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3인터내셔널의 성립
제2인터내셔널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적 분파주의에 빠지자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 즉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3인터내셔널을 형성하는 주된 목적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당을 통일시키고 전 세계에 걸쳐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촉진하고 앞당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3인터내셔널의 제1차 총회는 1919년 3월에 개최되었다. 이 총회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평화를 약속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억압을 문제로 삼았다. 뜨로쯔끼는 “식민지의 해방은 메트로폴리스,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결합해야만 가능하며 유럽이 가장 중요하고 식민지의 혁명은 부차적이라”고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식민지 혁명이 계급 혁명의 하위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3인터내셔널은 민족 해방 투쟁이 식민지 해방과 동의어로 간주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가장 핵심으로 삼았다. 즉 민족 해방 투쟁과 식민지 해방 투쟁을 구별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목표를 조화하는 것이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식민지 출신 대표들은 제3인터내셔널이 시행한 표준적 정치 전략의 강요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독자적인 식민지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요구하기도 했다. 스딸린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끼의 중심부와 식민지 출신 대표들의 충돌이 계속되자 결국 대안적 모델에 기초한 입장들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2. 제 2차 총회, 1920년 7~8월
제2차 총회는 1920년 여름에 개최되었다. 볼셰비끼 지도자들은 헝가리에서 공산주의 정부가 붕괴되자 유럽 혁명의 전망에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술탄-갈리에프라는 중앙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무슬림 간부가 레닌에게 동방 국가의 중요성을 알렸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은 결코 동방의 참여 없이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방 국가는 혁명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제국 열강들의 경우는 동방의 식민지를 잃으면 경제적으로 파멸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타국가의 고유한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던 소비예뜨의 정책을 수정하라고 요구했다. 코민테른은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되자 술탄-갈리에프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레닌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와 연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식민지와 피억압 민중과 연대하기를 호소하였다. 이러한 혁명의 노선 변경은 동방의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지배 계급의 압제와 세계 제국주의의 압제라는 이중적 억압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호소력을 지녔다. 제1차 총회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선전 모임”이었다면 제2차 총회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사람들을 혁명적 주체로 전환하려는 급진적인 기획을 추진했다.
제2차 총회의 가장 근본적인 이론적 ․ 정치적 문제는 레닌과 M.N 로이의 논쟁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레닌과 로이는 베르사유 조약 이후에도 평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 민족들과 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을 동등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테제를 명확히 하였다. 따라서 반식민 투쟁은 식민 권력의 제거만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지니고 있는 민족적 ․ 개인적 불평등과 억압의 기초를 타도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의견을 지닌 것이다. 그러나 로이는 부르주아적 해방 운동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레닌은 부르주아적 해방 운동을 혁명운동의 초기에 부분적으로는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로이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 종속과 신식민주의를 불러오는 운동에 불과하기 때문에 혁명적 대중 운동과 단호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이의 이러한 주장은 제국 권력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지역적 민족주의 운동의 위험성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반면 레닌은 식민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보다 농민들의 혁명적 역할이 많은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였고, 해방 후에는 부르주아지 엘리트의 잠재성을 인정하였다. 이는 레닌이 각 국가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전후의 민족 해방 운동에 다층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국에서 발생한 마오의 민족 해방 운동은 맑스주의 원칙이 지역적 조건의 특수성과 부합해야 한다는 이러한 레닌의 주장을 실현한 사례이다.
3. 바꾸총회, 1920년 9월
2차 총회는 바꾸에서 동방 민중 총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바꾸총회는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투쟁에서 공산주의 ․ 중앙아시아의 노동자 ․ 농민과 동맹하기 위한 특별회의였다. 회의의 중요한 목적은 제국주의 열강의 노동자 ․ 민중과 러시아의 통제를 받는 공산주의 노동자 ․ 농민, 그리고 세계의 피억압 민족의 노동자 ․ 농민의 동맹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영국과 프랑스와 미국의 자본주의는 공동의 적으로 규정되었다. 이 연대의 투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을 소탕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연대의 대표들은 식민지 사회에서 농민의 적은 지주와 같은 상층 계급임을 거듭해서 확인했다. 민족주의의 여러 형태들은 이러한 계급의 충돌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식민지 국가에서는 계급 충돌을 세금 징수인과 보채 농민들의 충돌이라고 인식하였지만 실제로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충돌이 많았다. 따라서 회의는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혁명적 농민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확인하였다.
총회의 초기에는 술탄-갈리에프의 의견이 많이 수용되었기 때문에 그가 속해있던 이슬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동맹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술탄-갈리에프가 무슬림적이고 민족적인 형태의 공산주의를 지나치게 고집하자 스딸린을 중심으로 한 소비예뜨는 그를 “민족적 편향”을 이유로 구속하였다. 그리고 1928년 이후로는 무슬림 공화국에 대한 강력한 숙청이 시작되었다.
레닌은 맑스주의 사상이 특정한 문화 안으로 들어갈 때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레닌의 그러한 주장은 바꾸 총회의 근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2차 총회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의 정책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체제를 마련했다.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의 변증법”을 주장한 레닌의 유연성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해방운동에서 다시 표면화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표들은 레닌과 같은 변증법적으로 이용되는 민족주의를 상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비판했던 술탄-갈리에프와 같은 편향적인 민족주의를 실현하였다.
제10장 제3인터내셔널, 동방 민중의 바꾸 총회까지
로버트J.C영,『포스트 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 pp227~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