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알게 된 처음에는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아마도 스스로도 이 병을 감당하기에 버겁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내 상태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힘들었다.
'나는 괜찮다'며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려 했다.
나는 꽤 단단한 사람이다.
어지간한 일에 잘 충격을 받지 않는다.
내 10대와 20대에 한 일이란 내 마음을 단련한 것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런 와중에도 내 주변에 다 알리면서 그들까지 위로할 여유분의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내가 그들에게서 잠시 사라져 있기로 했다.
이미 인간관계는 단출하게 정리한 상태였기 때문에,
잠깐 사라지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두 명에게는 내 새로운 상태를 툭 이야기했다.
가족들에게도 알리기 전이었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조금의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두 사람 모두 파워 FP인 사람들이었다ㅋ)
제일 먼저 털어놓은 것 N옹이였다.
검사를 받기 전 한 달 전에 우연히 송년 인사 한다고 오빠가 먼저 연락을 했고, 내가 찾아갔다.
내 건강상태에 대해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근황에 대해 자세히 물어주는 사람,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궁금해해 주고 안쓰럽게 생각하는 사람,
N옹은 오래전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반면에 나는 내 얘기를 하느라고 N옹의 상태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고혈압으로 약을 먹게 됐고 술을 줄였다는 것.
결혼생활에서 약간의 부담과 큰 안정을 느낀다는 것.(이건 그에게 좋은 일이었다.)
아버지의 죽음 전과 후의 삶에 대한 생각들은 그다음 만남에서야 알게 됐다.
내가 이렇게나 이기적이고 무심하다.
나의 건강상태를 제일 먼저 알게 된 N옹은 일주일에 1-2회씩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처음에는 약간 부담이었다. 괜히 말했나 생각했다.
치료 전에도, 치료 중이나 후에도, 항상 기억해 주고 물어주는 것이
얼마나 세심한 관심인지, 나에게 감사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항상 감사표현을 하려고 한다.
두 번째로 털어놓은 것은 J언니였다.
매주 주말에 만나는 사람이었는데, 한참이나 말하지 않았다가 무심결에 검사 전날 툭 털어놓았다.
내심 내 안에 불안한 마음이 있어서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언니는 놀랐겠지만.. 애써 덤덤하게 겁먹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언니가 어떤 말을 해도 괜찮았다.
이미 내가 언니에게 속내를 털어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괜찮아졌다.
우연인 듯, 우연이 아닌 것.
그건 이 두 사람에게 내 생황과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는 거다.
생각해 보니 언니 오빠에게 연락한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평생 맏이로 살아왔지만, 기대고 싶었나 보다.
나는 내 인생에서 친구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믿고 살았는데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내 진심을 이제야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았다.
첫 입원하던 날 J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보다 씩씩하지만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따뜻한 언니는,
검사 결과가 나왔고 다행히 낫는 병이라고, 병세가 금세 좋아지는 병이라는 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놓고 울어주었다.
이 순간을 잊지 않을 거다.
이후에 시간이 지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떠오르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할 수 있는 경계선이 점차 넓어져갔다.
나는 꼼꼼하고 다정한 사람이 아니어서, 친구들의 어려운 순간들을 그냥 지나쳐버린 적이 많았는데,
달력에 내 입원 날짜를 적어두었다가 잊지 않고 연락해 준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요즘 나는 건강검진 전도사가 되어 있다.
정부에서 알려주는 건강검진은 좀 받아라,
되도록 큰 병원에서 받아라,
40이 넘으면 대장 내시경과 복부 초음파, 유방 초음파는 받아라... 하는 잔소리들이다.
실비보험과 암보험도 말하고 싶은데, 거기까진 오지랖이라 멈추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한다.
큰 병에 걸리고 나면 진짜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을 알게 되고 거를 수 있게 된다고.
하지만 나는 되려 내 주변 사람들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상처되는 말을 아끼고, 속으로 삼키며, 조용히 기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기대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