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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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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적으로 "아버지 살해" 모티프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농촌사회로부터 그것은 가정을 통제하고 권한을 행사했던 권위적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절대적 권위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자 가족 구성원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계기이다. 또한 장자에게는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가장 '남자다움'과 '부권', 그리고 가족의 부를 세습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버지 부재"는 문학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 전인권은 『남자의 탄생』에서 아버지의 죽음이 아들에게 "가문의 계보에 진입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계기"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권력적-신분적 욕망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엥겔스에 의하면 이러한 관계들은 사적소유가 발생하면서 생겨났다. 사적소유가 발생하면서 그 소유를 관리할 한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은 성인 남성, 즉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가 재산을 관리하면서 어머니는 그의 조력자가 되었고, 실질적인 법적 권한을 제한받게 된다. 또한 상속에 의해서 여성이 아들에 비해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사적소유가 발생한 이후부터 여성은 마치 재산처럼 점유나 교환, 매매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은 "남편의 지배와 부를 상속할 확실한 남편의 자식을 낳는(102)"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일부일처제의 정착과정이다. 남편의 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여성의 임무를 제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단혼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따라서 가족 안에서 이미 사적 부를 위한 노동 분업이 실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인간의 역사 안에 존재했다. 그리고 문명의 발전 과정, 자연 환경에 따라 가족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진보'에 의해 가족의 형태는 변화했고, 가족형태의 '진화'로 인해 인간성은 '퇴보'하고 말았다. 적어도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없거나,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났던 과거에 비해, 현대의 가족 제도는 착취를 기반으로 하는 본 모습을 숨기고 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가족 관계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여성의 가사노동은 공적인 성격을 잃어버렸다. 남성의 사회 활동에 보조를 맞추는 활동으로 간주될 뿐이다. 여성은 법적인 권위를 잃어버렸으며, 여성이 스스로 사회적인 생산을 하지 않는 이상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일조하기 위해서는 남성에 비해 값싼 노동자로 공장에 팔려나가거나 몸을 파는 매춘부로 일을 해야 한다. 따라서 여성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이중적인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 가장도 권위를 얻을 수 없다. 애초에 일부일처제는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족제도이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가족에게는 지킬 재산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아내와 자식들도 가장을 신뢰하지 못한다. 일부일처제 제도하의 결혼은 완전히 사회, 경제적 동기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것들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 쉽게 붕괴되고 만다.

  문명과 사회, 경제구조가 인간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들의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부분이라고 여겨지는 가족제도마저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자본의 본질적인 욕망과 목적을 알 수 있다. 가족관계의 변화는 인간 모두를 자본화하고 돈에 따라 움직이게 만들고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을 화폐의 노예로 만들기 위한 자본의 행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긍정적인 전망을 제시한다. 인간이 자신을 옥죄는 주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양하는 것이다. 바로 사적 소유를 지양하는 공산주의를 마련하는 것이다. 엥겔스가 말하는 공산주의는 사람들이 돈에 얽매여 자신의 욕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위해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각자가 보유한 특성과 개성을 분할하지 않고도 공유하며 차이를 인정하고 동등한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엥겔스는 사람들이 이러한 공산주의를 스스로 찾고 실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이 드러나기에는 화폐의 욕망이 너무나도 큰 모양이다. 공산주의로 통합된 국가마저도 자본의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가족 안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한 가족을 구성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독특한 가족제도가 있는 곳에서도 경제구조가 변화하면서 곧 일부일처제의 모습으로 변해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점차적으로 가족애를 잃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사회 안에서 가정은 결코 안전한 곳이 될 수는 없는 것인지, 엥겔스의 전망 외에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없는지에 관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