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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및 기고문들

"광인"의 위대한 승리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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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독일에서 출판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전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다. 한국에서도 1991년에 번역, 발행되어 역시 큰 인기를 얻었으며 2007년 톰 티크베어에 의해 영화화 된 후, 더욱 많은 반향을 얻었던 바 있다. <향수>는 주로 천재성’, ‘악마성이라는 키워드로 해석되어 왔다. 일반인보다 예민한 후각과 향수를 만드는 놀라운 기술로 인한 천재성이 곧 악마성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추측하여 안?-크리스트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주로 해석되었다. 워낙 줄거리가 명료하고 널리 알려진 책이라 그러한 해석에 덧붙일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이나,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 장 바티스트의 천재성이 아니라 보편성에 있다. 장 바티스트는 유난히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천재나 인류의 종말을 고하는 악마가 아닌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장 바티스트는 자아와 타자의 근대적 구분법의 잔혹성이 만들어낸 악마가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 유명한 명제와 함께 주체와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이어진 서구적 근대적 인식체계는 신의 세계에서 인간을 분리해 냄으로써 비합리적 사고방식과 형식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다양성?복합성에 일정한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사회의 주요 역할이 되었다. 이 일정한 질서, 과학적 인식체계, 합리성, 근대성, 주체와 이성 중심의 사고방식 등등은 일종의 정상성 비정상성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신체의 기능은 이성에 비해 훨씬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나마 감각기관중에서는 직관성을 의미하는 시각과 촉각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근대인은 우리 신체의 중요성보다는 사고의 중요성, 증명할 수 있는 공식과의 결합을 최고의 덕목으로 인정하게 된다. (육체와 정신의 중요성에 대한 중요한 논쟁들은 몇 차례나 있었다.)

 

미셸 푸코의 중요한 연구들에 의하면 근대적 인식체계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같은 방식으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들을 배제하면서 살아온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이성적 사고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성적 사고라고 불리는 현대와 같은 기준은 설정한 것은 누구일까. 데카르트 이하 많은 철학자들과 정치인들, 경제인들,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을 조정하고 합당하게끔 하는 편리한 방법으로 윤리와 도덕이 설정된다. 그 과정에서 이성적인 사람과 비이성적인 사람이 구분되고 비이성적인 인간은 광인으로 명명된다. 데카르트 이전, 중세시대 이전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평범한 사람들과 어우러져 자유로운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 비이성적 인간들은 수용의 공간에 모이게 되고, 그 사람들의 존재덕분에 나머지는 정상인의 범주에 떳떳하게 머무를 수 있게 된다. 만들어진 광인. 태초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광인이라는 존재.

 

18세기 프랑스는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주의와 실용적 과학이 인간 감정을 해방시키는 주요 수단으로 작용했다. 산업적, 사회적 진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대, 사실주의와 과학으로의 전환을 환영하고 격려하고 활용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만국방람회의 선전, 노동자위원회의 설립 등. 과학과 실증주의, 자유사상과 유물론은 종교적 신비주의, 검열적 권위주의, 천박함 등을 비판하는 저항의 형식이 되었다. 또한 위생적 과학 과학수술은 강력한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 부르주아들은 공공질서의 와해뿐 아니라 해방된 감정, 고삐 풀린 열정, 창녀와 호색적인 여자들, 파리 하수구 지하에 웅크린 사악함의 폭발, 위험한 계급의 망령이 주는 공포감을 두려워했다. 무엇이 무질서의 원인으로 책임추궁당해야 하는가는 당대의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오스망의 지역개발로 인해 공간과 장소의 활용이 타자를 시각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노동자들 즉 위험한 계급의 야만성과 위험성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레드존(Red zone)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에 큰 영향력을 지녔던 역사가인 미슐레는 문명을 이성, 정신, 서방, 남성이 자연과 물질과 동방과 여성 속에 있는 그들의 기원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그에 대해 권위를 확립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비합리성을 우월한 계몽주의의 합리성으로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시기였음에 분명하다. 더 많은 공간이 물리적으로 개방될수록,강제적 게토화와 인종적으로 부과된 배제의 사회적 관행을 통해 분할되고 폐쇄되어야 했다. 부르주아의 지리적 상상력은 오스망이 개방한 공간들에 사회공간적 배제와 질서를 부과하는 길을 찾으려 한 것이다. 바리케이트라는 분리선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은 도시의 어느 부분이 타자에 속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즉 산업화 이후 근대성의 요구가 폭발적으로 등장했던 시기인 18세기 파리가 <향수>의 배경이다.

 

다시 텍스트로. 18세기 프랑스, 주인공 장 바티스트는 후각이 매우 예민한 인물이다. 그는 온갖 악취가 배어있는 낡은 시장골목에서 쏟아지듯이 태어난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 비천한 곳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라는 존재와는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을뿐더러 어머니의 죽음을 가져온 악마와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죽음직전에 구출되어 고아원에 수용된 어린아이는 또래 친구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 사회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장 바티스트는 인간적인 정이나 형식적 관계형성에 실패하고 향기에 먼저 매료되고 만다. 숲속에 앉아 세상의 아름다움을 처음 접하는 순간의 이 어린아이의 눈과 귀는 곧 후각이다. 타인과의 소통방식이 완연히 다른 상태에서 후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이 소년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한 명의 광인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인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Jean-Baptist Grenoille) 가장 천재적이며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다. 장 바티스트는 18세기에 널리 쓰였던 이름인 세례요한이라는 뜻이며, 프랑스어인 그르누이는 독일어로 두꺼비Krote’ 개구리Frosch’라는 의미이다. 고전적으로 개구리는 더러운 영’, ‘악마를 의미하므로,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라는 의미는 예수탄생을 예언한 세례자 요한 더러운 영’, 즉 신성한 것과 추악한 것의 공존을 담는다.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존재로 해석되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장 바티스트의 존재는 사회적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에 어울리는 운명과도 같이 그의 존재 자체는 일반인들, 정상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태어나자마자 어린 아이를 버린 장의 어머니, 그가 머물렀던 고아원, 무두장이 그리말, 향수 제조법을 알려준 발디니 모두 장 바티스트가 떠난 직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연성이 강한 장면들이지만 장 바티스트의 존재가 익숙하지 않은 낮선 존재이자 공포의 존재가 됨을 시사한다.

 

하지만 일견 장 바티스트의 악마성은 의외로 아주 평범한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일반적인 사람들이 시각과 촉각으로 느끼는 것을 후각으로 느끼는 것, 단지 그것뿐인 것이다. 따뜻한 물, 따뜻한 대지와 풀, , 개구리까지도 모두 후각으로 느낀다. 장 바티스트에게 아름다움이란 눈을 감고 피부와 코끝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었다. 비극적인 것은 18세기 파리의 강박에 가까울 질서에 대한 집착은 자신들과 다른 타자에 대한 감각을 강화했던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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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바티스트는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시각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과 등치될 수 있는 향기. 그에게는 그 여인의 향기가 바로 빛처럼 다가온다. 자두 파는 소녀에게서 맡을 수 있는 복합적인 향기가 장 바티스트에게는 매혹이 된다. 그는 그림자처럼 소녀의 시각과 촉각에서 벗어나 그녀를 뒤따른다. 이 때 장 바티스트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묘사된다. 오로지 한 소녀의 뒷덜미와 어깨에서 흐르는 살의 냄새, 자두의 향긋한 과일냄새, 오후 내내 자두를 파느라 지쳐있던 땀 냄새 등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향기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자두 파는 소녀를 죽음으로 이끌지만, 장 바티스트는 그 경험을 통해서 평생 그 향기를, 자신이 느낀 빛을 간직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파리의 어떤 골목에서도 그 때의 그 향기를 맡을 수 없었던 그는 향수 전문가 발디니에게서 향수 제조법을 배우고, 세상의 모든 존재를 작은 병 안의 향수로 보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비극이 시작이 된다. 장 바티스트는 그 아름다운 향기가 생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잔혹성이 비단 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냐는 좀 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아름다움을 간직하고자 하는 것, 인간의 합리성에 국한하여 세상을 재단하는 것은 다시 근대성의 특성이 아니었던가. 사회적으로 용인된 가치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장 바티스트는 근대적 인간과 대치되면서 그 잔인함을 몸소 드러내고, 우리 사회의 잔인성을 거울과 같이 비추고 있다.

 

그라스로 떠난 장 바티스트는 도시를 찾는 여정에서 자신의 향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한 번도 자각한 적이 없던 그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던 고통을 느낀다. 정작 자신의 욕망을 쫓는다고 생각했던 그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의 아름다움을 쫓느라 자아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발디니가 알려준 완벽한 향수를 만드는 방법에 더욱 치중한다. 그라스에 도착해서 만들게 될 향수는 자신만이 알고 있을뿐더러 자신이 사랑하는 향기를 담고 있을 것이기에 자기 독특의 존재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자신을 드러내줄 향기이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인정해줄 향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다잡는다.

 

그라스에서 그는 여러 가지 향수제조법을 배우고 그 중 가장 적합한 제조법과 재료들을 발견한다. 여기서 재료는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여기서 아름다움의 기준은 외형적인 것에 있지 않다. 장 바티스트의 문법으로는 아름다운 향기가 아름다움을 결정한다. 열 그는 세 명의 여인을 살해하면서 누구도 만들 수 없는 향수를 만들게 되며, 그와 동시에 체포된다. 향수를 완성하는 시점부터 장 바티스트는 예수의 고난의 길과 대비되는 행적을 걷게 된다. 특히 영화에서 강조된 것은 12개의 원액을 모아 하나의 완벽한 향수를 만들어야 하는 과정은 마치 12제자를 연상하게 하고 마지막 한 사람의 원액은 기독교의 완성을 이룬 사도 바울의 역할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향수의 완성과 동시에 체포된 이후 예수의 고난, 본시오 빌라도의 법정 등의 장면을 묘사하고는 곧 그 유명한 절정의 장면으로 넘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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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장 바티스트를 비난하러 형벌의 장소로 모여든 사람들은 오히려 완성된 향수의 향을 맡고 모두 매료된다. 마치 성령으로 강복하는 것처럼 흰 손수건에 향수를 뿌려 사람들에게 던지는 모습은 예수의 안티버전이라고 할 정도로 강렬하다. 장 바티스트의 향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질서유지의 기본들을 헝클어버리는 강렬한 욕망을 자극한다. 이 향수는 여기에서 하나의 은유로 해석된다. 그것은 광기의 자유다. 데카르트 이래 이성으로 묶어버렸던 광기의 자유. 그것이 바로 향수의 향기로 발산되면서 닫혀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셈이다. 교회의 교리로, 윤리로, 법으로, 질서로 갇혀있던 정상인의 광기가 분출된 것이다. 장 바티스트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찬양하고 이성과 합리적 당위성보다는 육체적 욕망에 충실해야만 하는 당대의 광기를 보인다. 여기에서 예수의 모습과 대치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신의 윤리를 현현했다면 장 바티스트는 정 반대의 도덕, 광인의 도덕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 이성적이었던 모든 사람들은 장 바티스트에게 무릎을 꿇는다. 여기에 바로 위대한 광인의 승리가 있다. 위대한 광인의 승리. 사람들은 향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수치를 느낀다. 마치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장 바티스트는 그 현장에서 다시 자두를 팔던 소녀를 떠올린다. 향수를 만드는 과정 내내 그의 몸을 떠난 적이 없는 그녀는 장 바티스트가 마치 예수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그 장면에서 다시 등장하여 그를 심판한다. 완벽한 향기를 만들어 냈기에 그 자두 소녀에게서 인정을 받고 위로받음과 동시에,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고립감을 얻는다. 사라진 사람은 향기로 되살아나지 않는다.결국 장 바티스트는 자신은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 마지막 순간에 깨닫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추악하고 괴로운 냄새가 진동하던 생선시장. 그곳의 사람들에게 자기를 희생하고자 한다. 최초의 사랑, 최초의 사랑받음이자 최초의 희생으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비극적인 이 이야기는 일종의 은유적인 판타지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광인으로 명명되었던 한 개인의 천재성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복수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있지만, 견고한 사회적 질서에 일시적으로 균열을 내는 이 파급력은 우리 사회에서 내던져진 비존재’, ‘비국민’, ‘비정상인의 회귀에 의해서 가능할 것이라는 교훈이다. 장 바티스트를 천재성’, ‘악마성을 지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그러나 보편적이지 않은 소통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고 볼 때에 타자의 명명방식과 오히려 주체들이 설정한 타자에 의해 견고한 규범적, 도덕적 영역이 지배당하는 순간이 지닌 의미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이렇게 <향수>는 근대적 인간의 형성과 그의 역방향을 상상하고 있으며, 영화에서는 동시에 기독교적인 윤리 규범 등을 함께 해체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쾌락의 정원?(1480-1490)에도 <향수>의 한 장면만큼이나 쾌락에 탐닉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긴 바 있다. 세 개의 화폭으로 나뉘어 왼쪽은 아담과 이브가 서로를 만나는 인류 최초의 기원을 담고 있고, 오른쪽은 죽음 이후 지옥의 모습을 묘사한다. 중요한 것은 가운데 지점인데, 이 부분은 쾌락에 탐닉하다 결국 지옥으로 향하게 될 인간들의 군상으로 해석되어 윤리적인 기준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그림은 이후에 인간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로 해석이 되어 윤리적 해석에 대한 반박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의복을 벗어던지고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유토피아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적 윤리의식을 탈각하려는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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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니무스 보스, <쾌락의 정원>(1480-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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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로니무스 보스, <바보들의 배>, (1490-1500)

 

히에로니무스는 비슷한 시기에 ?광인들의 배?를 그렸는데, 이는 광인들이 사회에서 추방당해 이리저리 떠도는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미셸 푸코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광기의 역사>에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미셸 푸코는 헤이로니무스가 담은 이 장면이 광인들이 사회에서 어떠한 취급을 받기 시작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실은 광인들은 다른 이들과 공존했던 존재였고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광인은 처음부터 미친 인간들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어진 존재이며, 그들이 이 사회에 가할 복수는 곧 우리 자신도 그들과 다름없는 미친 존재’, 어딘가에 강박되고 종속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