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적 진리의 주변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종의 침묵의 공모가 존재한다. ~ 그 의고적인(archaic) 식민지적 '타자성'은 본래의 이름들과 장소들을 지우면서 수수께끼처럼 말을 한다. 그것은 제국의 승리의식을 식민지적 혼란의 표시로 전환시키는 침묵이며, 그 침묵의 반향을 들은 사람들(제국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억을 상실한다. 그같은 식민지적 혼란의 표시는 초기 모더니즘적 식민지문학의 목소리이자 복합적인 문화적 기억이다." p.246
"<인도로 가는 길>에서 아지즈는 마라바르 동굴로 가는 영국인과 인도인이 뒤섞인 여행에서 필사적이면서도 의기양양하게 출발하지만 카와 돌(Kawa Dol)의 메아리에 의해 비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부움, 우우-부움이 인간의 철자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이다....... 만일 누가 그 자리에서 침묵으로 말하거나 고상한 시를 인용했다면, 그 말소리 역시 마찬가지로 우우-부움이 되었을 것이다." p.247
"어떤 침묵이 또 다른 침묵을 불길하게 반복함에 따라, 이른바 제국의 작업(work)에서 발견된 동일성과 현실성의 기호는 서서히 와해된다." p.248
"제국의 작업의 흐트러짐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은, 식민지 공간을 전통적으로 분리시켜온 이원성들, 즉 자연/문화, 혼돈/문명을 치환시키는 식민지적 무의미(nonsense)의 언어이다. 우우-부움이나 올빼미의 죽음의 울음(그 단어들의 공포!)은 식민지적 '타자성'에 대한 자연화된 혹은 원초적인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사회적 수행을 비의미(non-sense)로서 조롱하는 불확실한 식민지적 침묵의 기록이다. 식민지적 침묵은 또한 문화의 소통 가능한 진리성을 번역(translation)의 거부를 통해 좌절시킨다. 그같은 혼성적 기표들은, 포스터가 그토록 잘 묘사한 정복자들을 유혹하는 인도의 모습으로서, 식민지적 타자성의 암시이다." p.248
"그것들은 보편성 및 사회적 일반화의 언어로서 문화의 변형적 신화와, 삶과 의미의 약분 불가능한 수준들의 반복되는 '전이'로서 그 문화의 수사적 기능, 양자 사이의 소원함을 보여준다. 무의미(nonsense)의 분절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그리고 의미와 비의미(non-sense) 사이의 갈등적인 모순의 공간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같은 '의미 없는' 기표들은, 라캉적인 '또는(vel)'과 유사한 견지에서 문화적 선택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의미 없는' 기표들은 존재와 의미, 주체와 타자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양자 사이에서의 문화적 선택의 문제를 내놓는다." p.249
"마라바르 동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곳'에서는 문화적 다원성의 서사가 상실되었으며 교류와 상응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곳'에서는 미결정적이고 위험한 식민지적 '현재'가 공연된다. 그리고 인도에 사는 영국인의 어려움이 반복되지만, 결코 그 자체가 완전히 표상되지는 않는다. ~ 아지즈는 동굴의 사건에 대해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하다. 그것은 그가 예민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며, 또한 일부다처제에 대한 아델라의 질문을 마음속에서 떨쳐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델라는 강박적으로 그 사건을 생각해 내려 애쓰면서, 자신의 경험을 반복되는 히스테리컬한 서사 속에 형상화한다."p.252
"이같은 텍스트적 수행을 보임으로써, 이제까지 나는 식민지적 현재의 언표작용적 무질서, 즉 그 문화적 차이의 글쓰기를 분절하려 시도해 왔다. 그것은 문화의 사이에 낀 공간의 서사적 불확실성 속에서 행해지는, 식민지적 기표의 공연에 위치한다. 즉, 그것은 기호와 기표 사이에 놓여 있는 것으로서, 기호도 기표도 아니며, 성(sexuality)도 인종도 아니고, 단순히 기억도 욕망도 아니다." p.253
"식민지적 기표(어느 한 쪽도 다른 쪽도 아닌 것)는 양가적인 의미 작용의 행위이며, 이항대립이나 양극성 사이의 차이를 문자 그대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분열된 차이를 통해 문화적 차이를 생각하게 된다. 식민지적 기표가 차이작용의 전략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그 분열의 언표작용적 행위 속에서이다. 그리고 이때 차이작용의 전략은 대조나 대립 사이의 미결정성을 생산한다." p.256
"식민지의 문화적 기표에 대해서 이제까지 내가 주장해온 것은, 부분과 전체, 은유와 환유의 그같은 상동적.변증법적 집합을 급진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교지시적 관계 대신에 사회적 의미의 위치들을 넘어서는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횡단이 있으며, 그것은 문화적 지시성과 관여성의 변증법적.규율적 의미를 지워버린다. 나의 논의의 출발점이었던 문화적으로 동화될 수 없는 단어들과 무의미의 장면들(끔찍스럽다, 끔찍스러워, 올빼미의 죽음의 울음, 마라바르의 동굴)이, 문학과 역사의 일반화를 전복시키며 그로부터 벗어나는, 혼성적인 시간과 진리 속에서 식민지적 텍스트를 봉합해 꿰매는 것은 그같은 의미에서이다." p.256
"19세기 인도 식민지 역사의 연대기를 통해 반향되는 어떤 언표작용의 양식이 존재하는데, 거기에서는 문화적 권위 내부에서, 즉 문화의 지식과 권력의 관습 사이에서, 기묘한 담론적 미결정성의 형태가 발생하고 있다. 이는 트라비아타 계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식민지적 문화의 차이를 명명하기가 불가능함에 따라, 바로 그 차이의 분절의 형식 속에서, 진보.경건.합리성.질서 등의 식민주의적인 문화적 이념들이 이질화되는 계기이다." p.257
"식민지적 담론의 미묘한 교전에서는, 두개의 혀로 말을 함으로써 언어 자체가 이중적으로 기입되고 지적 체계가 불확실해지는, 그런 두려움이 숨겨져 있다.~만일 주인의 언어가 이미 전유되고 노예의 언어가 미결정적이라면, 식민지적 무의미의 진리는 어느 곳에 놓여 있는 것일까? 문화적 차이의 변칙성에 의해 발생되는 지적 불확실성의 아래에는 진리의 치환 문제가 놓여 있는데~ 그것은 문화적 동일화과정 자체에 있어서의 진리의 치환이거나, 어떤 담론적인 인간적 진리의 동일화로서 '문화'의 구조에 있어서의 불확실성이다. 문화의 본토로서 인간에 대한 진리란, 문화들을 차별화하면서 그 인간적 의의와 언설의 권위를 확인하는 진리를 말한다." p.267
"전이(번역)의 과정에서 문화적 일반성과 소통 가능성의 변증법적 과정을 방해하는 것은, 진리의 수행(공연)이나 진리의 결핍이다. 문화적 일반성과 소통 가능성 대신에, 중첩된 해석의 위협이 존재하는 공간에서는, 윤리적.인식론적으로 약분 가능한(commensurate) 문화의 주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놀라운 인간의 모습으로 문화적 권위를 전복시키는 흥미롭고 반란적이기도 한 어떤 광기의 문화와 그 문화를 가로지르는 잔존물이다." p.269
"지적 불확실성의 문제로서 이중성의 불길한 교훈은 바로 문화의 이중적 기입(double-inscription)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대적 '에피스테메'에서 문화의 권위는 모방과 함께 동일화를 요구한다. 문화는 고향과 같은 것(heimlich)이며 규율적 일반화와 모방적 서사, 동물적인 텅 빈 시간, 연속성, 진보성, 관습과 응집성을 지닌다. 그러나 문화적 권위는 또한 고향을 벗어난 것(unheimlich)인데, 왜냐하면 구분되고, 의미화되고, 영향을 주고, 상호규율적이 되고, 상호텍스트적이 되고, 상호국가적(국제적)이 되고, 상호인종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종속적인 권력의 모순된 진술들 속에서, 식민지적 역설의 시간은 그같은 두 가지 사이에 낀 공간에서 작용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것'의 반복은, 실제로는 그 자신의 치환일 수 있으며, 그 언표작용의 순간에 문화적 권위를 그 자신의 비의미(non-sense)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표상작용이 더이상 문화의 권위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 지적.심리적 '불확실성'의 계기에서이다." p.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