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의 이상
p.82
반대하는 정신에 대해. 그리고 이를 어떻게 키울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반대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기꺼이 혼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엄마 옆에서 혼자 놀 수 있는 어린이는 순응을 요구하는 강력한 힘 앞에서도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나야 한다. 민주주의는 진실과 이상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의지를 배양해야 한다.
p.36
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려면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필요하다. 절대 군주 국가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복종을 가능하게 하는 두려움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선에 대한 믿음, 미래에 대한 희망, 민주주의를 좀먹는 증오와 혐오와 분노에 맞서려는 결심. 나는 이 증오, 혐오, 분노가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한다.
p.38
내게 철학은 권위적인 선언이 아니다. 타인보다 더 깊이 있다는 주장도, 현명하다는 과시도 아니다. 철학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겸손한 마음을 바탕으로 진실하게 논쟁을 주고받겠다는 약속이다. 평등한 인간으로 기꺼이 상대의 의견을 듣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찰하는 삶을 뜻한다.
pp.78-79
민주주의의 오류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가장 먼저 구성원들이 자신과 사회의 안녕에 대한 개념을 갖춰야 하는데 여기서 오류가 발생하기 쉽다. 특히 편협해지기가 쉽다. 타인의 헌신을 간과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계급의 안녕만 사회의 안녕과 동일시하면서 말이다. ~ 사람들이 자신의 안녕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해도, 무엇이 이를 위협하는지에 대해서는 오판할 수 있다. ~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보다 더 위험에 취약하고 무력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두려움이 부족해 오류가 생기는 경도 있다.
p.109
자애로운 부모는 아이들 문제에 있어서는 응보 없는 분노만 경험한다.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건설적인 제안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민주 사회에서 우리가 늘 동료 시민들을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데서 두려움을 느낀다.
적대감과 비난
pp.80-81
민족적 적대감이라는 맥락에서는 타인의 행동에 쉽게 동조하는 '폭포 효과'라는 현상이 있다. 평판 때문에 동조하는 경우는 '평판 폭포 효과'라고 하고, 타인의 행동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동조하는 경우는 '정보 폭포 효과'라고 한다. 경제학자 티무르 쿠란Timur Kuran은 그와 같은 폭포 효과가 '민족화' 과정에 큰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을 다른 민족 집단과 대척점에 있는 민족 혹은 종교적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변화를 뜻한다. ~ 수년 동안 인도를 위협한 이와 같은 경향이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상황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새로운 요인도 있다.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고 폭포 효과를 강화하는 소셜 미디어와 인터넷이다. 인터넷 '입소문'은 신문 기사, 심지어 텔레비전보다 더 효과적으로 감정을 통제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고통은 타인의 탓이 아니다"
pp.97-98
우리가 목격하는 비난은 지나치게 성급하고 두려움에 휩쓸려 차분한 숙고를 거부한다. 또한 개인이나 집단이 받는 고통을 되갚아주고자 하는 보복성을 내포한다. ~ 나는 분노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눈앞의 현실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하기 힘들다고 믿는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적.문학적 예들을 통해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스킬로스<오레스테이아>인용
p.118
마녀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새로운 대륙에서 식민지 문제, 경제적 불안, 혹독한 기후, 혼란한 정치 상황 등으로 힘들어하던 젊은 성인 남성들이었다. 모든 문제를 나이 많고 인기 없는 여성들, 비난하기 쉬운 마녀의 탓으로 돌리고 그들의 죽음으로 일시적 만족을 얻기란 얼마나 쉬웠겠는가.
p.119
일부 도덕적인 개혁가들은 인간에게 루크레티우스의 신과 같은 사람이 되라고 촉구했다. 스토아학파는 통제할 수 없는 일로 훼손되는 '재물'에 초연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두려움을, 결국 분노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다. 철학자 리처드 소라브지Richard Sorabji는 간디의 관점이 스토아학파의 관점과 매우 비슷함을 보여주었다.
p.169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에 대해 연구하는 게리 데이비드 콤스탁Gary David Comstock에 따르면 타깃 선택의 이유는 뿌리 깊은 증오가 아니라 단지 경찰이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 그들을 공격해도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극보수주의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작용해, 소수 집단에게는 공적 보호가 느슨해진다는 신호를 잠재적 가해자에게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처벌 없이 시비를 걸 수 있는 대상을 반대하고 나서는 것뿐이다. 편견을 가진 집단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은 트럼프 대통령의 실책은 그래서 극도로 위험하다. 암묵적 편견, 또래 압력, 폭포 효과는 증오가 변하기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기심
P.176
시기심은 정파와도 상관없다. 우파에서는 경기 침체, 무력감, 절망으로 많은 하위 중산층이 워싱턴 엘리트, 주류 언론, 성공한 소수,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 여성들을 시기하고 모욕했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몰아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잘못되기를 바랐다. 좌파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은행가들과 대기업, 그들을 돕는 정치인들의 힘을 시기했다. 시기는 비판이 아니다.(비판은 언제나 가치가 있다.) 시기는 적대감과 함께 파괴적인 소망을 담고 있어 '소유한 자들'의 기쁨을 망치고 싶어 한다. ~ 사회 전반의 경제적 정의에 대한 좌파의 요구도 정당하고 백인 노동자 계급의 불만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힘을 모아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하는 것과, 지배계급이 잘못되길 바라고 행복을 빼앗고 싶어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시기의 적대적 욕구는 분노의 보복적 측면과 비슷하며, 민주주의에 선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P.185
시기심은 비난과 뒤섞인다. 처음에는 '나도 저것을 갖고 싶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저것은 그들이 아니라 내가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쉽게 발전한다. 정치에서도 가끔 솔직한 시기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들이(여성들이, 이민자들이, 엘리트들이) 갖고 있는 것을 원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기를 도덕심으로 포장하기 좋아하고, '저들은 나쁜 사람들이니 저것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늘 있어온 일이다. 고전학자 로버트 캐스터Robert Kaster는 로마인들이 도덕화된, 그리고 도덕화되지 않은 두 가지 형태의 시기심 사이를 왕복했음을 보여준다. 바로 시기가 비난의 정치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소유한 사람'은 정말 부당하거나 모욕적인 행동을 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행분노"
p.203
나는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이 핵심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전국을 휩쓸고 있는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 건설이라는 그의 말 역시 옳았다. 그가 제안한 '제2권리장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º 산업, 상점, 농장, 광산에서 쓸모 있고 보수 좋은 직업에 종사할 권리
º 적절한 수준의 음식과 옷,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보수를 받을 권리
º 농부들이 재배한 농작물을 자신과 가족이 적절한 수준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가격에 판매할 권리
º 중소기업들이 국내외에서 불공정 경쟁 혹은 독점으로부터 자유롭게 매매할 권리
º 모든 가정이 좋은 주택에서 거주할 권리
º 건강을 위해 적절한 치료를 받을 권리
º 고령, 질병, 사고,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공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중략) 루스벨트는 이 권리들이 시기심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한다고 생각했다.
성차별주의와 여성혐오
P.226
여성 혐오는 견고한 이해관계를 지키겠다는 남성들의 결심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성차별적인 믿음을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도구가 가끔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하므로 여성 혐오자들은 이에 너무 의존하지 않는다. ~ 마찬가지로 여성이 더 열등하다는 믿음 없이도 (대부분의) 여성들을 아내이자 엄마, 성적 대상으로 한정하려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P.242
★ 성차별주의는 문제다. 하지만 성차별주의자들의 믿음은 증거로 반박할 수 있다. 실제로도 그랬다. 진짜 문제는 조롱, 혐오 표현, 고용과 선출의 제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존중 거부 등의 방법을 써서다로 구시대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남성들의 결심이다. 여성 혐오는 "빌어먹을 여자들이 못 들어오게 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적으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영리한 전략은 아니다. 이는 아이들이 싫다고 외치며 발로 바닥을 치는 것과 비슷하다. 변화를 거부한다고 여성 혐오자들이 해결하고 싶어 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 계급 남성의 건강 악화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 받을 기회를 얻게 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아직 직면하지 못한 문제 역시 해결해주지 못한다. 다시 사랑과 돌봄을 주고 받는 방법,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성취가 늘어나고 있는 시대에 새로운 핵가족을 만들어나가는 방법 말이다. 여성 혐오는 순간의 위안일 뿐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유독한 감정들의 조합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한 모든 감정을 뛰어넘어 모두를 위해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나갈 전략이다.
희망
P.257-258
그러므로 희망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희망이 가치 있는 사랑과 신뢰를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논의를 진진시켰다. 칸트는 우리가 사는 동안 가치 있는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행동의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 서로를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행동 말이다. ~ 우리가 가치 있는 사회적 목표를 추구해야 한다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곧 희망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적 요구'로서의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충분한 이유 없이도 올바른 행동을 위해 취해야 할 태도다.
P.261-262
두려움은 타인의 독립성에 대한 믿음보다 통제하고자 하는 군주의 욕망과 비슷하다고 이미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은 통제하려는 사람, 군주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내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도 좋지 않으며 불확실성과 취약성의 여지도 없다. 여기에 희망은 없다. 내가 원하는 것 전부를 갖지 못했으며, 신뢰할 수 없는 타인이나 기회에 의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의 정신은 타인의 독립성에 대한 존중, 군주적 야망의 포기, 마음의 확장과 연결되어 있다. 스토아학파는 희망이 '확장'과 '고양'이라고 말했다. 시인들은 희망을 비상과 연결시킨다. 인도의 시인이자 철학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th Tagore는 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에게 '기회의 바다로 두려움 없이 들어간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모습이다.
공공업부 의무복무 제도
#메모
정치, 경제, 사회, 환경 등등 여러 측면에서 현재를 생각하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특히 국제정세를 바라보면 인간은 절대로 진보하는 동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바뀐다. 한반도 역시 앞으로 얼마나 더 안전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아이를 키우면 절망적이면서도 죄책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낙관적인 시각을 놓지 않는다. 노년 여성의 관대함이 드러나는 특성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러한 특성을 우리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은 변화할 것이다. 그것도 점점 나쁜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어쩌면 조금 더 희망을 가지고 스스로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고민해야 그나마 살만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나는 나의 아이가 기쁜 삶을 살기를 원한다.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별도로 시기와 분노 혐오와 관련된 연구를 이어가는 마사 누스바움의 연구흐름을 엿볼 수도 있었는데, 내 공부에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노인의 시각과 관점을 어떻게 일반화하고 공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마사 누스바움은 <지혜롭네 나이 든다는 것>과 <노년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