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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다시 "선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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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일, 유강은 옮김,『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그린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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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자본의 비밀을 벗겨내었고, 일반 사람들의 삶의 황폐화를 일깨워준 것.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투쟁해야만 현재의 삶을 이겨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견. 
 
  맑스의 주장들은 현재까지도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유령처럼 떠도는" 이름이 되었다. 척결의 대상, 공포와 독재의 상징이 되어버린 공산주의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 소련이 붕괴한 후 "선언"은 목적을 잃어버린 훌륭한 철학서로 소장가치만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선언"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말을 걸고 있는가?


  맑스가 말한 것은 자본이 수많은 임금노동자들을 소외한다는 사실이다. 임금노동자가 봉기해야만 실천적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몇몇 실천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혁명은 실패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혁명의 아우라가 곳곳에 남아있으며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힘은 이제 임금노동자 뿐만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착취를 받게 된 모든 복합적인 인간에 적용되었다. 미래의, 아니 현재에도 임금노동자는 육체를 사용하지 않는 "블루칼라"로 변화되었다. 노동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금노동자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지식이 가치로 매겨지고 그 가치가 자본과 교환되는 시대에 살고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결된 것 같지만 아직도 실제 생활에서 차별받아야만 하는 여성, 장애인. 세계화의 그늘에서 끝없이 착취를 당해야만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이념적으로 억압받아야 하는 성적 소수자. 이들을 위해 "선언"은 여지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일상의 문제에 천착해야 한다는 우리의 과제가 실상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일상'의 영역은 보편적 근대 질서의 균열을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했다. 지배적인 담론에 순응하지 못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일상의 영역에서 얻을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근대의 모순과 비극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수치로 환산되는 통계 정보는 사람들을 지배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각 개인의 일생을 돌이키면 가슴 아픈 사건들이 즐비하다.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바로 이러한 비극성을 되돌려 놓고자 했던 맑스의 신념을 잇는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다시 "선언"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은 인간의 문제에 입각해있다. 맑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빈곤하며, 배제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들의 공통이름"이듯이.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맑스의 이 말은 나의 존재를 끊임없이 꼬집는다. 이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게 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중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있는 소심한 인간일 뿐이었다. 과연 나 스스로가 "다시 "선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