자살은 삶의 진가를 몰라서 저지르는 행위다. 부조리의 인간은 오직 남김없이 다 소진하고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할 뿐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최극단의 긴장,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하는 긴장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부조리의 추론>, <<시지프신화>>, 책세상, 2016, 84-85쪽.)
반항은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는 자의 도덕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부둥켜안고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반항하는 인간”의 전형을 기록한다. 시지프는 신을 멸시한 죄, 혹은 죽음을 증오하고 회피한 죄,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을 지닌 죄로 무의미한 일에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야 하는 인물이다. 시지프는 거대한 돌을 굴려 산을 올라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만 헤아릴 수 있는 긴 노력 끝에야 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시지프에게는 돌을 굴리는 노동을 견뎌야만 하는 극심한 고통이 부여된다. 하지만 정점에 달하는 순간 바위는 무심하게도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떨어진 바위를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 그것을 시지프는 감내해야만 한다. 카뮈는 이 끝없는 형벌을 다시 수행하기 위해 산비탈을 걸어내려오는 “의식의 시간”에 주목한다. 시지프는 자기 앞에 놓인 고난을 피하지 않는다. 내가 다시 바위를 짊어져야 하는 이유를, 그 당위를 생각한다. 그 바위는 자신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 댓가, 죽음에 저항하고 반항한 댓가이다. 그러므로 “그 바위는 그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무엇에 대항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는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바위 앞의 시지프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비극>을 재현한다. 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에 회피하거나 변명하지 않는 자의 숭고함을 노래한다. 그러므로 카뮈가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은 세계의 운명, 숙명 혹은 죽음을 수용하지 않고 싸우고자 하는 인간을 뜻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인간을 1940년대라는 근대의 시간에 적용한 인물이 바로 카뮈라고 할 수 있다. 카뮈는 그리스 비극 안의 숭고한 인간을 신화 속에 남겨 놓지 않는다. <페스트>와 같은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시간에 적용한다.
중세에 이미 사라졌다고 여겨진 페스트, 이 역병의 창궐로 인해 폐쇄된 도시 오랑. 오랑시의 많은 사람들은 페스트라는 거대한 운명에 굴복하고 만다. 페스트는 몇 세기 전 이미 사라진 유행병이었지만 여전히 유럽 전역에서는 불길한 것들,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는 은유로 사용되어 왔다. 페스트는 인간과 사랑, 희망과 같은 가치를 앗아가는 두려운 괴물로 은유되고는 했다. 카뮈는 이 지점에서 운명을 회피하는 세 종류의 인간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 질병 자체보다는 오랑시의 폐쇄에서 더욱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랑시의 폐쇄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야기했고, 자유를 향한 갈망을 만들어내었다. 카뮈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화자인 리유는 이러한 현상을 두고 “추상적인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추상적인 고통이란 무엇인가. 페스트라는 대상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대상에 덧씌워진 이미지로 인해 고통 받는 자들을 의미한다. 페스트를 맞이하는 오랑시의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과 변화들을 도피, 회피로 표현한 것이다.
종류는 다르나 파늘루 신부 역시 페스트를 직시하기보다는 은유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페스트가 한창이던 때에 집단기도주간을 설정하여 나름대로 페스트와 싸우는 열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첫 번째 강론에서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의 원인을 “오만하고 사악하고 눈먼 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설교한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페스트의 교훈’을 명심할 것을 촉구한다. ‘여러분’은 이 재앙을 통하여 회개할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니, 이 시기를 불행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구원을 찾는 기간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신부의 종교적, 초월적 태도를 “추상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의 심리에 굴복하고 초월이라는 형태로 회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죄 없는 어린 아이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마주한 이후 파늘루 신부의 생각이 변화한다. 그는 페스트는 신의 징벌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실재적 죽음이며, 이유가 없는 부조리한 죽음임을 깨닫는다. 실재적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싸워야 한다는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지며, 이후에 보건대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를 “신의 징벌”로 은유하며 오랑시의 시민들을 회계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죄 없는 어린 아이의 죽음 앞에서 종교적 은유와 삶의 고통 사이에 놓여있는 괴리를 직면하게 만든다. 파늘루 신부는 오랑시의 모든 시민이 하느님의 벌에 처해진, 시험에 빠져들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죽음 앞에서 실존적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고는 죽음 앞에서 평등한 인간, 그리고 그 죽음을 실제적으로 대면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카뮈는 이렇듯 실제적인 문제들 앞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고 추상적으로만 판단하려는 관념들을 타파하고 직접적으로 투쟁하는 인간을 선호하였다. 카뮈가 보여주는 두 번째 유형의 인물은 타루이다. 오랑시의 외지인으로서,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인물인 타루는 시가 봉쇄된 이후에 자원봉사 보건대를 통해 페스트와 적극적으로 싸우겠다고 자원한다. 페스트가 한창이던 시기에 타루는 의사 리유와 함께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한다. 타루는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은 깨끗이 인정하고 쓸데없는 공포들을 쫓아버리고 적합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최우선인 인물이다. 페스트에 대한 관념적인 추론 없이 대항하는 타루의 모습에서 경외와 숭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희망이나 절망이라는 관념이 없고 ‘삶의 확실성’만이 있다. 타루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그 어떠한 부조리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과 닮았다.
붉은색 법복으로 갈아입어 호인도 아니고 다정해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의 입에서 무지막지한 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가 마치 뱀처럼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아버지가 사회의 이름으로 그 사람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것과, 심지어 그 사람의 목을 자르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 당시 직접 그 일을 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건이 종결돌 때까지 지켜본 나는 그 불행한 사람에 대해 아버지는 도저히 느껴보지도 못하셨을 만큼 아찔한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중략)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사형 선고였습니다. 그 빨간 머리 부엉이 씨와 결판을 짓고 싶었던 거죠.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이른바 정치라는 것에 관여했습니다. 페스트 환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죠. 뭐 다른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사형 선고를 기반으로 세워져 있기에 그 사회와 투쟁함으로써 살인 행위와 투쟁하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중략)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을 다 바쳐 페스트와 투쟁한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아 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수천 명의 죽음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의했었다는 것, 숙명적으로 그런 죽음을 야기했던 행동들과 원칙들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죽음을 부추겼다는 것을 알았어요. (중략) 그 고귀한 페스트 환자들, 붉은 법복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경우에 훌륭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일 별 볼일 없는 페스트 환자들이 내세운 불가항력이라는 이유와 필연성을 내가 인정한다면, 결국 거물급들의 요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중략)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더 이상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한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것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를 희망하도록 한다는 것,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편안한 죽음이라도 기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단언하건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각자 자신 안에 페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건데, 왜냐하면 실제로 아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잠시 방심한 사이에 다른 사람 낯짝에 대고 숨을 내뱉어서 그자에게 병균이 들러붙도록 만들지 않으려면 늘 자기 자신을 제대로 단속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 바로 병균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머지 것들, 예를 들어 건강함, 성실함, 순수함 등은 이를테면 의지, 그러니까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의지의 산물이죠. 존경받을 만한 사람, 즉 어느 누구에게도 거의 병균을 옮기지 않는 사람이란 되도록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책세상, 2016, 324쪽.)
카뮈는 타루를 통해서 ‘페스트’라는 질병을 사회 전반적으로 확대하여 보기 시작한다. 타루가 페스트에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페스트를 질병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타자의 죽음, 즉 살인을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 전반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타루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무감하고 당연시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행동에 저항한다. 그리고 그러한 살인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무저항의 인간들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어떠한 종류의 죽음도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타루는 페스트라는 거대한 운명적 죽음 앞에서 저항하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루의 행동은 끊임없이 자신의 죽음에 저항하며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던 시지프의 행동과 동일시된다. 타루에게 페스트는 단순한 질환이나 역병이 아니라 이 사회에 만연한 정서이며 사회적 악이다. 카뮈에게도, 타루에게도 “건강함, 성실함, 순수함(투명성)”은 해이해지지 않는 절대적인 저항의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유, <페스트>의 화자는 이들의 행동을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반항하는 인간”인 타루의 숭고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리유는 그의 행동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성인이나 영웅으로 묘사할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하고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 우리 앞에 실재하고 있음을 잊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불행 그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시민들에게 고통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타루의 삶은 페스트 자체를 자기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리유는 그러한 타루의 생각에 동의하였고, 행동을 통해 부조리와 대결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리유의 태도는 페스트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랑시를 떠난 이후에도 남아있게 된다. 리유는 페스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남아서 언제든 다시 도래할 것을 예비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관찰하고 겪었던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자신들의 운명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서술자의 의도는 이 보건대에 실제로 그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수많은 우리 시민들이 지금 서술자의 입장이 된다면 보건대의 역할을 과장하려는 유혹에 굴복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서술자는 훌륭한 활동에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여하는 것은 결국 악에 대해서 강력하면서도 간접적인 찬사를 표하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들이 그렇게도 큰 가치를 갖는다면 그런 행동들 자체가 드문데다가 사악함과 무관심이 인간들의 행동에 있어 훨씬 더 빈번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라는 점만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서술자가 동의할 수 없는 점이다. 이 세상의 악이란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배움이 없는 선의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다. 인간이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하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덜 무지하거나 더 무지하다. 따라서 우리가 미덕 또는 악덕이라 부르는 것도 바로 그래서이며, 가장 절망적인 악덕이란 전부 다 알고 있다고 믿고 그런 이유로 감히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라는 악덕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이며 가능한 최대의 혜안이 없다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책세상, 2016, 171쪽.)
카뮈는 <롤랑 바르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페스트>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프랑스의 모습을 은유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대책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유럽의 인류가 그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삶의 부조리함,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방관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과정이 지리하고 무의미해 보여도 운명에 저항하고 인간 실존을 지키려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미래에 대한 일종의 희망을 그려내고 있다. 리유와 타루, 파늘루 신부, 그리고 그 외의 다양한 인물들 모두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페스트와 싸우려고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죽음을 당하기도, 이별을 감내해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느슨한 연대”야말로 우리 앞에 놓인 생의 잔혹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고 희망이 됨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