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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및 기고문들

칸트 철학에서의 행복과 윤리학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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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행복한 삶의 영위에 대해 고민한다. 조금 더 나은 삶, 가치 있는 삶, 편안한 삶 등등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그에 걸맞은 형태로 삶을 주조하기를 원한다. 행복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영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하나의 이상(理想)’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우선 행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일관된 가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에게 행복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보편적일 수 없기 때문에 한 가지로 정의하기 어렵다. 둘째로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행복은 완성될 수 없는 가치라는 점에 있다. 한 사람이 행복을 위해 어떠한 목표점을 향해 노력하고, 또 그 꿈을 이루었을 때 그 사람은 완전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욕망을 향해 목표가 변경될 것이고, 하나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해서 완전한 만족감을 얻기 어려운 상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것은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떠한 상태를 이르는 것인가. 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고찰이 없다면 결국 인간은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이나 타인의 가치관에 따라 자신의 행복관을 설정하게 될지 모른다. 사실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추구 방법이 아닌가.

 

 

  칸트는 이러한 문제에 엄중하게 대처한다. 칸트는 행복과 윤리의 정의를 대치되는 것으로 보고,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윤리를 지키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윤리나 도덕, 법률과 탁월한 선에 이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개별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그에 반하거나 배제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철학자를 비판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여러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칸트의 윤리적 고찰은 오히려 솔직하게 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이기적인 모습들을 털어내고 솔직하게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가치가 무엇인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타인과 사회와의 공존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고찰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게 할 때에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며 타자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모호하지 않은 행복한 인간의 삶의 모양새를 갖출 수 있을 것이다.

 

 

 

○ 칸트 철학에서 ‘행복’의 의미

 

칸트는 기존 행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행복학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행복 개념이 불확정하다는 것이다. 행복 개념의 모호성과 주관성에 대한 부분은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의무이다. 무릇, 많은 걱정거리와 충족되지 못한 필요들에 휩싸여 있는 자기 상태에 대한 만족의 결여는 대단히 큰 의무를 위반하는 유혹이 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의무에 주의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인간은 이미 스스로 행복에 대한 매우 강렬하고 내적인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 인간은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서의 모든 경향성의 충족의 합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정적이고 확실한 개념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 하나의 경향성이, 그것이 약속하는 것과 그것이 충족을 얻을 수 있는 시기가 확정된 단 하나의 경향성이 흔들리는 이념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스스로 행복하고자 하는 내적인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매우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행복에 이르는 길은 한 가지가 아니고 그 방법조차 다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경향성에 의해서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실천 법칙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경향성은 나 자신의 이익에 유리한 것에 해당한다. 즉 우리가 행복추구라고 말하는 세속적 가치추구는 이익에 유리한 것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 인간은 윤리적 의무보다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경향성을 추구한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평범한 인간 이성은 흔들리고 위협받는다. 행복의 모호한 성격에 의해 윤리원칙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 이성은 더 높은 차원의 원리 원천과 원리의 올바른 규정에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에 대한 완벽한 비판의 필요성이 요구되며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으로 연결된다. 경향성을 압도하고 경향성을 배제하는 것은 이성적 존재자이자 탁월한 선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꼭 도덕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 칸트의 두 번째 문제제기가 있다. 모든 인간의 이성은 경향성의 충족으로서의 행복에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 이성은 도덕적 법칙을 추구할 때 완전함에 도달한다. 따라서 비도덕적인 행동으로는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충족감을 겪지 못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욕구능력의 감각에 대한 의존성을 일컬어 경향성이라고 하며, 경향성은 그러므로 항상 필요를 실증한다. 그러나 우연히 결정될 수 있는 의지의 이성 원리에 대한 의존성은 (이해)관심이라 일컫는다고 언급하면서 인간은 도덕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성이 본래적 역할로서 선의지를 세우려는 순수 실천 이성의 활동을 확인하고, 이러한 활동 속에서 이성이 자기 방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지점이 실천이성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칸트의 세 번째 문제제기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의 의지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인간의 자연본성은 그렇게나 존경할 만한 이념을 자기의 규정(規程)으로 삼을 만큼 충분히 고귀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준수하기에는 너무나 나약하며 그리고 법칙 수립에 쓰여야 할 이성을 단지 경향성들의 관심을 그것이 개별적인 것이든, 고양되어 상호 아주 잘 화합할 수 있는 것이든 간에 돌보게 하는 데에 사용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도덕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경향성의 모호함, 불확실성에 의해 흔들리고 그것을 추구하면서 흔들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의지와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진정으로 욕구하는 것을 탐색하고 추구하기보다는, 타율에 의존함으로써 비도덕적인 세상의 욕망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가 됨을 경계한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칸트는 사람들이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쉽게 답하기를 좋아하는 기존의 행복주의자들을 비판하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행복론을 경계한다. 칸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윤리학에서 경험적 부분은 실천적 인간학’, 이성적 부분(선험적 부분)도덕학(Moral)’(형이상학)으로 구분하고, 올바른 인간성을 추구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는 필요를 찾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칸트는 경험적 부분과 이성적 부분을 구분하고,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씻겨진, 순수도덕철학을 마련해야 하는 극단적 필요성을 찾게 된다. 다시 말해 절대적 필연성을 동반한 순수한 도덕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윤리학의 필요성 - ‘선의지’의 의미

 

 

  ‘이성이 선행되고 그 뒤에 실천이 뒤따른다면 인간 이성과 행위의 모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칸트의 논리는 이제 이성적 부분인 도덕학으로 향하게 된다. 칸트는 경험을 벗겨낸 순수한 도덕적 의지가 존재한다는 점을 가정하고, 이 선의지의 존재가 인간의 이성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선의지는 순전한 의지의 절대적 가치인 것이다. 칸트는 어쩌다 운이 좋아 선하건, 행운이 있다거나, 행복하다고 하더라도 보편적합목적적인 선의지가 없는 곳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선의지는 행복할 만한 품격(자격) 있음의 필수불가결한조건이 된다. 이는 칸트 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생과 행복을 향유하려는 의도에 매이면 매일수록, 인간은 점점 더 참된 만족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참된 만족이란 앞선 칸트의 행복개념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의 완전성’, ‘완전한 충족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존재자가 행복추구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유기체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기체, 다시 말해 생명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조직된 존재자의 자연적 소질에서 우리가 원칙으로 상정하는 바는, 이런 존재자에게는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하고, 그것에게 가장 알맞은 것 외에는,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과 의지를 가진 한 존재자에게 있어 그것의 보존과 번영이, 한 마디로 그것의 행복이 자연의 본래 목적이라고 말한다면, 자연은 이러한 자기의 의도의 실행자로 그 피조물의 이성을 선발하는 매우 나쁜 조처를 취한 셈이다. (중략) 존재자의 행복은 유기체의 원칙에 어긋난다. 존재자의 합목적성 자체가 완벽하기 때문에 (중략) 행복추구라는 실천에 의해 망가질 것.

 

 

  이에 따르면 선의지는 실천에 이르기 전 존재자의 자연적 소질에 해당하며, 가장 자연스럽고 순수한 의지에 해당한다. 이는 이성적 존재자가 선의지를 선호하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선의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선한 것이고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무조건적인 선의 가치를 내포한다. 그리고 칸트에게 행복은 이러한 선의지와 상충되고 선의지의 실현을 방해하는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칸트가 선의지를 도덕성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욕구, 경험, 쾌락과 같은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선의지 때문에 인간은 선의지로부터 독립해서 세속적 행복이나 쾌락만을 쫓을 수는 없는 존재가 된다. 선의지를 저버린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행복이라는 개념이 가진 한계이며, 인간의 관심이 도덕성으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이러한 선의지를 실천하며 살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적 세계와 실천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실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선의지를 온전하게 추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의지란 이성이 경향성에 독립해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다시 말해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들은 반드시 이성에 합당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선의지가 실천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지시명령이 필요하다. ‘명령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성질상 그에 필연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 강요)를 고지한다.

실제로 행복하자는 의도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 이 행복을 촉진하기 위해서 실천적 행위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 발생하는 명령은 가언명령이다. 가언명령은 자기 자신의 최대의 안녕을 위한 수단을 선택하고 영리를 취하는 데에 이용하기 때문에 선한 본질을 추구하지 못한다. 칸트는 이러한 가언명령의 노예가 되면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보편적인 인간의 경향성 및 필요들과 관련 있는 것은 시장가격을 갖는다. 필요와 상관없이, 어떤 취미나 순전히 무목적적인 유희에서 우리 마음 능력의 흡족함에 따르는 것은 애호가격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가 있는 그런 조건을 이루는 것은 한낱 상대적 가치, 다시 말해 가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적 가치, 다시 말해 존엄성을 갖는다.

 

 

  위와 같은 칸트의 지적은 매우 엄중하며 현재에도 적용되는 지적이다. 인간의 경향성, 다시 말해 대중적 행복론을 지향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이며, 자기 스스로의 목적을 이루기보다는 타율에 의한 목적을 추구하게 됨을 의미한다. 대중적 행복주의를 따르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존엄과 존경, 자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율에 의한 상대적 가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상태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각, 사회의 필요에서 독립하여 스스로가 목적자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칸트는 이를 정언명령으로 설명한다.

 

 

  정언명령은 이성세계에 존재하는 선의지를 행동으로써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언명령은 어떤 행위가 선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명령이다. 이 명령으로 인해 인간은 절대적 가치를 행위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탁월한 선이 나타날 수 있다.

 

 

 

○ ‘탁월한 선’의 의미

 

 

  칸트는 인간이 임의적 사용을 위한 수단으로 실존할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단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재적 의미로 본다면 자본주의 내에서의 상품으로서의 인간이 됨을 말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고 욕구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가 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려는 경향 자체는 인간을 궁극적인 행복으로 이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은 곧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도덕성윤리성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과 괴리되지 않는다.

 

 

  이성적 존재자, 즉 인격이 되기 위해서는 정언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정언명령은 나는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어야만 할 것을 나 또한 의욕할 수 있도록 오로지 그렇게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의욕하는 것이 곧 보편적인 법칙과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언명령은 이성적 세계에서의 법칙이 실천적 세계와 연결되는 접점을 드러내고 있다.

 

 

  정언명령은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그 가치가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외부의 가치관에 의해 흔들리거나 상대적인 가치를 지녀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선의지에 기반한 것으로 절대적 윤리성을 지닌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이러한 가치는 행위로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세계 안에 있는 의지와 현실에서의 의지행위가 구별된다면 이는 정언명령을 제대로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도 유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보편법칙을 의식하는 것도 완전히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나의 의욕=보편법칙의 공식이 성립해야만 윤리적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조건은 이 모든 활동이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의욕이 자연스럽게 법칙과 일치해야 윤리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할 때에 이성적 행위자로서 인간은 스스로의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언명령은 그 자체로만 보면 오히려 행복한 삶보다는 절제되고 억압된 삶을 추구하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편법칙을 자율적으로 실천하는 데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행복의 개념을 보여준다. 칸트는 의무와 행복의 충돌 사례들, 그리고 준칙과 보편적 자연법칙이 충돌하는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과 도덕의 괴리를 의식하고 있다. 또한 이성의 훈계에 대한 경향성의 저항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법칙과 명령을 따르지 못할 때에 겪게 될 자기경멸과 내적 혐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준칙과 보편적 법칙이 상충하지 않는 선의지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하고 있다고 보며, 이것이 실천원리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율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정직함, 선한 준칙의 준수에 있어 확고함, 동정 및 보편적 자선의 마음을 갖고 싶어 하며, 경향성과의 충돌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실행하지 못할 때에도, 경향성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도덕적 당위를 필연적으로 의욕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될 때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또한 동등한 입장에서 다른 모든 사람의 인간()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게 됨을 증명한다. 이 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얻게 되며, 이러한 이성적 존재자들이 모일 때 목적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 결국 칸트가 말하는 최고선은 도덕성의 필연적 결과로서의 행복’, 즉 도덕적 행복을 의미한다.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가령 다른 의도에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단적으로 이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연은 어디서나 그 소질들을 합목적적으로 배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지는 유일한 선, 전체 선일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최고선이어야만 하고, 여타의 모든 선을 위한, 심지어는 행복에 대한 모든 열망을 위한 조건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 사람들이 제1의 무조건적인 의도를 위해 필요로 하는 이성의 개발(문화)은 항상 조건적인, 제2의 의도, 곧 행복의 달성을 적어도 이생에서는 갖가지 방식으로 제한한다는 것.

 

 

  칸트의 이 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최고선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최고선은 행복에 대한 모든 열망을 위한 조건이다. 이를 위해 이성의 개발이 행복의 달성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이 칸트가 정리한 최고선의 개념일 것이다. 칸트는 최고선을 윤리적 완전성에 대해 이성이 선험적으로 구상하고, 자유의지의 개념과 불가분적으로 연결시킨 이념으로부터 얻어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종합하면 최고선이란 완전히 선험적이고 이상적이며 이념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인간에 의해 현실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개념은 도덕적 목적론과 도덕적 실재론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성과 실천철학의 일치를 이루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고선 개념을 통해 완전한 이성적 인간의 도덕성과 행복의 통일을 이룰 수는 없지만,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순수한 이성인식(윤리 형이상학)과 대중적 실천철학은 칸트에게 대립되는 것이었으나, 사실 도덕성윤리성은 인간 본연에 관심거리로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인간은 실질적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 자유로우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인간이 보편적 윤리를 자신의 준칙으로 삼고, 나와 타인을 동등한 인격자존엄을 가진 존재로 인식할 때에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면면이 모여 목적의 나라를 이룰 때에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본능적인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올바른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기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면 정말로 나 개인은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모든 사람의 같은 행복을 향해 달려 나아갈 때, 잠깐 멈추어 서서 행복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돌이켜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이러한 대중적 시각에서의 행복개념을 통찰하고 의심하며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기존 행복개념은 모호하고 주관적이라는 점, 그리하여 개인적 경향성의 충족에 만족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러한 경향성의 추구 아래에서는 이기적 욕망을 가지고 있어도 경계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경향성을 추구한다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행복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문제적이었다. 경향성이란 곧 나 자신의 이익에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따르다 보면 평범한 인간 이성은 흔들리고 유혹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향성을 배제하고 탁월한 선을 따르도록 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기존의 행복개념은 충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적이다. 칸트는 인간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족감을 갖지 못하며, 도덕성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세 번째는 행복개념은 타인의 욕망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타인의 의지와 경향성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 독자적인 존엄성을 잃게 된다. 따라서 칸트는 절대적 필요성을 동반한 순수한 도덕철학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게 된다.

 

 

  ‘선의지는 경험을 벗겨낸 순수한 도덕적 의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완전히 선험적인 개념이다. 칸트가 선의지를 강조한 까닭은 이것이 행복할 만한 품격 있음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생과 행복을 향유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나 선의지를 추구함으로써, 인간이 완전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선의지는 자연적 소질에 해당하며 가장 자연스럽고 순수한 의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지는 도덕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보편적으로 선의지에 대한 관심이 있으므로 선하려고 하는 의지를 자연적인 본능으로 가지고 있다. 여기서 관심은 의지의 이성원리에 대한 의존성이다. 이는 이성적 존재자가 선의지를 선호하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간은 이런 선의지를 실천할 수는 없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적 세계와 실천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으므로 실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선의지를 온전하게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인간은 가언명령에 의해 행복을 추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가언명령은 자신의 안녕을 추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선한 본질을 추구하지 못한다. 가언명령의 문제점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데에 있다. 가언명령은 보편적 법칙과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장성을 가지며, 상대적 가치를 대표한다. 따라서 대중적 행복론을 지향한다는 것은 타율에 의한 목적을 추구하게 됨을 의미한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상태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각, 사회의 필요에서 독립하여 스스로가 목적자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언명령은 이성세계의 선의지를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법칙이다. 정언명령을 통해 인간은 탁월한 선과 만나게 된다.

 

 

  ‘탁월한 선은 이성이 선험적으로 윤리적 완전성을 구상한 것이며, 자유의지로 실현된 것이다. 인간은 도덕적 당위를 필연적으로 의욕하게 되어 있으며, 경향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목적으로 대하며 윤리와 도덕성을 실천적으로 행동하고자 할 때 탁월한 선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될 때에 인간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의 존엄까지 지킬 수 있다. 이러한 이성적 존재자들이 모일 때 도덕성의 필연적 결과로서의 행복, 즉 도덕적 행복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칸트의 주장이 이성적이고 실현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가져야 할 태도와 방향성을 알려주는 것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요즈음 인문학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현실세계에서의 부도덕, 비윤리가 만연한 세상에서 칸트의 철학은 중요한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은 인간이 보편적 윤리를 자신의 준칙으로 삼고, 나와 타인을 동등한 인격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세계를 살아갈 때 칸트의 이러한 주장을 반드시 기억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