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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항암 일기] 연재

[항암 일기 외전] 암환자의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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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차 항암이다. 마지막 사전 항암이란 말이다. 더 이상 사전 항암에 대해 덧붙일 말은 없을 것 같다. (앞에 쓴 글들에는 추후에 내용을 덧붙일 예정이다) 항암 부작용은 점점 더 견디기 어려워지지만, 독성 항암은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해결될 문제다. 짧은 머리카락에서 바람이 느껴진다. 

 

  매번 항암 스케줄은 동일하고, 이걸 처리하는 건 바쁘다. 입원을 일주일 하고 나면 2주차에는 정신없이 아프느라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다. 2주 차가 끝나가는 주말에 멀미가 찾아오는데, 그 멀미만 잘 이겨내면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은 사그라든다. 그러면 곧바로 외래가 잡히고 면역을 확인하는 피검사를 한다. 피검사 수치가 좋다면 4주 차에 입원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나에게 남은 시간은 5일, 그 짧은 시간 동안 밀린 업무와 집안일을 한다. 아이와 본격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때다. 이 5일은 꽤 괜찮은 일상이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씩씩하게 생활할 수 있다. 나는 잘 먹지 못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잘 먹는 편이어서 체중이 줄지 않았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여하튼 일상이 너무 동일하고 바쁘다보니, 수술하기 전까지 항암일기에 적을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외전으로. 

 

  이번에 특이할 만한 점이 있었다면 이사를 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된 집을 얻었다. 물론 남편과 아이의 힘으로 얻게 된 집이었지만, 이 또한 생경한 경험이어서 만족스러웠다. 나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거의 짐만 옮겨놓고 전혀 정리하거나 꾸미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마음이 벅찼다. 스케줄을 잡아 입주 전 이사 준비와 입주 청소, 새 아파트 증후군 예방, 코팅, 짐 정리와 은행 업무를 보았다. 이 많은 걸 어떻게 했나 싶기도 하다. 아까 앞에서 말한 일정에서 그나마 괜찮은 날짜를 잡아서 하나하나 처리했다. 이것이 슈퍼 J의 성향일까. 결국 모두 나쁘지 않게 해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는 이 몸을 이끌고 어쨌든 이사를 했다는 것에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입주 청소를 내가 하겠다고 뻥뻥 소리를 치고, 청소 도구와 연무기를 잔뜩 챙겨 집으로 들어왔다. 천장부터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는데, 딱 30분이 지나고 후회를 했다. 아아. 이래서 업체를 쓰는구나. 업체가 청소해주시면 미흡한 부분만 내가 하면 되는데.... 하지만 이미 그 생각을 할 때는 너무 늦었다. 내가 해내야만 했다. 이틀 안에 청소가 끝날지 의문이었다. 그날은 내가 꽤 아픈 날이었는데 무리해서 간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청소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니까 4시간 만에 꽤 많은 일을 해냈다. 다음날 한 번 더 방문해서 청소를 마무리했다. 입주하고 보니 여전히 닦지 않은 부분이 보였지만, 그래도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아이가 기침을 하지 않는다든가, 나의 비염이 재발하지 않았다든가  하는 것들을 보면서 말이다. 

 

  소파에 앉아서 창밖의 파란 하늘을 보는 순간이나, 새로 산 식탁에서 세 가족이 밥을 먹는 순간에 감격을 느낀다. 지난 일년 반의 환경이 비교적 좋지 않아서였을까, 그냥 식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항암치료를 하면서 우울하게만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모든 일을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니 뭔가 길이 보이는 듯도 하다. 일을 쉬고 있었는데, 요즘 따라 특정 고객들이 일을 좀 해달라며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을 다시 할 수는 없는 실정이어서 거절을 했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주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수술 후에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사후항암은 어떻게 진행될까, 보험금은 문제 없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과 걱정들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런 일상들이 무거운 실존으로 다가온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유유히 일상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조금의 행운과 기쁨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웃긴 건 그렇게 행운과 기쁨을 찾아보려는 나를 방해하는 것들은 못 본 체할 수 있다는 것도 암환자의 특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