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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슬라보예 지젝 7월 강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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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에 지젝 강연록 (정리 1/2)

 

'정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시작하기에 앞서서 제가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너무나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제가 듣기로 저의 저서가 한국에서 비교적 성공했다라고 하더군요. 그러다 보니 제가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런 다문화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가 신뢰한 적이 없었습니다.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또 서로 간에 상호소통이 불가능하다라는 시각이 있었죠. 저는 항상 보편성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영적인 차원의 보편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떤 분투와 어려움에 대한 보편성이죠. 우리 각자 어려움을 갖고 있지만 공통의 영적인 본질을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방, 자유 등을 위한 공통의 분투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보편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어떤 투쟁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의 주최측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 친절하게 저를 소개해 주신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론적인 배경까지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에 대해서 뭔가 소개가 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우리나라 이름과 제 이름까지만 이해하였습니다. 어쨌든 저와 관련된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저의 신념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정확하게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요. 누군가가 상대방을 묘사할 때 어떤 문구가 사용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완전한 이해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분석이론, 라캉이 개발한 정신분석이론에 따르면 이와 같은 간극이 저와 저의 상징적인 정체성간의 갭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저를 이처럼 환대해 주시고 초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까 말씀드린 그런 간극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파라독스의 근간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체성과 상징적인 정체성간의 간극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이런 상징적인 정체성하에서 세 번째로 제가 한국의 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매료되었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기대하는 정도까지는 아닐지라도 저는 한국영화를 좋아합니다.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그런 어떤 정신적인 영화보다는 북한의 스파이가 한국에 와서 사랑에 빠지는 그런 식의 영화를 제가 더 좋아합니다. 예술이 지나친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시간관계상 이제부터 제 본격적인 강연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유머로 시작을 하고자 합니다. 1930년대 말에 할리우드 코미디에 나온 내용인데요. 에리니스트 루비트 이민자와 관련된 것입니다.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합니다. 웨이터가 이렇게 대답하죠. 죄송합니다마는 크림이 다 떨어졌습니다. 우유만 있습니다. 우리는 크림 없는 커피는 없지만 우유 없는 커피만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없는 것. 부정이 바로 그 정체성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변증법의 기본적인 메시지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정체성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우선 그 물리적으로 봤을 때 우유커피가 사실은 크림 없는 커피와 같습니다. 그냥 커피일 뿐이죠. 그러나 둘은 같지 않다라는 것이죠.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 없는 커피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파라독스 역설을 조금 더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다.

 

다른 영화를 인용해 보겠는데요. 여기서 이러한 부제의 에로틱한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는 예가 되겠습니다. 이 에로티즘을 언어로서 활용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에로티즘을 표현할 수 있다라고 봅니다. 제가 예를 들어볼 영화는 영국의 영화입니다. 노동자 계급의 코미디인데요. 여기를 보면 짧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어린 소녀가 남자친구와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 받고 식사 후 남자친구가 이 소녀를 바래다 줍니다. 소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커피 얘기인데요. 내 아파트에 들어와서 커피 한잔하고 갈래. 남자가 이렇게 대답하죠. 그러면 좋겠지만 나는 커피를 안 마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죠. 문제될 것 없다. 나도 우리집에도 커피 없다. 결국 어떤 일도 일어나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중부정이 일어난 것이죠. 나는 커피 안마셔, 나도 커피가 없어. 이것 이상의 어떤 에로틱한 초청이 있을까요? 직접적으로 우리가 예상한 바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커피는 어디까지나 구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농담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이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나중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마는...오늘날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직설적인 거짓말은 아닙니다. 어떤 것이 사실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란 함축적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거짓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함축적인 의미를 주면서 정반대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커피의 예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유가 없는 커피를 주고 있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은 크림 없는 커피를 주고 있다라는 식의 비유이죠. 따라서 이런 식의 함축적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그 메시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유럽을 봅시다. 유럽에서는 심장질환이 한국보다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금융위기 때문입니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긴축조치를 더 많이 강요하면서 임금을 낮추고 보건서비스를 축소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유 없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 라고 지도층이 강요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사실상은 크림 없는 커피를 마시라는 것이죠. 이런 식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려면 각각의 함축적 의미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바로 이와 관련된 것이 저의 첫 번째 메시지가 되겠습니다.

 

헤겔의 담론에서는 이것을 총체성이라고 합니다. 실재하는 것의 총체성 그리고 실재하지 않는 총체성 등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실제 변증법적 분석을 해 보면 핵심은 특정 이벤트를 조화로운 총체성에 넣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말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결국 특정개념 속에 다양한 부정과 실패를 포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오늘의 자본주의를 총체성으로 바라보려면 자본주의가 이상적으로 좋은 시스템이라고만 묘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만을 언급할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보아야하고 또 자본주의가 실패하는 지점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국내외적으로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애플사의 성공을 사람들이 많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모던 디지털 기술의 성공을 보여주는 자본주의 성공사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폭스콘 없는 애플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중국의 공장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러분, 알고 계십니까? 제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일인데요. 폭스콘의 가장 높은 사람이 타이페이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100 만 마리의 동물, 여기서 동물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노동자를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이런 100만 마리를 관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동물원에 가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했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콩고를 예로 들어 보이겠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을 볼까요? 굉장히 끔찍하죠? 콩고공화국의 상황은 굉장히 끔찍합니다. 지금 현재 콩고공화국은 굉장히 많은 자연자본과 광물을 갖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국가 자체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지적으로 전투가 일어나고 있고요. 그리고 지금 분파들이 있죠. 그리고 이 콩고에서는 광물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둘러싸고 지금 이렇게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콩고는 아직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글로벌 자본주의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법치가 부재한 국가도 포함시켜야 하는 것이죠. 콩고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아동전사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동들을 전쟁으로 내보내는 것이죠. 그러면서 이들을 훈련을 시킵니다. 전쟁에 나갈 수 있도록 말이 움직...콩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글로벌 자본주의의 일부분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단지 성공한 국가들만을 포함시키는 것이 아닌 것이죠. 즉 중국이나 싱가포르 그리고 북부유럽 등만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렇게 암흑의 세계까지도 포함이 된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국가보다도 한국을 좀 예로 들어볼까요? 여러분 같은 경우에, 한국 같은 경우에 굉장히 성장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한국의 대기업중 하나가 마다가스카르의 굉장히 비옥한 토지를 사려고 했습니다. 한국만이 아니라 오늘날 개발된 국가들은 이처럼 아프리카 국가들의 개발된 그리고 비옥한 토지들을 사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기아의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변증법적인 분석을 해봐야겠는데요. 여러분이 자본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갖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실패사례들 또는 의도치 않았던 그 개념의 산물들을 한 번, 또는 부산물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변증법에서는 이러한 실패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 안에, 그 개념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실수들과 대립과 그리고 끔찍한 파생물들도 역시나 그러한 보편적인 개념들에 포함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카테고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업의 카테고리, 실업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마르크스를 통해서 봤을 때 착취와도 연결된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실업자들은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실업의 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실업자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죠. 더 이상 고용이 가능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영구적으로 실직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소말리아, 콩고처럼 나라 전체가 실업상태에 있기도 하고 또 한 국가 내에서 특정지역 전체가 실업상태에 있습니다. 즉 업무와 시장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애초에 취업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럽의 상황이 이와 흡사하다고 하겠는데요. 수백만의 학생들이 교육은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이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들에게는 취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이 교육을 받은 전공영역에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안의 영역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되는데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까지도 실직자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점차 실직을 창출해 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이와 같은 현상을 우리가 더 명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지배하는 헤게모니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반자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미디어를 보십시오. 특정기업이 아동을 착취하고 또 다른 회사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특정은행은 투기를 하고 있다라고 하는 등등의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탐욕 많은 자본가와 은행에 대해서 보도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만을 탓할 수 만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는 탐욕스럽다라는 이런 식의 해석에도 저는 싫증이 납니다. 최근의 자본주의에서 탐욕이라는 것이 물론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라는 것은 밝혀졌습니다. 어쨌든 도의적으로 반자본주의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사람을 탓하고 사람들의 탐욕과 부패를 탓하는 것은 중요한 분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그 분석은 바로 시스템 자체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 시스템 자체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 가를 분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죠. 이것이 저에게 가장 심각한, 유일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저는 지금 여기서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좀 인용하겠는데요. 대부분의 자본주의의 비판가들도 한번 볼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이 자유민주주의만이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 체제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만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체제라고 보는 것이죠. 그러면서 어떻게 이것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만을 고민합니다.

 

제가 어릴 때 말이죠,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사회주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점차 글로벌 자본주의를 추구하게 되었었죠.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어떤 권리라든가 이런 것을 주창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때만 하더라도 다른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제 친구에 대한 얘기를 좀 할까요. 오늘날에 공상과학에서, 공상과학소설에서 우리는 손쉽게 세계종말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은 우리가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자본주의가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다라고 그러한 이야기를 제 친구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참 복잡한 상황이라고도 할 수 가 있겠는데요.

 

제가 최근에 이데올로기 투쟁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2011년 가을에 읽은 책인데요, 나온 책입니다. 그런데 중국인민공화국 정부 쪽에서 시간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모든 문화에서 다루는 것을 금했습니다. 텔레비전이라든가 소설, 영화에서 다루는 것을 금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이 대안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죠. 권력에 있던 사람들은 이러한 대안적 상황 또는 대안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만이 아니죠. 다른 국가에서도 이렇게 또 다른 대안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그렇게 흔치 않습니다. 또 다른 대안적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흔치가 않은 것이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요? 지금 문제가 무엇일까요? 공산주의가 끔찍하게 실패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공산주의는 대재앙이었습니다. 실패를 한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체제를 고수하면 되지 않느냐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제가 이 시점에서 제 책에서 이야기를 했던 부분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생태학적 문제에 유전공학 때문에 직면하게 되고 있다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그런 새로운 문제들도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자본주의 그리고 또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좌파적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한다라고 비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토피아라고 해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대재앙이 일어나서 유토피아로 가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예로 급속한 발전을 환경에 뒷받침하지 못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구의 환경이 이런 모든 급속한 발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을 지역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침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예가 되겠는데요. 제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자선활동 그리고 유기농식품도 어떻게 보면 이데올로기라는 것입니다. 다소 시니컬하게 말씀을 드려야겠는데요.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서방세계에서 인기가 많은 중산층과 지식인들에게 유기농식품이 굉장히 인기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유기농 사과를 상점에서 샀다고 합시다. 통상적으로 보는 사과보다도 더 볼품이 없는데 여러분이 더 비싼 돈을 지불하고 이 상품을 구입하죠. 정말로 그 제품이 환경에게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구입을 한다기보다는 여러분이 그 사과를 삼으로써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환경파괴는 좋지 않다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저렴한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유기농사과를 구입을 했으니 나는 지구 환경보호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보호자들에게 일종의 기여를 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이데올로기가 일부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선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서방세계에서 인기가 많은데 여러분이 어떤 기부금을 많이 내죠. 그래서 어떤 에이전트가 아프리카의 고아를 여러분에게 연결해줘서 여러분이 매달 20달러 정도를 매달 기부하고 1년 후에 이 아이의 사진과 편지를 받는다고 칩시다. 이런 기부활동을 하면 여러분이 굉장히 기분이 좋죠. 내가 돕는 아이의 얼굴까지 나는 알고 있다라고 생각을 하면서요. 이것이 바로 간편한 출구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생활방식을 크게 바꿀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미신적인 어떤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가 오늘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조금 실망한 부분이 있습니다. 미국과 똑같은 현상을 발견하였는데요. 이 호텔에서요. 외국인을 위한 하야트 호텔이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13층이 없더군요. 12층에서 바로 14층으로 넘어갔습니다. 정말로 13이라는 숫자가 두렵다면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누구를 속이려고 하는 겁니까? 사실은 13층이라는 것을 신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게임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듯이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책에서 여러 번 소개한 사례이기는 합니다마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예이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립니다. 코펜 헤겔, 어떤 철학가가 있었는데 어떤 과학자가 이 철학가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출입구에 어떤 악령을 쫒아내는 미신의 상징물이 있습니다. 과학자이면서 왜 이런 미신적인 물건이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더니 이 과학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물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기다 두는 이유는 믿지 않아도 효과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가 이렇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의를 믿지는 않더라도 내가 믿지 않더라도 작동은 한다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스템을 보면 우리 매일매일의 이데올로기를 보면 이와 같은 미신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미신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떤 신념의 표방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미국이 세계문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프렌시와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텔레비전을 보면 그런 프로그램에서 웃어야 할 순간에 웃음소리가 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아마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아마 여러분 퇴근하고 나서 저녁시간이 되면 피로하죠. 그래서 텔레비전을 켜게 됩니다. 그러면서 피로한 상태에서 텔레비전을 켜게 되는데 텔레비전에서 여러분 대신에 웃음까지 웃어줍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마치 그것을 보고 나면 마치 제가 웃은 듯이 마음이 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웃음이 효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믿는 것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것의 효과의 한 예로서 들어볼 수가 있겠습니다. 또 우리들의 신념에 대한 한 예로서 제가 사용해 본 것인데요. 오늘날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믿고 있는 것처럼 감지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말을 하자면 주체가 신념에 반하는 주체입니다. 저희 나라 사람 같은 경우에는 애국자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여러분이 우리나라를 놀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 그러냐라고 물으면 우리 아들 때문이다. 뭐 이런 식으로 핑계를 대는 것이죠. 유럽에서 산타클로스가 있죠. 빨간 옷을 입고 선물을 어린 아이들에게 갖다 주는 존재. 완벽한 구조 아닙니까? 부모에게는 산타클로스 믿으세요 라고 하면 내가 바보냐 라고 비웃겠죠. 그럼에도 부모는 선물을 삽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묻죠. 산타클로스 믿니 라고 하면 어린이들도 저도 바보가 아니에요. 부모가 실망할까봐 믿는 척하는 거예요 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식의 신념이 하나의 사회적인 연계고리로서 작동하지만 실질적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이 대상이 상상의 존재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연구결과이기도 한데요. 이런 소문이 돌았습니다. 즉 가게에 판매할 수 있는 화장지가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허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화장지의 공급은 충분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는 이 소문을 믿어서 화장지를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화장지의 공급부족이 발생하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빨리 화장지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런 소문 때문에 실질적으로 화장지 공급 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일종의 파라독스입니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의 상황을 이런 비유로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수론자들은 우리가 희락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도입하고 있다. 사람들의 희생을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완전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인칭으로서는 우리가 믿지 않지만 우리의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했을 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신념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기능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과학자들이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원시사회에 진입을 했는데 우리의 토템이 독수리다 이런식으로 설명을 했더니 새를 가지고 징표를 삼다니라고 유럽 사람들이 비웃었죠. 그런데 어떤 유럽인이 이 부족 안으로 들어가서 정말로 인류의 근원이 조류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어떤 대답이 나왔을까요? 진짜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삼촌이 그런 말을 했어요. 라는 식의 대답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제 인종주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이것이 인종 때문이 아니라 누구든지 다른 사람은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제 다른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인이었던 것 같은데요. 그 독일인 인류학자가 기니아에 있는 부족을 방문했습니다. 이 부족이 어떤 죽음의 춤을 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가 그 부족을 방문했습니다. 저녁 때 방문을 했었고요. 그래서 부족을 만나서 그 유명한 죽음의 춤을 보고싶다 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하룻밤을 보내고 그 다음 날 그 부족이 그 죽음의 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와 그의 팀은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며 그 원시부족의 춤에 대한 보고서를 썼죠. 이 춤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라고 보고서를 쓰고 그리고 나서 그 부족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또 다른 탐험단이 그 같은 부족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그 부족에게 물었죠. 그 첫 번째 탐험단과 있었던 일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탐험단 같은 경우에는 그 부족의 언어를 배우고 가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가 있었는데요. 들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탐험단이 왔을 때 그 탐험단은 자신들에게 뭔가를 요구했고 그 원시부족은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간파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죽음의 춤을 보여주기를 원한 것으로 자기들은 이해해서 그래서 자신들은 최대한 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 춤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형상화하는 춤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죠. 첫 번째 탐험단이 정말로 죽음을 형상화한 춤이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보고서까지 썼는데 사실은 이 부족이 그 탐험단을 위해서 만들어 준 것이 그 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이 원시적인 고유성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파스트러너라는 에스키모 영화가 있는데요 에스키모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어떤 환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 현상을 다룬 것인데요. 그 영화를 보면 두 개의 부족이 나오는데 서로를 결국에는 다 죽이고 맙니다. 그런데 그 신화를 바꿔서 화해를 하는 그러한 책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저자에게 그 저자가 또 에스키모 사람인데요. 왜 그렇게 상업화해서 신화를 바꿨느냐하고 물었더니 답은 이랬습니다. 그렇지 않다 제가 쓴 책은 우리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고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유럽인들이 그 고유성에 집착을 하고 오리지널 버전에 집착하는 것이지 이렇게 바꾸고 상황에 맞추는 것은 우리의 전통이다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래서 또 상점들을 보면 어떤 전통의 약, 고유의 약 이런 것을 파는 상점들을 볼 수가 있는데요. 한국에서도 말이죠. 뉴질랜드 같은 경우에는 원시부족이 있죠. 토착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가서 패션이 어떤지를 살펴보고는 뉴질랜드에 돌아와서 그 토착민들의 의상을 그에 맞게 또 바꾼다고 합니다. 참고로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의 역설이 무엇인가 하면 사실 어떤 오리지널로 하는 그런 고유성 또는 진품이라는 것에 우리가 너무 집착을 함으로써 그 고유성을 오히려 더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죠.

 

, 그렇다면 이와 같은 믿음의 구조, 신념의 구조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이것은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신념과도 연관된 것으로서 여러분들 주식시장에서 선물거래를 하시죠. 그런데 상당히 복잡한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단지 투자를 할 때 어떻게 될 것이다라고 짐작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2년 후에 사람들이 어떠한 투자를 할 것인가, 상황이 어떨 것인가까지도 짐작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2년 후에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미리 점쳐봐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의 취약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믿느냐와 연관된 것이기도 한데요. 제가 말하는 것이 객관적인 현실은 없고 우리가 믿는 것만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행동 속에서 구체화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상품화의 페티시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유효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것을 보면 마켓페티시즘을 보면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신념들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마르크스는 굉장히 시니컬한 현실주의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시장안에서 자신이 믿는 것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변증법적으로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런 이유 때문에 젠불교라든지 이런 식의 신념이 아시아에서 인기가 많고 또 은행가, 디지털 키플러터리스트 투자가들에게도 인기가 많습니다. 여러분, 알고 계셨습니까? 가장 인기 있는 어떤 종교적 성향이 불교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현실의 취약성을 이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경제적인 지향성, 성공의 와중에 여러 가지 신념이 충돌해서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취약성과 외관의 취약성 등등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제기능 활성화라고나 할까요. 과거의 개념이 새롭게 부상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존재론이 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이런 가르침이 모던 혹은 포스트 모던의 글로벌 자본주의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미신으로 다시 돌아가서 말씀을 드리겠는데요. 굉장히 인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을 우리가 파괴하고 있다든지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기도 합니다. 멜랑콜리아라는 영화를 보면 세계의 종말이 다가와서 결국은 속수무책인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작은 차원에서의 생태학 그리고 하나의 생태학으로서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탄산음료 캔과 신문지를 재활용을 잘 했는가, 안 했는가 이런 행동의 80% 정도가 저는 미신적인 신념에 바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문제의 근본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서 지구 환경을 구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에서부터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 어쨌든 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여러분은 깨닫고 계십니까? 일상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미신적인 행위인데요. 특정 스포츠 경기에 갔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집에서 친구들과 텔레비전 앞에 모여서 관람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여러분이 큰 소리로 소리를 들으면서 팀을 응원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힘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실질적으로는 그 선수들이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죠. 아까 말씀드린 코카콜라캔 분리수거도 유사한 예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를 들겠는데요. 한국에도 스타벅스가 있죠. 스타벅스의 출발점은 소비자들에게 죄책감 같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스타벅스가 굉장히 사회적으로 의식있는 회사다라는 광고를 합니다. 카푸치노를 한 잔 여러분이 구매할 때마다 2센트정도는 소말리아 아동에게 가고 열대우림 보존에 사용되고 하는 등등의 자본주의적인 솔루션과 광고를 합니다. 소비 뒤의 가격을 상품 속에 포함시키는 것이죠. 너무 소비해서 죄책감을 느끼는가? 괜찮다, 조금만 더 소비를 하면 어떤 소비주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런 식의 현상과 신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예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스템이 거의 붕괴 직전에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 징후를 우리가 지난 2,3년 동안 봐왔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이 시스템이 거의 극한점까지 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월가 점령시위가 일어난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첫 번째로 그 시스템의 한계를 사람들이 인지를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죠. 이 시위들은 어떤 인종주의나 또는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시위들은 사람들의 통찰력을 이용해서 어떠한 구조적인 문제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일어난 시위들입니다.

 

그런데 좌파로서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끔찍하게, 무차별적으로 솔직해져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만약 여러분이 전통적인 좌파라면 그렇게 달갑지 않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 5년 전에 서구권에서 자본주의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번영을 가지고 왔습니다. 서구권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그럴 때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런 지식인들은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위기가 일어나게 되면 모든 것은 붕괴될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은 붕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카산드라처럼 이렇게 대재앙을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카산드라 아시죠? 항상 어떤 재난을 예언했던 인물이었는데요. 그런데 서구 유럽과 미국 등에서 또 그리스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좌파는 어디 있습니까? 아무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하고 같이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좌파는 사람들을 단합시켜서 이와 같은 시위들과 운동들을 하나의 큰 제안으로, 제안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이끌기를 우리는 바랐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좌파쪽에서의 대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주 세부적인 계획까지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계획.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계획 말이죠.

 

그래서 이와 같은 자본주의 붕괴가 진정한 붕괴인가, 아니면 제한적인 붕괴로서 더 많은 공공지출이 필요하고 또 보건분야를 개혁을 해서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자본주의를 벗어나서 새로운 체제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그러한 계획들 말이죠. 그래서 지역차원에서의 민주주의의 개혁 등등 이러한 것에 대해서 어떤 현실적인 제안을 좌파쪽에서 늘어놓은 것 또는 제시한 것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급진적 좌파는 여전히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메시아적 기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진정한 노동자 계급. 즉 진정한 노동자 계급이 어느 순간 자신들의 운명을 깨닫고 진정한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이 급진적 좌파들은 이와 같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 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사건, 대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현실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생태학적인 대재앙 그리고 또 전쟁 등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저는 어떤 큰 어떤 전지구적인 대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 회의론적인 태도를 가지신 분들도 있으실 것인데요. 우리가 있는 이 현실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가라는 그런 입장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인가 하는 사람들도 있겠죠.

 

그런데 우리는 좀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서구 유럽과 미국과 일본에서 사람들이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그리고 미디어에서 이야기를 할 때 아주 이상스러운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술, 테크놀로지죠. 과학 그리고 이 기술을 통해서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기술을 이용해서 가능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궁극적 꿈에 대해서, 즉 테크노그노시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이용을 하고 또 하드웨어가 거의 불멸이 되고, 불멸의 존재가 되고. 이러한 것들, 우리가 꿈꾸는 것들이 현실화가 될 수 있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제가 들은 이야기는 미국에 있는 한 의사가 이야기를 한 것인데요. 성기를 두 개로 분리해서 이 두 개를 이용해서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한다라는 그런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곧 우리가 다른 행성으로까지 여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테크놀로지, 기술을 이용을 해서 개인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불멸의 존재까지도 될 수 있고 장기들도 다른 것으로, 인공의 장기를 교체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또 불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아십니까?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회변화라는 것은 즉 유토피아적 세계의 도래는 불가능하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추구하면 전쟁이 발발하거나 테러가 발발하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적합한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커다란 신념이나 교훈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적 공간의 구조를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가능케 하는가, 또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가라는 이런 구조적인 틀이 이데올로기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날의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냥 지금 현재 이대로 살살 투쟁하자라는 그런 솔루션에 저는 동의를 할 수 가 있습니다. 저는 비관론자입니다마는 그래서 후쿠야마의 꿈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도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핵의 위기 혹은 생태적인 위기가 후쿠시마보다도 훨씬 더 큰 힘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대처하는 이런 일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요? 유전공학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굉장히 놀라운 영역입니다. 유토피아적인 미래가 아니고 오늘날에도 점차 유전공학기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유전공학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들이 우리의 심리적인 영역에 영역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으면 구글에 들어가서 DARPA, 다르파라는 단어를 쳐보십시오. 다르파는 CIA가 후원하는 프로그램인데 굉장히 섬뜩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신념의 구조를 바꾸는 것입니다. 바로 유전공학적으로 뇌에 개입을 함으로써 신념구조를 바꾸고자 시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 근본주의 신봉자가 테러리스트가 됐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이런 신념을 이 사람이 수용하기까지 뇌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관찰한 후에 이데올로기적인 세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뇌는 반복적으로 주입을 시키는 것이죠. 그런데 화학적인 어떤 수술요법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뇌에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적인 분투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하는 것이죠. 이데올로기적으로 해결한다는 것도 아니고 너의 뇌로 들어가서 직접적으로 바꿔버리겠다는 방식입니다. 제가 이러한 프로그램을 탓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가 오늘날에는 여러분의 뇌의 명령을 해독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러분이 신체적인 불구자가 되어도 스티브 호킹처럼 여러분의 생각을 컴퓨터와 연결하면 여러분의 생각을 인지해서 전진하고 오른쪽, 왼쪽 이런 식으로 명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생각만으로 사물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고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 정체성을 위협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제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드리는 거고 실제는 저 밖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어떤 위협을 하더라도 저의 사고영역은 저만의 것이고 저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영역의 벽이 무너진다고 한 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엄청난 도전이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데올로기는 거짓이 아닙니다. 이데올로기는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거짓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죠. 생태학이라는 것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뉴에이지 종교에서 환경을 보호하겠다라는 식으로 나오면 이것도 새로운 형태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금 주최측이 준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요.

 

<출처> http://koyoto.blog.me/161572486

출처를 밝히니 용서해 주세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굵은 표시는 작성자님의 표시고, 형광표시는 제 표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