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읽기. 남성의 서사를 여성의 서사로 전유(專有)하는 이야기.
<아가씨>는 크게 세 가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는 대도의 딸인 숙희가 하녀로 분하여 히데코를 속이고 부자가 되려는 계획으로 히데코에게 접근 하는 이야기, 두 번째는 저택에 살고 있는 일본인 히데코가 숙희를 이용하여 자유를 얻으려는 이야기, 세 번째는 숙희와 히데코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백작과 히데코의 숙부 코우즈키를 속이고 탈출하여 자유를 얻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비밀을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거나 실패하는 추리물로 보일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중반까지는 복잡한 추리물이 완성된다. 하지만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화가 가진 힘이 ‘비밀’보다는 ‘솔직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숙희와 히데코는 남성적 질서에 얽매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히데코는 숙부의 가치관과 억압적인 훈육, 권력 아래 복종되어 있으며, 숙희는 남성적 지배에서 비교적 자유로워 보이지만 백작이 제공한 정보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요한 정보는 백작과 코우즈키만이 점유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독립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남성 등장인물들은 히데코와 숙희가 자신의 규칙을 따를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됨으로써 이러한 설정들이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숙희의 방정맞은 성격 또한 극의 초반에서 볼 수 있는 반전에 해당한다. 조신한 ‘조선’의 하녀로 등장할 것이라 예상했던 숙희는 ‘발칙한’ 언어와 행동으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숙희는 백작에게 절대 존대를 하지 않으며, 계급적 차이를 가진 인물들을 대할 때 전혀 기죽지 않는다. 숙희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히데코 역시 백작의 수작이 통하지 않을 만큼 자신만의 고집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영화의 1장에서 히데코는 ‘남자가 젖꼭지를 잡아당겨도 뭘 하자는지 모를 쑥맥’, 즉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로 묘사되지만, 2장에 이르면 탈출계획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핵심적인 인물이었음이 드러난다. 즉, 숙희와 히데코는 백작과 코우즈키의 게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 룰(rule)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남성 등장인물들에게 이 두 사람의 계획은 은밀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숙희와 히데코는 이 게임을 ‘솔직함’으로 풀어나간다. 히데코가 숙희에게 진심을 요구하고, 그 진심을 확인하는 저녁의 벚꽃나무 장면은 이들이 서로의 욕망을 인식하고 백작의 게임에서 벗어나는 통쾌한 장면이다.
<아가씨>에는 세 번에 걸친 숙희와 히데코의 정사 장면이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의 정사 장면인데, 한 번은 두 번에 걸쳐 반복되어 등장하고, 마지막은 숙희와 히데코가 탈출한 이후에 등장한다. 두 사람의 첫 정사 장면은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약간 변형되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숙희가 히데코에게 남자와 정을 통하는 방법을 알려주다가 갑자기 서로의 육체에 빠져드는 것처럼 연출되어 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정사 장면은 히데코의 성에 대한 ‘무지’를 전제로 한 장면이다. 그러나 두 번째 장면에서는 숙희가 코우즈키를 통해서 읽게 된 책들의 내용을 히데코가 전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코우즈키는 음란서적을 제작․판매하면서 남성 고객들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하고 있다. 특히 그 책을 히데코와 그의 이모에게 낭독하게 함으로써 고객들의 상상력을 충족한다. 히데코는 평생에 걸쳐 그들에게 음란서적을 재현하는 매개의 역할, 전시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낭독하는 히데코 자신은 성적인 욕망을 지니지 않다가, 숙희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성적 욕구를 깨닫는다. 이렇듯 두 번째 정사장면에서는 히데코가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성적 유희를 사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히데코의 성적 자기 결정을 최초로 경험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마지막 정사 장면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전달되고 난 이후에, 마치 사족이 달리듯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장면처럼 의도적으로 어색하게 달려 있는 장면인 것이다. <아가씨>의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상 두 사람의 마지막 정사장면이 굳이 필요했는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이러한 어색함이 묻어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김소희의 비평, 「<아가씨> 이야기의 구조적 쾌락을 위해 소비되는 사랑」(씨네21, 2016-6-29)이 정사 장면의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이 글에서는 <아가씨>를 메타 텍스트로 해석하며, 마지막 정사 장면이 관객들을 상대로 한 또 하나의 ‘전시’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아가씨>가 지니는 남성 중심적 위치를 지적함으로써 이 영화의 마지막 정사정면이 히데코가 전시하는 남성들의 성적 도착 이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한계로 꼬집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장면이 여성 해방 서사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돌리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어떨까. 이 장면을 통해 해방의 서사를 읽을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서재 안에서 히데코가 읽어주는 책에 흥분을 느끼는 관객이 될 것인가는 관객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스스로를 정치적 지점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는 후에 표현이라는 공적 영역으로 진입해 실천을 창출하고, 미학적 위계 질서나 유전학적 범주를 대체함으로써 … 준거나 의미의 서로 다른 생산을 위한 기호학적 발판을 만든다.”(드 로레티스, 1986, 10,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문현아 옮김, 경계없는 페미니즘, 여이연, 2005, 169쪽 재인용.)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과 페미니스트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억압받았고, 따라서 우리는 모두 저항한다. 정치학과 이데올로기는 자의식적 투쟁으로 그리고 선택은 필연적으로 그런 분석을 통해 서사화된다.”(찬트라 탈파드 모한티, 같은 책, 173)
두 번째 읽기. 피식민지인의 탈주 판타지
<아가씨>가 한국에서 등장한 급진적인 영화 텍스트가 되는 이유는 시대 배경에 있다. 박찬욱 감독은 <핑거스미스>의 이야기를 한국의 피식민지시대 시기, 즉 일본 군국주의 시대로 가지고 온다.(이 설정은 영화 초반 군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드러낸다. 일상적인 골목에서 군복을 입고 행진을 하는 장면을 통해 적어도 이 시기가 1937년 이후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연출하였다.) 이들 등장인물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일본어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의 상황에 놓여있다. 1930-40년대를 관통하는 이 시기에 이중언어는 감시와 검열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피식민지인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키워드이다. 따라서 이들 관계를 다시 면밀히 검토하면 인물들의 무의식과 그 관계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숙희는 최하층민에 속하는 인물이며, 대도의 딸이었으나 지금은 버려진 ‘조선’의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입혀서 일본의 자식 없는 부부의 집에 입양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히데코가 조선인 고아출신이었지만 일본의 부자집에 입양이 되어서 국적 상 일본인이 되었다는 설정을 보면, 숙희가 무의식적으로 히데코의 돌보미였고, 상징적 어머니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숙희는 백작(하정우 역)과 한국어를 사용하며 말을 놓는 사이이다. 숙희와 백작은 실질적 동업자이지 갑을 관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백작과 숙희는 자신의 신분과 의도를 숨기고 히데코의 집에 들어간다. 백작은 제주도 출신의 하층민이었으나 입신출세의 욕망이 강해 영국유학을 다녀온 백작으로 자신의 신분을 감춘다.
앞서 언급한 대로 히데코 역시 ‘조선인’ 출신이다. 숙부와 손님들 앞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지만 숙희와 있을 때는 한국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숙희와의 관계가 솔직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숙부인 코우즈키 역시 입신출세 욕망이 강한 인물이다. 원래는 중인 출신의 부호였으나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 ‘조선인’ 부인과 이혼하고 일본인과 재혼하였으며, 다시 히데코와 혼인을 하려는 인물이다. 코우즈키의 욕망은 굉장히 비틀린 것으로 묘사되며, 그것이 성적 유희에 대한 집착으로 표현된다. (저택에서 하인 역할을 하는 전 부인인 사사키 부인의 존재도 역시 의뭉스럽다.)
이 인물들 모두가 ‘조선인’이다. 저택 안에는 일본인이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피식민지인이며, 대사나 행동, 소품을 통해 백작과 코우즈키가 지닌 강렬한 욕망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들 모두가 일본어를 사용할 때에는 가면을 쓰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 같은 코우즈키와 백작의 대화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를 혼용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 이들이 가식적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일본인이라는 대타자를 설정하고, 그 욕망을 향해 달리면서 자신의 지배하에 히데코와 그 이모를 두었던 코우즈키는 이중적 억압구조의 중간 부분에 해당한다. 본인도 피식민지인인 동시에 저택 안에 또 하나의 식민지를 두고 있는 셈이다. 이를 내부 식민화(internal colonialization)이라 하는데 근대국가 안에서 권리를 박탈당한 집단에 대한 착취와 지배를 일컫는다.
섹슈얼리티는 이렇듯 소수자를 둘러싼 권력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성에 입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소수자와 하위계층, 권력에 의해 착취당하거나 추방된 존재의 위치를 보여주는 권력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히데코는 피식민자의 위치에 놓인 하위주체이며, 숙희와 히데코의 탈주는 식민지배로부터 탈주하는 이중의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씨>는 최근에 개봉한 <캐롤>이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같은 레즈비언 영화들과 함께 보기 보다는 <감각의 제국>과 함께 놓고 보고 싶다. <감각의 제국>이 식민지인의 입장에서 본 군국주의의 파국이라면, <아가씨>는 피식민지인의 입장에서 본 탈주 판타지다.
세 번째 읽기. 레즈비언 페미니즘
“<아가씨>는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는 퀴어영화는 아니다. “우리 사랑을 인정해주세요”가 아니라 “당연한 건데 뭐가? 왜?” 하는 식으로, 굳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멀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그동안 동성애 문제를 전투적으로 다루고 차별에 맞서 싸운 노력들이 있어서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런 영화가 투자를 받고 스타가 출연하진 못했을 것이다.” <김혜리, 2016-6-6, 씨네21, <아가씨> 본격 스포일러 하는 인터뷰 - 박찬욱 감독에게 묻는다. >
박찬욱 감독은 <아가씨>가 레즈비언의 권리를 외치는 영화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아가씨>가 레즈비언의 이야기라는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최근 연달아 개봉하는 레즈비언 영화들이 한편으로는 여성해방 혹은 페미니즘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역사적으로 레즈비어니즘은 이중의 착취를 전제하고 있다. 이성애자 중심적 사회에 의한 소외, 남성연대에 의한 소외가 그것이다. 레즈비언-페미니즘은 성정치학이 대중화 된 이래로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소외되는 현상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였다. 레즈비언-페미니즘은 이성애 중심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라는 담론에 저항하고,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지배와 종속의 문제로 다룬다.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폭력을 문제시하는 성정치를 펼친다.
히데코와 숙희의 욕망은 저택으로부터의 탈주, ‘조선땅’으로부터의 탈주에 있다. 숙희는 한 몫 챙겨서 ‘이 더러운 조선땅’을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히데코는 이모와 같이 나무에 목을 매달아서 숙부의 욕망을 피해갈 생각이었다. 각자의 탈주 계획을 지니고 있던 이 두 사람이 남성적 질서로 지배되고 있는 저택, 그리고 ‘조선땅’을 벗어남으로써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목표는 페미니즘적이다.
“페미니즘은 스스로를 정치적인 지점으로 정의한다. 단순한 성정치로서가 아닌 일상생활의 정치학으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리고 이는 이후에 미학적 위계질서나 유전학적 범주를 대체함으로써 준거나 의미의 서로 다른 생산을 위한 기호학적 발판을 만든다”.(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따라서 페미니즘은 정치적인 문제이고, 레즈비언-페미니즘은 여성이 직면하는 이중의 억압을 상징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미셸 푸코와 주디스 버틀러의 주장에 따르면 성역할은 젠더화 된다. 다시 말하면 성적 자기 주체성은 사회적 담론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레즈비언-페미니즘은 여성으로서의 자기를 앞장세우기 보다는 ‘젠더화 된 주체’를 인식하고 그것을 벗어던진다. 히데코와 숙희가 ‘조선’을 떠날 때에 남장-여장을 따로 했던 것 또한 ‘사회적 젠더’를 흉내 내었다가 바다 위로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즘의 과제는 남성중심주의, 서구적 근대주의,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등의 획일화된 거대 담론의 함정에서 벗어나 여성들의 정치적 저항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 영화들은 주로 독립적인 여성 주체를 형상화 하는 데에 주력한다.
<아가씨>는 획일화된 거대 담론을 전유하고 탈주함으로써 자유를 선포하는 영화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숙희와 히데코가 넓은 들판을 달려 빛으로 향하는 장면은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할 수 있을 정도로 상징적이다. 그러나 여전히, 2016년의 한국에서 섹슈얼리티적 권력관계를 탈주하고자 하는 서사를 읽어야 한다는 점은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