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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중 카프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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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작품은 그것이 완성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은 작품 안에서 작업하는 자가 작품을 또한 바깥에서 끝낼 수 있고, 작품을 통해 더 이상 내면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작품이 그를 거기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스스로가 거기로부터 자유롭다 느끼는 자신의 한 부분에 의해 작품에 얽매여 있을 때 완성된다.(63) 


  글쓰기가 카프카에게 고독을 언명하고, 그의 삶을 사랑도 유대도 없는 독신의 삶으로 만든다면, 하지만 글쓰기가 그에게는 -적어도 가끔은 한참동안- 그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행위로 보였다면, 그것은 어쨌든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 바깥에서 고독이 그를 위협하고 있음을 뜻하고, 공동체란 단지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며,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법은 망각된 법이 아니라, 법의 망각의 숨김이라는 것을 뜻한다. 글쓰기는 그리하여, 비탄과 비탄의 움직임과 뗄 수 없는 연약함 가운데, 충반의 가능성이 되고, 글쓰기가 도달하여야 할 유일한 것이기도 한 길 없는 목적과 어쩌면 일치하는 이른바 목적없는 길이 된다. (76)


  예술은 무엇보다 불행의 의식이지 그 보상은 아니다. 카프카의 엄격함과 작품의 요구에 대한 그의 충실함 그리고 불행의 요구에 대한 그의 충실함은 삶이 그들을 저버린 많은 나약한 예술가들이 스스로 흡족해 하는 허구의 천국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주었다. ~ 명백히 카프카가 그러한 것처럼, 예술은 세계의 '바깥'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도 우리의 죽음과도 아무런 가능한 관계를 가지지 못할 때 불쑥 드러나는, 내면 없고 휴식 없는 바깥의 깊이를 보여 준다. 예술은 '이 불행'의 의식이다. 예술은 자신을 잃어버린 자, 더 이상 나라고 말할 수 없는 자, 그리하여 세계를, 세계의 진리를 잃어버린 자, 횔덜린이 말했듯이 신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이 비탄의 시간에 속하는 추방된 자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95-96)


  여기, 자신의 죽음을 살아야 하고, 절망 속에서 이 절망(즉각적 처형)을 벗어나기 위해 죽음의 언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삼아야 하는 인간이 있다. 카프카는 이를 의식한 인간이었던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카프카가 본질적 금기를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이 금기 속에 살아 숨 쉬는 종교적 의미를 더더욱 기억해 내려고 노력하였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언제나 더 한층 엄격하게, 자신을 고립시켜, 우상이 그곳에 찾아들디 못하게 하기 위하여. 


  원래 카프카에게는 종교적 요구를 문학적 요구로 이어 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만년에는 문학적 경험을 종교적 경험으로 이어 가고, 믿음의 사막에서 더 이상 사막이 아니라 그가 자유를 돌려 받은 또 다른 세계로서의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옮겨가면서 문학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이 구분되지 않고 혼동되어 가는 성향을 보인다. (중략)

  예술가, 즉 카프카 또한 자신의 예술에 대한 염려에서 그 근원에 대한 추구에 있어서 스스로에게 갈구했던 그 인간, 곧 '시인'은 그를 위해 단 하나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시인에겐 바깥만, 영원한 바깥의 반짝임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