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테토스는 삶을 올림포스로 관광여행 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당신은 방문한다. 누군들 안 가겠는가? 그런데 엄청나게 짜증 나는 일이 될 것이다.
"더위에 지치지 않는지?, 공간이 부족하지 않는지?, 마땅히 씻기 힘들지 않은지? (...)
외침과 소통과 다른 신경 거슬리는 것들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떨쳐버릴 것이다.
"나는 영혼의 위대함을 지녔는데, 이렇게 일어나는 일들이 내게 무슨 상관인가?"
금욕주의자가 유일하게나마 감정을 할애한 것은 '영혼의 위대함'을 결정하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 그리고 욕망과 혐오에 대해 절대적 주인됨을 유지할 때 뿌듯함을 느끼게 된다.
그는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할 때 불쾌함을 느낀다.
금욕주의적 이성은 사람이 자기 판단의 주인이 되게 하고, 나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진정으로 선한 유일한 것, 즉 선택의 올바른 사용을 분명히 하게 한다.
진정으로 마취적인 것은 즉각적인 경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제외하고,
그런 것에 대해 어떤 의미 부여를 거부하는 것이다.
금욕주의자들의 이상은 아파테이아, 즉 열정과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마크 그리프, <모든 것에 반대한다>, 은행나무, 2019.
암에 대해 너무 안일한 건 아닐까.
6차 선항암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수술 일정을 잡게 되었다.
반응평가 검사를 했지만, 여전히 암의 크기가 줄은 건지, 여전히 남아있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가슴 한편에 흔적이 여전히 크게 남아 있었다.
암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흔적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겨드랑이의 종양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수술로 일단 제거가 가능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선항암을 6번이나 하고도 전절제를 해야 한다는 소식에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크게 걱정하던 엄마는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며 걱정을 했지만,
교수님 얼굴을 직접 보고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안심을 했다.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나니
내가 내 병에 무심한 상태인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암은 전이와 재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절제는 하는 것이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몸에 혹이 잘 생기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어딘가에 혹이 나서 급격히 커지는 일이 이전에도 있기는 했다.
고등학생일 때, 목에 생긴 '원인 불명의 양성 종양'을 제거한 적도 있다.
그건 양성이었지만 내 평생에 남는 흔적이 되었다.
당시에도 원래는 작았던 혹을 떼어내기로 했었는데,
학교 중간고사와 맞물려 2주만 뒤로 미루기로 한 것이었다.
병원에 찾아갈 당시에 1cm 남짓이었던 작은 혹이 중간고사 뒤에는 위로 7~8cm가 되는 큰 혹으로 자라났다.
긴 머리카락으로 잘 숨기고 다녀 친구들은 잘 몰랐지만,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바람에 내 혹을 본 친구들은, 얼굴이 두 개인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담당의는 악성 종양은 아니지만
목에 얽히고 섥힌 신경들을 다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수술로 혹을 제거한다고 해도 안면신경 이상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다 지나고 생각하면 너무 다행이었고 동시에 무서운 일이었다.
그 결과 나의 목에는 커다란 T자 모양의 흉터가 생겼다.
이 흉터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된 것 같았다.
가급적이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 웃어넘길 것.
모든 문제와 걱정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내 경험은 대단하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내 삶에 주석을 달지 않고 "그냥 그런 것"이라고 가볍게 표현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