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보다 잘 할 수 있다."
p.22
인간의 축소화가 가져오는 끔찍한 영향을 검토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그 영향은 경제적 세계화와 정치적 다문화주의, 역사적 탈식민주의, 사회적 민족성, 종교 근본주의, 세계적 테러리즘과 같이 기존에 확립된 주제들을 재검토하고 재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현대 사회에서 평화의 전망은 우리가 다원적인 소속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의 넓은 세계의 일반적인 거주자로서 이성적 추론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지 조그만 컨테이너에 엄격하게 감금되어 있는 피수용자로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명석히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이해와 관련해서, (각 나라 내에서든 국제적으로든) 합리적 공중의 목소리가 맡는 역할과 그 효능에 대해 적절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p.53
인간의 정체성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단일의 것이라는 주장은 단시 암시적이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존재를 축소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더욱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하나의 분류 범주만 부각됨으로써 생겨나는 편 가르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식의 비현실적인 주장은 그 방안이 절대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저항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격렬한 분열의 선, 단 하나의 굳어진 선에 반대해 작동하며 서로를 넘나드는 정체성의 다원성에 이 혼란한 세상에서 화합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차이가 독보적으로 강력한 범주의 고안 체계 속으로 좁혀질 때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p.81
무無로부터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며 꽤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는 한 개인이 이전부터 얽혀 있던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그 관계는 의심될 수도, 도전받을 수도 없는 영구적인 것이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발견"의 관점에 대한 대안은(일부 공동체주의 논객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어떠한 정체성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지점에서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연히 어떤 '방해받는' 지점을 점하게 되더라도 선택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택은 무에서 유로 도약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도록 이끌 수 있다. ▶자신이 소수자이기 때문에, 그 정체성 때문에 특정한 입장을 갖게 되었다는 점을 약점으로 여기지 않도록 할 것. 정체성 그 자체가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음. 인간은 상황에 따라 다른 입장을 갖게 될 수 있음. 가급적 더 나은 방향이면 좋겠지.
p.82
사실 풍요로운 정체성을, 오직 우리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장소를 발견하는 일을 통해서만 획득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습득하고 입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체성의 습득, 선택, 입수를 통해 풍요로워지는 정체성
P.84
한 사람의 삶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연고
P.84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논점은 '어떤' 정체성이든지 선택될 수 있는가(이것은 불합리한 주장일 것이다)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실로 대안적인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는지, 혹은 정체성들의 대안적인 조합을 선택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들 가운데 어디에 '우선순위'를 둘지 고려할 실질적인 자유야말로 더욱 중요할 것이다.
'문명의 충돌'을 벗어나는 사유
pp.90-91
사람들은 주로 문명의 구성원(예컨대, 헌팅턴의 범주에서는 "서구 세계"이거나 "이슬람 세계", "힘두교 세계", "불교 세계"의 구성원)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이미 사람들을 단 하나의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의 충돌 논제는 우리가 이질적인 문명들이 반드시 충돌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질문하는 시점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결함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 예를 들어, 이슬람 문명권 사람들은 호전적 문화를 추구한다는 역겹고 추잡한 일반화에 이의를 제기할 때는, 그들이 실제로는 평화와 친선의 문화를 공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판에 박힌 이해를 또 다른 이해로 대체하는 것이며, 게다가 종교에 의해 우연히 무슬림이 된 사람들이 그 밖의 다른 면에서도 기본적으로 서로 유사하다는 암묵적 가정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P.103
서구 국가들이 이라크나 다른 어떤 나라에 민주주의를 "부과할impose"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자주 회의가 있어왔다. 그렇지만 "부과"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는 그러한 형태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서구의 것이라는 소유적 믿음을 함의한다. 즉 민주주의가 오직 서구에서만 태동하고 발전했으며, 그래서 본질적으로 "서구" 사상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와 민주주의의 현대적 전망에 대해 철저히 오도해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p.112
이러한 접근에서 사용된 문명론적 분할은 터무니없을 만큼 조잡한 설명과 역사적 무지에 기초해 있다는 난점이 있다. 각 문명 내에서 무수히 존재하는 유의미한 다양성을 사실상 무시하고 문명들 간의 상호 작용을 근본적으로 간과하는 것이다.
p.111
지난 몇 세기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사상과 지식의 엄청난 발전이 있었던 데 대해 적절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옳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산업혁명을 거치는 동안 서구세계Western World에서 일어난 중요 성취에 대해서는 서양the Occident이 전적으로 그 공적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러한 성취는 인류 문명의 본질을 변형시켰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완전히 외따로 떨어져 눈부신 고립 속에서 발전한 "서구 문명"이 꽃피운 결과라고 추정하는 것은 심각한 환영일 것이다. 이렇게 상상된 고립을 예찬하는 것은 학문과 사고가 다양한 지역의 발전에 의존하면서 진보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정당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서구에서 연마된 사상과 지식이 지난 몇 시게 동안 당대의 세계를 극적으로 변모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을 순전히 서구의 고안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 아마르티아 센의 문명론적 분할에 대한 비판과 문화적 혼성성에 대한 주장은 납득이 되고 이해도 간다. 그런데 느닷없이 역사의 진보성(?), 서구문명의 진보성을 긍정적으로 확정하는 이 문장들에는 약간 의구심이 간다. 문명론적 진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부정적 부산물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당혹스럽네. 더 읽어봐야지.
무슬림에 대하여
p.140
종교와 관련된 정체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정체성을 간과하는 것은 종교적 분파주의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데 있어 문제 있는 방식으로 판명된다 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 (2005년 이라크 총선과 국민투표) 종교적 관례를 넘어서는 열린 대화, 참여적 대화의 기회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투표 과정은 종교적, 민족적 분파와 연결되어 예상대로 분파주의적이었다. ~ 아프간 정부는 공식 정책에서, 종교 정치를 넘어설 수 있는 공공연한 열린 대화와 상호작용을 육성하는 일에 의존하기보다는, 부족 지도자들의 모임과 성직자 회의에 의존하려 했다. 종교적 소속 관계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한 정치적 희생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p.144
우리는 "진정한 무슬림"을 대립과 관용에 대한 신념에 의거해 정의하는 게 과연 가능한지 물어봐야 한다. 이슬람교는 그러한 신념을 요구하지 않으며 그런 신념에 대해 수세기가 넘도록 여러 무슬림들이 매우 상이한 입장을 취해 왔다. ~ 배교 행위는 기본적인 종교적 신념의 문제이자 구체적 실천의 문제이지, 사회적, 정치적 원리를 해석할 때의 올바름이나 시민 사회의 공정성 문제는 아니다. 무슬림 대부분이 끔찍한 시민 행위나 추악한 정치 행위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시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 "무슬림"의 "문제"를 종교나 민족에 국한하여 정체성의 문제로 파악하거나, 정체성의 문제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무의미함, 무가치함, 무쓸모. 예를 들어 테러에 가담한 무슬림을 '배교자'라고 칭하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한 지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문제의 핵심에도 닿지 못한다. 이러한 비판은 '무슬림 정체성의 풍부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는 시민사회의 복권을 주장한다.
p.146
시민사회를 강화하는 일이 크게 요구되는 시점에 종교적 정체성과 대립되는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들을 경시할 때 항상 敗者가 되어왔던 쪽은 바로 시민 사회 그 자체다.
서구와 반서구
반발적 정체성의 발달이 지닌 반저항효과에 대하여. pp.159-160
pp.160-161
반발적 정체성 발달.
결국 비서구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우선적으로 서구인들과 '다르다'는 면에서 규정하도록 이끌린다. 이러한 "타자성otherness" 비슷한 것이 문화적 또는 정치적 민족주의로 특징짓는 다양한 자기규정의 출현 속에서 보인다. 심지어 이런 반발적 관점이 근본주의에 기여하는 양상에서도 보인다.
이런 "비서구적인", 그리고 때로는 "반서구적인" 관점들이 식민지배로부터 단호히 독립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 이 관점들은 철저히 대외 의존적이다. ~ 사로잡힌 정신의 변증법은 지나치게 편향되고 기생적으로 반발적인 자아 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이런 단일한 양식의 사유는 서구에 "복수"하려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 또한 과거와 현재에 감행된 서구 세계의 공격을 떠올리면서 오늘날의 세계에서 정의를 추구하려는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서구를 따라잡고" 싶어 하거나, "서구의 것으로 서구를 제압하고자" 하는, 혹은 "서구인들마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 건설을 시도하는 더욱 긍정적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 개인의 정체성을 타자들과의 관계에 있어 지극히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 탈식민주의 전략 중 '민족주의의 강화'나 '자기정체성 고착회' 경향에 대하여 경계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인들의 전략을 걱정하는 측면이 있는데, 한국의 탈식민주의 경향에서도 참고할 만하다.
맘펠라 람펠라Mamphela Ramphele, 1947~ 참고
p.162
식민화된 정신의 변증법은 서구에 대한 반발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삶과 자유에 무거운 형벌을 부과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반발이 (보복으로 보이는 것을 포함해) 대결을 추구하는 폭력적 형태를 띨 때에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마저 파멸시킬 수 있다. ▶ 마사 누스바움의 견해와 연결
pp.162-163
비서구의 반발적 정체성을 명료하게 표현한 것 중에서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의 옹호를 주목할 만하다. "아시아적 가치"는 동아시아를 옹호하는 많은 이들에게서 나온 개념이다. ~ "아시아적 가치"의 탁월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서구의 주장을 논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 아시아적 가치는 수양과 도리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 이는 서구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반면, 아시아는 질서 있는 행위와 수양된 품행을 고수함으로써 더 잘할 것이라고 서구에 말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아시아적" 주장 또한 서구 강박의 형태를 피하기는 어렵다.
▶ 이러한 센의 주장은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의 입장을 비판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상기한다면 이해하기에 더 수월하다. 문명론적 분할을 거부하고 개개인의 특성들을 혼성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임을 기억하자. 민주주의를 비롯한 많은 긍정적 가치들이 서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기 위해서는 각 문명에 대한 역사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역사는 혼성적이고 복잡하다. 이를 간과하고 피상적, 일원적으로 접근한다면 하나의 집단이 하나의 특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오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pp.172-173
근본주의
일부 비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이 반서구적 성격을 강하게 보이고 있는 것을 두고, 근본주의 운동이 사실상 서구에 깊이 의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비기독교 근본주의 운동은 서구의 관념과 관심에 한결같이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가치와 우선순위를 제시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존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큼은 명백하다. (중략) 어느 누군가의 생명을 서구를 약화시키는 데 바치거나, 그리고 서구에서 실질적 또는 상징적 중요성을 가지는 유명 건물을 폭파하는 데 바치는 것은 다른 모든 우선순위와 가치를 압도하는, 서구에 대한 강박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는 식민화된 정신의 변증법에 의해 크게 조장될 수 있는 선입견의 하나다.
▶ 추가로 서구로 대표되는 미국의 근본주의가 엘리트 중심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도 지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라는 구분을 비판하면서도 '서구'를 지나치게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기존의 사고를 비판하려는 의도라는 것은 알겠지만, 다른 방식의 서술도 고려해야 할 듯하다. 이는 마사 누스바움의 의견과도 연결되는데... 마사 누스바움이 (트럼프가 말하는) '서구'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분석해 놓은 글을 보면, '서구'라는 개념을 해체하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p.174
무슬림이라는 것과 단일의 이슬람 정체성을 가지는 것 사이의 구분이 흐릿한 것은 혼란을 일으키는 수많은 우려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며, 오로지 조잡한 문명론적 범주들에만 의지하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우려들 중의 하나다. 반서구적 사고와 수사에서 반발적 자아 개념이 발생하는 것 또한 이러한 개념적 모호성에 기여하는 것이다. ~ 스스로를 서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타자"로서 이해하려는 경향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다른 요소들보다 자신들만의 '비서구적 정체성'에 더욱 중점을 두도록 하는 효과를 낳는다.
▶ '여성'이라는 것과 '여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동일시 할 때의 문제점. 과 연결해볼 수 있겠다. 여성주의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의 의견'을 한 가지일 것이라고 단정하고 토론에 임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사실 여성주의적 입장을 표한다고 할 때에는 나 개인의 의견을 가지고 토론에 임하는 것이지,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는 없다. 각각의 여성은 각각의 환경과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주장과 의견,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다성성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여성주의는 '한 큐'에 흘러가버릴 것이다.
단일 정체성의 환영
pp.277-278
단일 정체성의 환영은 그와 같은 대결을 획책하는 사람들의 폭력적 목적에 봉사하며, 박해와 학살의 명령자들에 의해 능란하게 양성되고 선동된다. 폭력을 선동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대결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독보적 정체성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일이 호소력 있을 것이라는 점은 놀랍지 않으며, 바로 그러한 환원주의를 추구한다는 사실 역시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명백히 다원적인 소속관계가 있는 세계에서 그런 논제의 터무니없는 순진함을 고려해볼 때, 단일성의 조장이 왜 그렇게 성공적인지에 대해 커다란 의문이 생긴다. (중략) 폭력적 목적을 위해 독보적 정체성을 옹호하는 것은 특정 초점에 맞춰 하나의 정체성 집단을 분리해 내는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더 나아가, 우리가 다른 교제 관계나 소속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된다. 이때 선택적 강조와 선동을 이용한다. 폭력을 양성하는 호전적인 기술은 사유할 자유와 침착한 이성적 추론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기본적인 본능을 일부 끌어들여 사용한다.
p.280
(영향력 있는 문화와 문명에 대한 고급 이론이 지니고 있는) 공동체주의적 사고가 부분적으로는 인간을 "사회적 맥락" 속에 이해하려 함으로써 정체성에 대해 건설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음을 상기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개인을 사회 속에 자리매김하는" 칭찬할 만한 그 과업 속에는 광대한 시각이 잠재되어 있음에도, ~ 인간의 다원적 사회관계의 타당성을 무시하는 형태, 즉 인간의 "사회적 상황"이라는 다중적 특성의 풍부함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하는 형태를 자주 취해왔다. 그런 근본적인 시각에서는 인간을 철저히 축소한 형태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