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는 반복될 수 있다.
반복될 뿐만 아니라 더 국소적으로, 더 세부적으로 침투할 수 있다. 더욱 소규모로 더욱 작은 대상을 향하여. 동물, 영유아, 사회적 약자, 여성, 장애인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체주의적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정치가나 기업인 등의 권력자가 아니다. 아주 작은 권력을 가진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손을 뻗어 작은 제국을 형성하고 있다. 그 제국은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직장 내부에, 학교에, 학원에 있다. 그리고 작은 제국은 그 작은 공통점 하나만를 가지고도 쉽게 연합한다. 이제 제국은 국경을 경계로 하거나 인종을 기준으로 형성되지 않고, '우리는 억울한 약자'라는 공통점만 있다면 누구나 소속될 수 있는 공동체로 성장한다. 물론 거기에 '타자'는 없다. 이 제국주의, '작은' 제국주의는 (실제로는 규모가 작지 않다는 의미에서 '작다') N번방의 모습으로 현대사회에 도래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본질이 '잉여존재의 만연'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실업, 인구과잉, 사회적 아노미, 정치적 불안, 개인을 쓸모없는 존재로 만드는 현상들은 모두 전체주의적 해결방식에 대한 유혹을 부추긴다.' 이러한 사회현상에 우리는 모두 노출되어 있다. '인간성'을 당연한 덕목이라 낙관한 탓에 개인으로 내몰려진 '가난한' 사람들은 본질 없는 공동체에 침잠하고 있다. 문제는 성욕이 아니다. 타인의 삶을 조종할 수 있다는 공통감각, 반사회적 행동으로도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공통감각이 이 집단을 끌어간다. 이 암묵적 세계를 묵인할 것인가.
슬라보예 지젝은 전체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체주의는 공식적인 단어에 대한 독단적인 집착에서 연유한다는 것, 즉 웃음내지는 냉소적인 초연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선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그 자체로 대단한 악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악은 종류를 막론한 모든 광신적인 독단주의이며, 특히 그것이 최고선이란 이름으로 자행될 때는 말할 수 없이 그렇다는 것이다."(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p.58)
현대의 청년들이 심취한 이데올로기는 정의justice로 보인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이 전국적으로 히트를 친 이래로, 잘 사는 법에 대해 고민한 세대, 왜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는지를 궁금해 하던 찰나에 국정농단이 가능한 한국사회를 민낯으로 보게 된 세대. 이 세대는 '정의'에 대한 의문과 집착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정의'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를 개인적으로는 취득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정의 개념만을 받아들이고는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기회에 절망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책에 대한 제대로 된 독서가 전제되지 않았다는 합리적 의심이 깔려 있다. 제목만이 그들 머리 속에 있을 것.)
'정의'를 되찾고자 하는 많은 청년들의 사고는 결과적으로 이기주의, 경쟁주의, 엘리트주의로 향하고 있다. '정의를 추구하는 길'에는 느림의 미학, 양보의 미덕, 여유와 웃음이 사라지고, '내'가 더 대우받아야 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만이 만연하다. 인문학은 취업을 위해 문과생이 지녀야 할 덕목으로 간주될 뿐, 삶의 철학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향하는 것은 그들만이 공유하는 작은 전체주의의 세계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금 한나 아렌트의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인간을 만드는가.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습작 및 기고문들
'작은' 전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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