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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항암 일기] 연재

[항암 일기⑨] 가발을 맞추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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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을 맞췄다.
머리가 잘 빠지지 않아 그냥 둘까 생각했는데,
정확히 2주가 지나니 머리가 우수수 빠지기 시작한다. 
아직 보기에 불편하다기보다는, 생활이 불편해서 그냥 밀어버리기로 한다. 
병원에서도 부작용으로 인한 통증보다 머리 미는 걸 더 걱정한다.
환자들이 심리적으로 무너지는 순간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머리를 미는 건 생각보다 수월하고, 마음도 괜찮은 일이었다. 
얼굴 트러블이 하도 심해지니까 오히려 머리를 미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엄마는 내가 심란해질까 봐 옆에서 안절부절못한다.
엄마는 옛날에 어떤 기분이었다는 둥, 
요즘 가발은 이렇고 옛날 가발은 그렇고, 
그래도 이렇게 요즘엔 좋은 가발 미용실이 있어 좋다며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안 해도 될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엄마 잔소리에 기가 질려 나오려는 눈물이 쏙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가발을 맞춘 뒤에 들른 피부과에서도 그랬다.
동네방네 들으라고, 얘가 암환잔데 피부약을 먹어야 한다며 
피부과에 입장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쳐버린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다시 아기로 돌아가버린 딸을 보면서 약해진 엄마의 마음이
과거 씩씩했던 엄마를 소환했는지도 몰랐다. 
그 덕분에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물론 잔소리를 잔뜩 하기는 했다.  
 
머리를 밀고 가발을 맞춘 후에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니
양볼에 빨갛게 여드름이 올라온 중학생 소년 같다.
아이는 내 머리를 보더니 흠칫 놀랐지만,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남편은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더니,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한다.
 
생각보다 머리카락은 금방 자라고 두피는 약하다. 
항암 후 2주가 지나면 머리카락이 마구 자라는데 그 속에서 뾰루지가 난다. 
약을 먹을 수는 있지만, 항생제를 더 먹고 싶지는 않아서 조금 참아본다. 
머리카락이 자라면서 동시에 빠지기도 한다. 
머리 앞쪽은 세수를 하면서 훅훅 빠지는데, 뒷머리는 잘 빠지지도 않는다.
생활에 약간의 불편함이 있다.
 
가발은 너무나도 반짝이고 세팅이 잘 되어 있어서, 
가발을 쓰고 외출을 할 때마다 화장을 하고 눈썹과 구레나룻을 그려야 한다.
화장을 하면 마냥 트레이닝복만 입고 살 수도 없다.
화사한 옷, 치마도 입어본다. 
이렇게 반강제적으로라도 화장을 하다 보니 암환자라는 핑계로 무기력하게 있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