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아프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 한다.
확실히 죽음을 생각했을 때, 처음 발병을 알았을 때,
종교적 깊이가 생겼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원래도 삶에 집착하지 않았었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약간의 경쟁심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육아에 진심이었고, 가족들과 사람들을 사랑했고,
친절하게 대하려 애썼다.
갖지 못한 것에 욕심을 부린다거나
더 가진 것에 자만하지 않았다.
여력이 된다면 내 힘이 닿는 곳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아프고 난 뒤에도 병을 모두 치료한 뒤에도
나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니 반대로 또 약간 억울한 마음이 든다.
약이 잘 듣지 않아 전절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나,
모든 일이 빙빙 돌아 우회하는 것 같은 불안함.
그런 것들이 지금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하다.
고상하게 늙고 싶다.
물질적인 것, 외향적인 것에 치중하기보다는,
신중하고, 판단을 유보하고, 보다 배려심 넘치는 태도를 가지고 싶다.
외형적으로도 좀 마르고, 느리고, 곱게 늙었으면 좋겠다.
암 치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아'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이제부터라도 개선을 하고 싶다.
병원 영양사도 항암할 때는 가리지 말고 잘 먹으라더니
수술이 끝나니 이제부터는 식단관리하고 체중을 줄이란다.
이미 늘어버린 식탐은 어쩌란 말이지 하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든다.
사실 고상하고 싶은 마음 이면에 누군가를 욕하고 험담하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
내 유투브 재생목록에는 피아노 협주곡 플레이리스트와 심리분석 영상과 함께
연예계 렉카유투버의 영상이 공존한다.
나를 제외하고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재밌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비열한 면모를 숨기며 고상하게 늙을 수는 없다.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 자리잡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읽고, 생각하고, 발설해야 한다.
철학적 사유가 고통스럽고 불편할 수는 있지만, 나를 약간 피곤하게 만들어서라도 인간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잠도 잘 온다.
앞으로 살아갈 40대에는 어떤 용기를 내어 살아야 할 것인지.
그것이 나의 내면과 외면을 고상하게 만들어줄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