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타자’는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알 수는 있어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음을 강조한다.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타자는 여전히 멀리 존재한다. ‘멀다’는 것은 물리적 거리와 관련되지만 동시에 감정적인 거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때로는 ‘나’ 자신도 나에게서 멀어질 수 있듯이 말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우리 곁에 있는 ‘타자’에 관한 이야기다. 동일성으로 묶여 있다고 여겨지는 국민과 국가, 작게는 마을 공동체, 이웃, 가족이 모두가 사실은 각자의 이질성으로 파편화 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인 셈이다. <채식주의자>는 이어지는 <몽고반점>, <나무불꽃>과 이어지는 연작이다. 이 세 작품을 모아야 한 인물을 해석할 수 있는 구조가 드러난다. <채식주의자> 3부작은 ‘영혜’라는 한 인물을 둘러싼 일종의 담론을 형성한다. 다시 말하면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 명의 타자가 영혜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글이다. 소설의 구조 자체가 기표의 연쇄작용으로 영혜라는 기의가 어렴풋이 드러날 따름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에서 영혜는 스스로 의미가 되지 못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꺼내고는 있지만 의미를 해독할 수 없는 문자처럼 희미하게 표현될 뿐이다. 이 글에서는 남편, 형부, 언니. 세 사람이 ‘해석’하는 영혜에 대한 이야기로 <채식주의자>를 읽고자 한다.
영혜는 왜 채식주의자가 되어가는가.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남편인 ‘나’의 바로 앞에 존재하는 평범한 아내이다. 그는 특별한 매력도, 그렇다고 특별한 단점도 없어보였던 영혜와 결혼했다. 평범하고 말수가 적은 영혜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한 것이 그저 만족스러운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모든 고기를 버리고 채식을 선언한 아내의 낯선 행동에 마주친 후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이해받을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거리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또 영혜는 왜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가. 독자에게서도, 화자에게서도 도저히 ‘이해받을 수 없는’ 영혜는 소설 속에서 남편의 언어를 통해 재현된다.
남편에게 영혜는 너무나도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이다. 그것은 가족들에게도, 의사에게도, 심지어는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남편인 ‘나’가 느끼는 영혜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한 거부감은 과도하게 육식을 거부하는 행동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너무나도 명료해서 ‘비사교적’으로 변해버린 영혜의 태도에 기인하기도 한다. 자신의 승진이 달린 식사자리에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오는가하면, 대화에 참여하지도, 고기가 들은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는 행동은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영혜의 아버지도 역시 영혜에게 분노한다.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에게 분노해 억지로 고기를 입에 집어넣으려 한 아버지의 행동은, 영혜를 자해에 이르게 한다. 영혜를 둘러싼 인물들은 영혜의 ‘광기’를 어쩔 줄 모른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미치광이로 낙인된다.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인 영혜는 사실 자신의 꿈을 통해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서사의 중간에 살짝살짝 등장하는 이 이야기가 화자인 남편에게 전달되고 있는지, 들리기는 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소설 안에서 이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영혜의 목소리는 마치 꿈속의 언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정미숙(<욕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은 여성의 타자성을 드러내기 위한 전략적인 시점 표현이라 지적한 바 있다. 영혜의 목소리는 서사 안에서 연결되지 않고 갇힘으로써 ‘비이성적 화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갇힌 언어’로 영혜는 자신의 입장을 전달한다.
영혜는 꿈속에서 피 묻은 옷을 입은 자신을 본다. 물컹한 고기가 피를 흘리며 매달려 있는 영상도 본다. 행복하게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숨어 피에 뒤덮여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반복되는 이 꿈에서 피 흘리는 고기를 보고 역함을 토로한다. 영혜는 이 꿈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자신의 치부를 희미하게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자신의 손톱과 이빨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공격성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피의 형상, 파헤쳐진 두개골, 맹수의 눈’과 같이 죽은 날고기의 육체성을 끔찍한 이미지로 경험하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남편도, 부모도, 친언니도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라워지는 거지.(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16, 43쪽.)
영혜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공격적인 것들을 혐오한다. 손톱, 이빨, 뾰족한 뼈들. 영혜가 지니고 있는 고통의 원체험은 자신을 물었던 개의 죽음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봤던 어릴 때의 체험으로 드러난다.(52) 자신을 물었던 개를 죽이는 아버지의 행동을 당연하듯 받아들였던 가해자로서의 경험이 어느 날 갑자기 영혜에게 도래했던 것이다. 영혜는 간접적으로 육체의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타자(개)의 죽음에 대한 속죄와 같은 것이었다. 자기 안에 내포되어 있던 폭력성의 존재를 깨닫고 역겨움을 느낀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와 같은, 그리고 기존의 자신처럼 폭력적인 존재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영혜의 도피는 쉽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 영혜의 손에서 죽은 동박새가 그렇듯.
남편은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영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영혜의 목소리는 남편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무난함’이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아내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 거리에 있는 타자가 되어버린다. 영혜에 대해서 ‘나는 모르고 있었다’는 그의 난처한 목소리는 거짓이 아니다.
영혜는 엄밀히 말하면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이 그녀에게 붙인 하나의 ‘기표’일 뿐이다. 이는 이름 짓기로 인한 타자의 단순화를 야기한다.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타자들이 붙인 단순한 기표일 뿐만 아니라 영혜의 목소리를 무시해버린 몰이해를 의미한다. 그러니 영혜는 ‘채식주의자’라는 이름에는 관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으로 영혜를 설명할 수도, 가둘 수도 없다. 영혜의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이 타인에게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자가 되는 것, 어떻게든 폭력의 전이를 막는 것에 있다.
예술적 승화란 이름으로 박제된 영혜, <몽고반점>
<몽고반점>에서는 예술가이자 영혜의 형부인 ‘그’가 영혜를 포착한다. 그는 미디어 아티스트로 비디오로 대상을 촬영한 후에 편집한 작품을 발표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영혜가 가족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육식을 거부하다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자해하는 사건을 벌인 이후 영혜에게 부쩍 관심을 갖게 된다. 게다가 영혜의 엉덩이에 작은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영혜에게서 예술적 영감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예술적 영감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영혜에게 성욕을 느끼게 된다.
형부는 영혜의 남편과 달리 영혜가 ‘정상적’이고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영혜의 남편은 “채식이야말로 그녀가 조금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증거”(85)라며 영혜를 비난하지만, 형부는 그런 영혜가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104)을 발견한다. 그리고 영혜가 지닌 식물적 감각을 제일 먼저 포착하기도 한다. 병원 한복판에 앉아 사람들 앞에서 토플리스 복장을 하고 앉아있던 영혜가 광합성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해한 것도 그였다.
그제야 그는 처음 그녀가 시트 위에 엎드렸을 때 그를 충격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그것이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육체라는 모순, 그 모순에서 배어나오는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 넓은 창으로 모래알처럼 부서져내리는 햇빛과, 눈에 보이진 않으나 역시 모래알처럼 끊임없이 부서져내리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이 동시에 밀려와, 지난 일 년 간 집요하게 그를 괴롭혔던 성욕조차 누그러뜨렸던 것이다. (한강, <몽고반점>, 창비, 2016, 104쪽.)
영혜의 몽고반점에 도착되어 그녀가 자연의 원초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은 그는 자신의 예술적 영감 안에서 자꾸 영혜의 모습을 떠올린다. 온 몸에 흐드러진 꽃을 그리고 한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영혜의 특별함을 확신한다. 절대적 순수성의 구현, 자연과 합일된 식물성 인간의 체현이 ‘그’를 압도한다. 그리고 그 승화 과정에서 영혜에게 자신의 성적판타지까지 투영하고 있다.
<몽고반점>에서는 영혜와 그 형부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처제에게 예술적 욕망,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형부와 영혜의 욕망이 교차한다. 결과적으로 이 두 사람의 욕망이 접점을 이루어 괴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자신의 내면에 있던 폭력성을 발견하고 혼란스러워했던 영혜가 <몽고반점>에 이르러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혜는 형부의 작품을 도우면서 자신이 식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혜는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몸에 페인트되었던 거대한 꽃의 형상을 마음에 들어한다. (118) 영혜는 형부가 그려준 식물그림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절대적으로 포식자가 될 수 없는 무해한 존재, 폭력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가 바로 그 식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온전히 영혜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까. 형부의 성적 욕구는 예술가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그가 영혜를 대상화하지 않고 그녀를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몽고반점이라는 하나의 표식을 토대로 영혜를 성애화 하고 있으며,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영혜에게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혜의 욕망은 당연히 ‘그’의 욕망과 일치되지 않는다. 다만 방법상 접점이 있었을 뿐이다. 영혜의 언니이자 ‘그’의 부인인 인혜는 ‘그’의 왜곡된 욕망을 단번에 파악한다.
영혜는 그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대상화되었다. 타인의 판타지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성적 대상화되는 방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혜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식물이 되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온정주의적 몰이해에서 공동의 경험으로 , <나무불꽃>
<채식주의자> 이래로 영혜는 모든 폭력, 타인을 죽이는 행위에 대한 거부를 지속해오고 있다. <나무불꽃>에 이르러서 영혜는 자신이 식물이 되어간다는 확신을 마친 상태이며, 정신병원에서 식물화 과정을 실행하고 있다. 고기를 먹지 않음은 물론 과일도 먹지 않고 차도 마시지 않는다. 오로지 물만 마시고 햇빛을 쬘 뿐이다. 덕분에 영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말랐다. 영혜는 자신의 오롯한 의지로, 죽어가는 중이다. 영혜의 이러한 열정은 죽음의 파토스로 드러난다. 병원 안의 영혜는 ‘비정상성’의 극단에 서 있다.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도 불분명하고 약도 먹지 않아 치료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혜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유일한 이가 언니, 인혜다.
인혜는 영혜를 사랑하고 걱정하나, 영혜의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타자다. 인혜는 영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함에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인물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해도 끊임없이 영혜의 목소리를 듣는다. 인혜는 영혜의 비극을 막기 위해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인혜는 남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알 수 없었다. 인혜는 남편에게 영혜의 몽고반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이전에 아버지가 영혜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막았다면 이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영혜의 이혼을 막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까를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것도 현재에 이르는 상황을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혜는 영혜가 겪은 일들을 목격하고 폭력이라 인식한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인혜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 인혜의 이해의 폭이 확장되기 시작한다.
영혜 곁을 지키던 인혜는 죽음의 열정을 느꼈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다. 심한 하혈이 있어 죽을 병에 걸린 줄 알았던 인혜는 큰 병이 아니었다는 결과를 받아들고 아쉬워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자기 몸에 큰 구멍이 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인혜는 영혜를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가정 안에서 약자였던 경험, 그리고 가해자로서 자신의 아이를 버리려 했던 경험을 떠올린다. 사실 인혜는 마음 깊은 곳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의 정체성을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혜의 식물화 과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그녀는 꼿꼿하게 물구나무서 있던 영혜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혜는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혜의 몸에서 검질긴 줄기가 돋고, 흰 뿌리가 손에서 뻗어나와 검은 흙을 움켜쥐었을까. 다리는 허공으로, 손은 땅속의 핵으로 뻗어나갔을까. 팽팽히 늘어난 허리가 온힘으로 그 양쪽의 힘을 버텼을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영혜의 몸을 통과해 내려갈 때, 땅에서 솟아나온 물은 거꾸로 헤엄쳐 올라와 영혜의 샅에서 꽃으로 피어났을까. 영혜가 거꾸로 서서 온몸을 활짝 펼쳤을 때, 그 애의 영혼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한강, <나무불꽃>, 창비, 2016, 206쪽.)
강아지의 죽음에 대해 윤리적 고통을 느꼈던 영혜처럼, 인혜도 자신의 아이를 버리려 했던 기억을 회상하며 경험의 동질화를 겪는다. 영혜의 남편과 인혜의 남편이 실패했던 타자의 이해를 인혜는 어렴풋이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인혜는 온정주의적 몰이해의 상태에서 공통의 경험으로 인한 간접적 이해의 상태로 변화한다.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 그리고 죽음의 열정을 실행하려는 동생의 의지를 온몸으로 이해하고 껴안는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영혜의 선택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힘은 공통의 경험을 통해 발휘될 수 있었다.
영혜의 채식주의와 식물화는 모든 자연존재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려는 의지로 발현된다. 이는 영혜가 기존질서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영혜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폭력적 타자들에게 공격을 가하지도 않으며 원망하지도 않는다. 단지 자신의 선택과 변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을 놓아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영혜가 이해한 식물화의 의미였을지 모른다. 또한 모든 폭력과 가해가 자신의 신체에서 단절되고 잘려나가기를 원하는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작가 한강은 오래전 어느 날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한 여자가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가 가만히 그녀를 심어주는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영혜를 재현하던 세 명의 인물이 영혜를 가만히 심어줄 수 있었다면, 그녀는 행복했을까. 그리고 그럴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남아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문화지 <루멘>에 게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