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노트

미셸 앙리, <야만>

728x90

 

#memo 

인간 감성과 대비되는 자연과학. 

삶과 세계를 주관하는 감성을 배제하는 과학적 접근방식을 일원화하는 현대 이데올로기를 "야만"으로 규정. 

아마르티아 센 글을 읽다가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나서 정리

 

p.15 

삶의 영역에 지식을 복귀시키는 일, 예를 들어 마르크스처럼 "생각은 삶의 한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이론적인 문제도 참으로 자율적이지 않다는 걸 이해하는 일이다. 그 연구 주제에서 주관성을 배제한 갈릴레이의 결단은 오직 지적인 결단만은 아니다. 그 결단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등을 린 건 바로 삶 자체다. 지식의 변화 뒤에 그 원인이나 그 결과로서 자기파괴autodestruction라는 중대한 현상이 출현한다. 이 자기 파괴는 삶의 자기 파괴다. 삶의 자기 파괴는 마찬가지로 문화의 자기 파괴다. 『야만』은 그 현상에 관한 체계적 기술을 제안했다. 그 현상에 관한 공포는 그 현상의 내용과 또한 그 현상의 피할 수 없는 전개에서 나온다. 교양 있는 모든 사람이 '사실' 앞에서 오늘날 느끼는 이 무능력한 비극적 감정은 그 사실이 갈릴레이가 상상한 '아프리오리'에 뿌리를 둔다는 데서 기인한다. 이 '아프리오리'를 철학은 이제껏 진리verite와 선Bien에 관한 앎을 위해 따로 놓아두었다. 진리와 선에 관한 '아프리오리'의 이 앎이 사실은 파토스적인 으뜸드러냄archirecelation 속의 삶 그 자체라는 점, 자기 자신에게 주고 모든 사람을 그인 것으로 만드는 자기 드러냄autorecelation 속의 삶 그 자체라는 점, 바로 삶을 배제하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계획에 살인적인 광기의 성격을 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p.19 

불행히도 그런 전복은 인간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세계에 관해 점점 더 포괄적으로 되어가는 앎이 의심의 여지없이 좋은 것이라면 어째서 그 앎은 다른 모든 가치의 붕괴와 함께 가는가? 그 붕괴는 매우 심각해서 우리 존재 자체를 문제 삼게 한다. ~ 삶 그 자체가 타격을 받았기에 삶의 모든 가치가, 미적인 것뿐 아니라 윤리와 성스러움,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나날을 살 가능성이 비틀거린다. 

 

p.20 

근대 과학과 함께 지식은 엄청난 진보를 했다. 그 결과 지식은 저마다 자체의 방법론과 자체의 개념 체계와 자체의 대상을 지닌 연구의 증식으로 분할되었다. ~ 문제가 되는 건 지식의 통일성이다. ~ 치통이나 기계 수리에는 그 방법이 효과적임이 밝혀지지만, 인간 존재와 그의 운명에 관해서는 여전히 어떤 총체적 전망도 주지 못한다. 

 

p.21 

과학의 팽창과 인간의 폐허. 여기 새로운 야만이 있다. 

 

 

▶ 직선적이지 않은 역사. 과거에 야만의 가면을 덧씌우지 말라. 야만은 현대에 우리와 함께 있다. 

 

 

 

삶의 지식

pp.26-27 

결국 문화란 무엇인가? 삶이 문화의 주체와 그 대상을 모두 이룬다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모든 문화는 삶의 문화다. 곧 삶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행위다. 그 행위로써 삶은 바꾸는 것이자 바뀐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바꾼다. '문화'는 다른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는다. '문화'는 삶의 자기 변화autotransfomaion를 가리킨다. (중략) 문화는 본디 그 자체로 과학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과학의 결과로 생기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삶은 결국 과학 지식의 대상과 혼동되지 않는다. 

 

p.29 

세계는 ~ 확고한 앎을 위한, 고정된 그 어떤 지레 점에도 물지 못한다. 그런데 유럽인의 사고방식을 뒤흔들고 유럽인을 유럽인으로 만들게 될 자연에 관한 갈릴레이 과학을 따르면, 그 주관적 모습의 상대성 넘어 세계의 참 존재를, 그 자체로서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는 오직 시공간적 세계의 추상적 모습만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붙들고자 이 세계에 관한 앎에서 감각 성질과 일반적인 방식으로 주관성에 종속된 모든 것을 배제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 이처럼 개별적인 인상과 그 인상이 일으키는 여러 의견 대신 세계에 관한, 참으로 있는 것에 관한 일의적인 앎이 제시된다. 

▶ 갈릴레이 과학에 대한 비판. 과학이 삶을 일원화한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관점이 삶과 문화를 일원화, 단순화한다. 갈릴레이 과학을 전복한 철학으로 후설 현상학을 언급한다. 인간이나 동물의 몸성corporeite (유형성, 육체성, 신체성 등을 의미)을 통해 구체적인 삶의 방식으로 세계를 느낄 수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p.34 

대상과 관계하고 대상에 이르고자 대상을 향해 자신을 넘어서는 그 가능성이 후설 현상학에서는 바로 '지향성'이다. 지향성은 의식 그 자체의 바탕을, 의식의 나타내고 보여주는 힘을, 곧 현상성 자체를 규정한다. 

 

p.35 

문화의 문제는 그와 상관적인 야만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지식이나 이 지식의 치밀하게 구상된 한 모습인 과학의 지식을 더는 끌어들이지 않는 존재의 차원과 확고하게 관계할 때에만, 삶과 관계할 때에만, 오직 삶과의 관계에 놓였을 때에만 철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삶의 자기 변화가 증대를 목표로 하는 한 그것은 지식에 의존해야 한다. 과학과 의식의 지식, 이것과 다른 지식에 결국 문화는 그 근거를 둔다. 그 지식은 곧 삶의 지식이다. 

▶ 미셸 앙리는 이 '삶의 지식'을 "근본적 주관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밝힌다. p.38

 

p.38 

자기로부터 객관성의 탈자태를 배제하는 지식, 아무것도 보지 않고 보아야 할 아무것도 없는 지식, 반대로 자기에 관한 순수 깨달음의 내재적 주관성과 그 깨달음의 파토스로 이뤄져 있는 지식, 바로 여기 삶의 지식이 있다. 

 

pp.42-43

삶의 지식은 의식과 과학의 지식, 우리가 일반적으로 앎이라 부르는 것에 근본에서 대립하게 된다. 거의 모든 데카르트 주석가, 후설과 특히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의미에서 'cogitato'에는 'cogitatum'이 있다. 의식은 항상 뭔가에 관한 의식이다. 그것은 자기와 다른 것을 드러낸다. 감각과 함께, 예를 들면 뭔가가 깨달아진다. 다시 말해 이 감각 안에, 또 그것을 통해 그 뭔가가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지각은 지각된 대상을 드러낸다. 상상은 상상한 내용을, 기억은 추억을, 오성은 개념을 드러낸다. 그 고유한 지식 안에 반대로 삶은 다른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어떤 타자성도, 그 어떤 객관성도, 그것과 다르거나 낯선 그 무엇도 드러내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에 삶은 삶이다. 왜냐하면 삶이 본디 느끼는 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가 촉발된 것이자 촉발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스스로 자기를 촉발하는 본질을 자기 안에 지니는 모든 것, 그것만이 살아있다. 

▶ 현상학을 설명하는 또 다른 언어. 코기토는 주체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 주관성(?, 이렇게 말할 수 있나)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p.47 

과학이 행하는 추상abstraction은 결국 이중적이다. 먼저 그 자체로서 과학 세계, 곧 관념적 결정을 줄 수 있는 형태만을 그 세계에서 붙들고자 자연의 존재에서 그 세계의 아프리오리a priori에 속하는 감각 성질과 감정 술어를 작용 밖에 두는 것으로서 추상은 과학 세계를 정의한다. 

 

p.50 

나는 삶의 지식을 실천이라 부른다. ~ 반대로 그런 관계가 정의하는 지식을 나는 이론이라 부른다. 

 

p.51 

'활동un faire'은 모든 사회에 그 고유한 특징을 주는 여러 의식儀式으로 표현된다. 사회적 조직화는 겉으로 보기에 객관적인 그 구조화와 함께 그 자체로 실천적이고 절대 주관성의 삶에서, 그리고 오직 그곳에서, 자기 발전 원리와 자신을 지배하는 '법칙'의 원리 또 그 실재성의 장소를 찾는 것의 이론적 보기voir에서 외재적인 표상일 뿐이다. 그 법칙은 의식의 법칙이 아니다. 우리가 사물을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고 그것을 생각하는 방식과 연관된 이론적인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적인 법칙, 곧 삶의 법칙이다. 

 

p.54 

우리 시대 고유한 쇠퇴를 이해하는 일은 어떻게 삶Vie의 쇠퇴 일반이 가능한지를 아는 일을 함축한다. ~ 우리에게 닥친 야만의 특수한 성격을 명백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 ~ 현대의 혼란이 과학 지식과 그것이 낳은 기술의 과도한 발전의 결과로 생기며, 또 그와 함께 과학 지식이 삶의 지식을 거부한 데서 생긴다는 주장은 너무 일반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결국 자세한 보기를 통해 이를 증명해야 한다. 먼저 예술을 거론하겠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과학의 야만이라고 우리가 잠정적으로 부르게 될 것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 

p.79-80

예술은 삶의 표상이다. 삶은 그 본질과 가장 내적인 존재의 의지에 따라서 현상성의 탈자태적인 차원 속에, 곧 세계의 모습 속에 결코 자신을 내보이거나 내놓지 않기에 자신의 고유한 실재성을 세계 안에 드러내보일 수 없고, 오직 비실재적인 표상의 모습으로, '단순한 표상'의 모습으로 자신을 표상할 뿐이다. 여기 왜 예술이 상상에 도움을 청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있다. 상상은 사물의 부재 속에서 사물을 나타내는 능력이다. 왜냐하면 삶의 표상으로서 예술은 삶을 부재로서만, 상상된 것ens imaginarium으로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상상된 것 안에서 삶은 자신을 투사한다. ~ 예술의 비실재성은 결국 원칙에 속한다. 예술의 비실재성은 무한히 자신을 긍정하는 삶이 세계의 어떤 것도 아니기에 세계 안에서는 자신을 긍정할 수 없고, 오직 세계 너머, 세계를 부정하고 세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중략) 

모든 예술 작품은 그 존재의 뿌리를 통해 거기 있는 것을 가로질러 본질적인 부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재에 관해 우리 자신이 그 부재인 것으로서, 또한 세계의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서, 살아있는 것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p.89

과학이 제거하는 건 결국 삶이다. 그리고 삶과 함께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속하고 삶을 가리키는 모든 것이다. 물리 이론이 헤아리는 척하는 감각 성질은 대다수 현상학자의 눈에는 세계와 그 대상에 속하는 초월적인 성질qualites transcendants이다. 대상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대상에 연결된 그것이다. ~ 삶의 세계를 물리 수학적인 관념과 추상의 세계로 되돌리겠다는 과학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착각에 근거한다. 이 착각은 선결적이다. 바로 이 세계의 감각적인 속성이 정확히 과학의 것이고, 과학에 말 그대로 속한다는 착각이다. 

 

p.94 

세계에서 단독으로 있다고 믿고 또 그와 같이 행동하는 과학은 기술이 됐다. 곧 조작과 변형의 전체가 됐다. 다른 모든 형태의 지식을 배제한 채, 삶의 세계와 삶 그 자체와 관계하는 모든 걸 배제한 채 기술은 그 가능성을 과학과 과학이 지닌 이론적 지식에서 얻는다. 

 

p.97 

테크네의 본디 본질은 우리 앞 어딘가, 지적인 공간 속에서 표류하는 관념적인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의 눈으로만 그렇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촉발하는 실천으로서 그 본질은 이 자기 촉발 속에서, 그리고 이 자기촉발을 통해 자신을 결정하고 개별화한다. ~ 유일한singulier 경험의 모습으로 반드시 자기를 느끼고 깨닫는다. 그 경험은 또한 본성에서 개별적인individuelle 경험이다. 자기 촉발의 본질이 자기성ipseite의 본질인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 단일하고 개별적인, 결정된 실천이 바로 우리 몸Corps이다. 

 

p.104 

실천의 사용으로서 세계, 대상Object이 아닌 행위Act로서 세계, 이 세계의 행위는 곧 몸Corps이고 그런 세계는 그 자치로 그것인 것, 지금까지 늘 그것인 것과 관계없는 목적의 침입으로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말하자면 추상의 생산, 화폐의 생산이다. 

 

p.111

삶의 유지와 관계하는 목적론이 교환 가치 생산을 목표로 하는, 말 그대로 경제적인 목적론으로 뒤바뀐 순간에서 교환 가치는 삶과 모든 연결 고리를 잃지 않고 은밀하게 사용 가치에 종속된 채로, 그리고 이를 매개로 살아있는 노동에 종속된 채로 있다. 화폐는 이 노동의 이차적인 표상일 뿐이다. 

▶ "인간의 인간다움을 전복하러 온 근본적인 혁명"으로 비판. 수많은 근대성 비판과 뜻을 같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