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말하는 아름다움
M2007001 이원경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제주도의 '4․3항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웠겠지만 교과서의 단 한 문장으로 흘려들었을 뿐, 그 사건이 나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답사를 준비하면서 4․3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공부해야만 했다. 끔찍한 학살의 기억을 대면하기에 책은 너무나도 피상적이었다. 소설은 아무 이유 없이 고통 받아야만 했던 사람들을 그리고 있었고, 역사책은 전투의 과정을 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내 머리 속에서 하나로 이어질 수 없는 이질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도 답사는 관광도시에 가려진 4․3사건을 발굴해 오는 여행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도 여러 번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지만 결국 예전과 다르게 경직되고 무거운 마음으로 제주도 답사를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오승국 선생님은 우리의 여행이 제주도를 다시 알기 위한 여행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채록도 아니고 답사도 아닌, 관광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관광'은 우리가 흔히 하는 해수욕장이나 돌아다니고 유명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제주도의 풍광을 먼저 몸으로 접하라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자연경관을 새롭게 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제주도가 아름다운 섬이라는 사실을 이미 익히 알고 있다. 그리고 답사를 위한 2박 3일의 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풍광은 버스 안에서 돌아다니면서, 그리고 답사를 하는 중간에 틈틈이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풍광을 구경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접하기에 2박 3일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과연 이 선생님과 우리가 계획한 모든 일들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영남마을 터를 답사하기 위해 제주공항에서 1100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1100도로는 한라산 중턱을 넘어가는 도로이기 때문에 고지대를 통과한다. 따라서 버스를 타고 달리는 중에도 한라산의 봉우리를 가까이 마주할 수 있었다. 오승국 선생님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영남마을을 찾아가는 1100도로를 달리던 중, 중간에서 차를 세우셨다. 도로의 중간에 난대림 자생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아름다운 제주를 느껴보라고 하셨다. 난대림은 열대와 온대의 경계에 있는 삼림을 의미한다. 상록활엽수대라고도 하는데, 깊은 계곡 아래 푸른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가을에 접어드는 아름다운 계절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이제 제주도에 막 도착한 우리는 아름다운 풍광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러 차례 제주도를 방문했었지만 바닷가 이외에 이런 삼림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풀이 계곡을 따라 구불구불 내려가서 바닷가에 가 닿았다. 이것이 이번 답사에서 제주도와 첫 인사였다.
짧게 난대림 자생지를 구경하고 차로 돌아왔다. 버스는 5분간 달리다가 도로 중턱에 섰다.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도로도 없었다. 사람은 물론 없었다. 1100도로를 달리는 차들 뿐이었다. 작은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마을의 흔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펜션을 짓다가 포기해버린 흔적들이 폐허처럼 남아 있었다. 마을 입구에 과거 영남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말라있었다. 그곳에서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를 한껏 받으며 영남마을로 내려갔다. 마을에는 단 한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산다고 했다. 사람의 흔적은 그 분의 집과 밭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뱀을 쫒았다는 대나무와 울타리 역할을 했던 돌들이 남아 옛 사람들이 살았던 집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동학농민운동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한다. 해변에 살면 쉽게 잡히니 한라산과 해변의 중간, 즉 중산간 지방에 터를 잡은 것이다. 그들이 화전을 일구면서 살았던 층계 밭에는 지금도 농사를 일구고 있었다. 50가구, 대략 120명이 살고 있던 당시 마을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남마을의 120명의 사람들 중 70명이 4․3으로 목숨을 잃었다. 입구에서 느꼈던 음침하고 무서운 분위기는 그런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영남마을의 몸통은 강한 햇빛을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무는 사람들의 죽음보다 생명력을 더 느끼게 했다. 영남마을이 폐허가 된지 반세기만에 나무들은 강하게 뻗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아직도 아름다움을 지닌 장소였다. 지금은 한명밖에 살지 않는 빈 공간이 되어있었지만 생명력이 있었다. 제주도 답사의 본 목적은 잠시 잊어버린 채 아름다움에 푹 빠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어보았지만 내 눈에 담을 것을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외돌개와 정방폭포, 쇠소깍 해변을 둘러보았다. 외돌개는 고려시대 최영장군이 몽골인을 소탕했다는 곳으로 지금도 관광지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대장금 촬영지로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 제주도의 바닷가. 해수욕장이 아닌 깊고 푸른 물의 바닷가, 햇빛에 반짝이는 바닷가, 가을의 단풍과 어우러지는 바닷가는 예술 그 자체였다. 정방폭포도 관광지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거대한 폭포 아래는 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정방폭포는 4․3의 또 다른 기억이 남아있기도 한 장소이다. 바로 숨겨진 학살터이기 때문이다. 폭포의 꼭대기에서 총을 맞고 추락한 많은 사람들이 곧장 바다로 흘러들었다고 한다. 폭포 밑에 쌓인 시체들로 바다는 핏빛을 이루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폭포 아래, 바닷가에 보이지 않는 사연들이 있다는 사실이 슬펐다.
사람들이 흔히 알지 못한다는 쇠소깍 해변도 대단했다. '깍'은 시내와 바다가 곧장 연결되는, 제주도만이 가진 특이한 지리를 의미한다고 했다. 소처럼 생긴 연못이라고 하여 쇠소깍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곳은 거대한 바위와 짙은 빛깔의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배를 띄워 굿을 하고 소원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지금도 밧줄에 매달린 배가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하루의 일정이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었다. 숙소에서 짐을 풀고 나와 김석보 할아버지를 만날 준비를 했다.
김석보 할아버지는 4․3항쟁, 많은 주민들이 학살을 당할 당시 살아남았던 많지 않은 생존자 중 한 분이다. 현기영의 「순이삼촌」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인물로도 유명했다. 우리는 오승국 선생님의 도움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북촌, 너분숭이 애기무덤의 한 가운데에서 김석보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제주도의 무덤에는 마치 땅의 보호를 받고 있는 듯이 주변에 둥그렇게 돌이 둘러쳐져있다. 너분숭이 애기무덤은 그런 어른 무덤과 같은 모양으로 1/3 크기였다. 얼마나 작은 존재들이 희생을 당했던 걸까. 미처 집에 돌아가지 못한 영혼들의 뼈를 발굴하던, 위령탑 건축을 위한 작업이 한창이던, 그 너문숭이 애기무덤의 가운데 30명의 학생들이 동그랗게 앉아 김석보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숨겨져 있던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섰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제주도의 기억은 관광도시 '제주'에 묻혀있다. 사실 아직 이 사건은 끝나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더 이상 4․3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물론 "덜 설워야 눈물나쥬"라고 말씀하시던 김석보 선생님의 말처럼, 너무 아픈 기억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우리들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그분들에게 큰 실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침묵하는 것은 아직도 공포가 남아있기 때문에, 억압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4․3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고 해도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남아있는 기억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큰 사건을 겪었음에도 모두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은 너무나도 인간적이기에 가슴이 아팠다.
김석보 선생님을 만나고, '너분숭이 애기무덤을 덮어오는 어둠속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늘의 모든 경험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부터 보았던 모든 것들, 한라산 중턱에서 바라본 제주도의 바다와 삼림, 계곡과 바위, 하늘과 폭포. 그 모든 것들은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더욱 진실답게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제주라는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섬에 깊게 패인 생채기이다. 하지만 그 생채기는 아픔만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 안에서 살아남은, 살아남아서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사람들의 생명력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제주의 아픔을 만인에게 공개하고 도려내려고 답사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아픔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조차 불가능할지 모른다. 피상적으로 국가의 내전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한명의 인간의 삶이 파괴되었다는 사실, 치열하게 고통을 견뎌야만 했었던 인간의 문제에 봉착하는 순간 우리도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제주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는 핏빛의 서사가 담겨있다. 그래서 제주의 풍광은 더 아름답고, 더 슬프게 다가온다.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아름다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와 이념 아래 벌어진 치열한 내전 안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리고 진정 아름다운 자연이 지키고 있었다. 앞으로의 일정이 제주의 아름다움 안에서 그들을 되찾고 기억하는 시간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