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를 받은 날, 엄마와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엄마는 이것이 다 당신의 죄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시집 생활, 사업의 성공과 실패,
여러 차례 반복됐던 수술과 유방암,
아빠와의 이혼과 기어이 이어지는 질긴 악연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조금의 평화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딸의 유방암이라니, 게다가 전이일 수도 있다니.
엄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에는 그 정도의 죄를 지은 것 같지 않아,
전생에 큰 죄를 지었나 보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나는 조금 웃었다.
엄마와 있으면 나는 어떤 불안에도 크게 웃을 수 있다.
남편은 얼른 믿지 않았다.
며칠 전, 회사 동료의 유방암 소식을 내게 전하면서
"오죽 스트레스를 받으면 가슴에 뭐가 생기는 거냐"면서 안타까워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딱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 부인의 고통이나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사실 최근 나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남편이었으므로.
남편은 딱히 감정적으로 공감해주지 않는 내 멍한 눈빛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안타까운 건 그의 인생이었다.
남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를 잃었다.
심장마비셨다.
사업을 하시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 못하시는 아버지셨다.
어린 아들과는 데면데면했지만, 그래도 가족을 사랑하시는 분이었다고 했다.
그의 장모님, 그러니까 나의 시할머니 사이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꽤 많았다.
시댁 식구를 끔찍이 챙기는, 호통한 성격의 애주가셨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그분이 만날 수 있었다면 재미있었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어머님은 우리가 결혼했던 그 해, 결혼식 한 달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마지막은 내가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가족의 생계를 돌보면서도,
어머니 스스로의 입신과 사업, 개인적 인간관계를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셨다.
이후 어머니도 실패를 겪었고, 그 시기에 병을 얻으셨다.
위암 4기 판정을 받으셨다. 암센터에 입원하는 데에도 몇 달이 걸렸다.
가족들과 당사자는 애가 탔다.
아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항암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호스피스로 옮겨졌고,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셨다던 빼빼로 데이에 돌아가셨다.
시누는 그날이 뭐 그렇게 좋은 날이었냐며 원망과 슬픔을 뒤섞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해는 세월호 사고, 트럼프 당선이 있었던, 정치적으로 민감한 해였다.
우리는 같은 해 12월에 결혼했다.
8년 후 남편은 다시 가족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다.
다시 가족을 잃을 수도 있는 그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오히려 자유를 주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큰 걱정거리를 남겨 절대로 나를 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
그것이 신경 쓰이고 미안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병을 알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이 두 사람이었고,
그리고 나의 아이였다.
병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