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1학기 때 쓴 것. 완전 초 허접이지만 뿌듯함...
정말 열심히 쓴 글이니 퍼가거나 인용할 때 꼭 덧글 남겨주시길... ㅠㅠ 플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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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엽 연구 1-
1. 서론
2. 자본주의 시대, 변질된 가족의 모습
2-1. 가족구성원의 부재와 좌절 -「楊서방」
2-2. 가족 내 개인의 소외 -「누님」
2-3. 공동체 의식의 붕괴 -「저녁」
3. 결론
1. 서론
1930년대는 일본의 식민주의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점차 군국주의적인 면모를 강화하고 중국 대륙의 침략을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아 경제적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또한 내선일체론을 내세워 식민지 한국을 완전히 동화하고자 하며 황민화 정책을 한국 사회에 강요하였다. 이렇듯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문학의 사상적 탄압 또한 높아졌다. 문단에서는 카프가 해체되고 프로 문학이 쇠퇴하면서 소규모의 동인 활동이 다양해졌다. 이 시기의 문학은 이념 추구의 경향이 사라지고 개인의 정서에 입각한 문학의 경향이 뚜렷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1930년대 말기에 간행된 『문장』과 『인문평론』등 순문학 잡지는 많은 신인들을 배출하였다. 김소엽 또한 1934년 1월『조선중앙일보』를 통해 신진작가로 등단한다. 김소엽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화폐 경제사회에서 소외된 소시민의 좌절, 인간성의 상실, 식민지 시대의 비극 등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특히 가족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는 것을 몇 편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 그의 단편소설「楊서방」,「누님」,「저녁」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형되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찾아보고 김소엽만의 근대비판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김소엽의 가족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김소엽의 가족관은 그의 생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와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수필 「좀더 嚴格하셨으면」에 잘 드러난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너무나도 평범하고 유약하게 살아왔음을 안타까워한다.
방임주의! 아버지가 우리 칠 남매를 키워온 태도는 너무도 그렇게 관대한 것이었던 만치 철없는 나는 아버지의 방임주의에 동화하고 순종하기를 싫여하고 도리허 반발하려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고 더구나 다섯 누이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난 나는 가정에 있어 저절로 「조고만 폭군」이 되어 버렸다. 나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이면 아버지는 한번도 반대하시는 법이 없이 그것이 책이건 모자이건 작난감이건 척척 사다주셔 나는 도리혀 아버지의 그런 고마운 은혜에 둔감해 버렸고 따라 넉넉지 못한 가정에 태여 나서도 남들처럼 쓴 고비를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부처님같이 인자한 아버지였다.
그의 소설에 자주 나타나는 궁핍한 가족의 모습이나 소시민적인 삶의 태도는 자신의 가족, 특히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부족함 없는 온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인자한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았기 때문에 조그만 폭군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겉으로 보기에 김소엽은 가족 내에서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에 해체되고 좌절하는 가족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것은 그가 자신이 갈망하는 가족의 모습이 차차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전통적이고 온화한 삶을 지속하려는 가족구성원의 노력이 자본주의 원리 안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좌절하는지 여실히 그려내는 것이다.
2. 자본주의 시대, 변질된 가족의 모습
한국의 전통 사회는 유교 지배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로 가정의 유지를 위해서는 가족노동력이 필수적인 요소였다. 따라서 농경사회는 다산주의 가치가 중요하므로 대가족을 지향한다. 그 가족의 유지는 부계제와 적장자 중심으로 수직적 가계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신분제를 유지했던 전통 사회에서 결혼은 신분제를 재생산하는 주요 기제이며 부부관계는 부자관계를 맺어주는 매개이다. 따라서 전통적 결혼제도도 개인의 사랑이 전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농촌사회에서의 가족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협업을 중심으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가족관계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변질된다. 근대화 과정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전통과의 불균형한 충돌 아래에서 겪게 된 서구의 유입은 오히려 전통의 변질을 가져오게 된다. 근대화를 겪으면서 전통적 가족 문화는 한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는데 필요한 몇몇의 요소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진다. ①소비와 자산, 복지의 단위로서의 가족주의, 여성의 경제적 안정의 수단으로서의 가족주의 ②권위주의적 산업화 사회를 유지하는 부계제, 적장자원리 ③전통적인 부부유별의 원리, 부양․피부양 관계의 부모자녀관계가 그것이다. 김소엽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와 충돌한 전통적 가족 관계를 바탕으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그것은 근대에 이르러 오로지 자본을 통해서만 관계를 맺게 되는 가족관계와 황폐해진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2-1. 가족구성원의 부재와 좌절 -「楊서방」(1937)
「楊서방」에 나타나는 가족의 운명은 아들이 없는 현실의 서글픔을 중심으로 흐른다. 이 가족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한 가족의 형태가 아니다. 늙은 어머니와 아들인 楊서방과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며느리뿐이다. 전통적 가족에는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구성원인 아버지와 자식의 부재는 어머니와 아들뿐인 가족에게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다. 楊서방은 아들이 있어야 남의 밭을 빌려서라도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가난은 아들이 없어서 생겨난 운명적인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가난은 그들이 처한 운명의 결과로만 인식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양서방은 자신의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자리에서 두 번 밀려난다. 처음은 한문 사숙(私塾)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신학문을 가르치는 사립강습소가 생기면서 서당에 아이들이 사라진다. 두 번째는 양조장의 서사로 취직이 되었으나 새로 들어온 청년이 먹으로 쓰던 구식 치부를 없애고 서양 장부를 쓰게 된다. 게다가 음력으로 쓰던 것도 양력으로 바꾸었다. 양서방의 자리에는 신식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자리를 잡게 되고 양서방은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보양꾼이 된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경제력을 지킬 수 있는 자리를 모두 잃게 된 양서방은 자신의 권위는 양보하더라도 경제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필요해진다. 그 수단은 아들을 얻는 것이다.
전통사회의 아들의 역할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그것은 유교적 전통에 따른 사속(嗣續)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다. 가풍을 이어서 제사를 지내는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과거의 가족은 수직적 체계인 부자관계를 통해 가풍을 이어갔다면 이 관계는 근대에 이르러 깨어진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보양꾼 노릇을 하며 경제적 어려움의 극에 달한 양서방에게 아들은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만을 지니는 것이다.
언제인가 이웃 봉삼네 집에 부자싸움이 났을 때에도 양서방은 아들을 깔고 앉인 봉삼 아버지를 뜨더 말리며,
"성님! 걱정이나 싸움두 자식을 뒀게 하는 게 안유? …(중략)… 옛 성현도 천불생무록지인이요, 지불생무명지초(天不生無祿之人 地不生無名之草)라고 본디 녹없는 사람과 이유없는 풀을 내지 않었다 했고, 차소에 외중이 빌어먹는다는 말도 있지 않소. 자식 하나 없는 내 집은 왜 이다지 가난하다는 게유?…"
사실 양서방의 말은 조금도 그른 말이 아니다. 시골 사람은 그래도 일직이 자식을 두어야 할 게, 자식만 일직 낳아두면 자라는 대로 모두 제 구실은 하게 되는 것이다. 남의 땅을 붙여먹드래도 손쉽고, 남의 품아시를 해주더래도 여럿이면 그리 숨이 찰 것은 없지 않은가.
자식은 후계자로서 가족의 미래가 되고 가족이 꿈꾸어 온 이상향을 실현하는 존재여야 한다. 양서방은 이러한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부모를 모르는 한 아이를 자신의 친 핏줄이라 속이고 집으로 데려오기까지 한다. 양서방과 상룡할머니는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기뻐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이를 통해 수직적 위계질서가 곧바로 부부라는 수평적 질서로 변환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양서방과 그의 어머니는 수평적 위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 원리는 경제력 유지에 두는 것이다. 이는 권위주의적 산업화 사회를 유지하는 부계제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렇듯 필요에 의해 결합된 가족은 사소한 다툼에도 쉽게 해체되고 만다.
이러한 모습은 부부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며느리는 가족 공동체의 의식을 전혀 지니지 않는 인물이다. 상룡 할머니에게 모든 일을 떠맡기고 자신은 낮잠을 잔다. 이 며느리는 양서방이 자식을 얻기 위해 들여온 수많은 여인 중 한명이며 서로에 대한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며느리가 기다리는 것은 오직 남편이 섬에 나가 보양꾼 노릇을 하여 받아오는 돈 뿐이다. 이렇듯 상호간의 인간적인 소통이 결여된 부부관계는 물질적으로만 유지된다. 따라서 그 물질적 유대가 사라지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쉽게 붕괴되는 것이다.
가족을 재구성하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양서방과 상룡할머니는 과거의 전통적 가족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했다. 이미 인간관계가 물질적으로 유지되는 현실에서 가족 내의 공동체 의식이나 사랑이란 감정이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자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을 한탄하면서 울부짖지만 이것은 단순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은 전근대적인 의식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이 근대화의 물결에 부딪히면서 겪는 좌절을 가정의 내부를 조명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2-2. 가족 내 개인의 소외 - 「누님」(1936)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가족과, 그러한 가족으로부터 비껴서 있는 누나 남순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태호는 집을 떠나간 누님인 남순을 찾아 U읍으로 떠난다. 어려서 애꾸가 된 남순은 매부의 집에서 쫓겨난 뒤 U읍에 가서 공장에 밥을 지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남순과 매부를 부르고는 다시 결합할 것을 요구한다. 남순과 매부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그 약속을 받은 아버지는 웃으며 눈을 감는다. 아버지의 죽음은 상징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아버지는 가정을 통제하고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이다. 특히 협업이 중시되는 농촌생활의 아버지는 '남자다움'과 '부권'의 이미지를 창출한 장본인이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생존이자, 세습재산이며 영광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가족이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과 같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침상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용서를 구하고 화합하는 자리가 된다. 아버지의 죽음은 절대적 권위의 상실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계기이다. 결국 남순과 매부는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그와의 약속을 깨고 각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다.
남순은 전통사회의 관습을 그대로 내면화 한 여인이다. 남편의 집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순종적인 마음을 그대로 지닌다.
"만약 사둔댁에서 누님을 다시 오라구 불으면 어떻게 하겠소?"
하고 기어코 뭇고 싶던 문제를 끄냈더니
"가지!"
누님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이러한 그였다. 혹 누가 그더러 그까짓 시집은 단념하고 다시 개가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을라치면 그것을 큰 모욕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미 강씨집 귀신이니 죽더래두 그 집 대문 앞에 가서 죽겠다!"
… 여기에 순진하고도 완고한 그의 동양적 윤리관이 깃드러 있는 대신에, 꽃다운 청춘을 속절없이 늙히지 않을 수 없는 기막힌 운명이 가루 누워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여기서 "순진하고도 완고한 그의 동양적 윤리관"이라고 직접 언급한 것을 볼 때 화자인 태호가 '동양적 윤리관'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순이 그러한 의식을 고수하면서 스스로 즐길 줄 아는 능력을 상실하였고 희망을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소엽의 다른 소설인「암(癌)」에서도 결혼을 앞둔 한 여성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옥점이는 부유하고 남자다운 은행 사무원 '박'에게 청혼을 받은 것이다. 옥점이는 얼떨결에 청혼을 승낙하고 손가락에 낀 커다란 반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개성을 말살해버리는 '박' 이라는 사내의 무가치함을 깨닫고는 결혼을 포기하고 떠나게 된다.
「누님」보다 일 년 늦게 발표된「암(癌)」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자신의 개성을 깨닫고 남성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벗어던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옥점'이 '남순'보다 근대적인 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남순은 남편에게 사랑을 느껴서도 아니고, 그 집의 돈을 노려서도 아니고 단지 자신의 가족과 자신에게 돌아올 수치를 피하기 위해서 강씨 집안의 가족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결국 강씨 집안에서 쫓겨난 남순은 삶의 의미를 잃는다.
남순은 집으로 돌아온 지 삼 년 만에 집에 폐만 끼치는 것 같아 여공으로 일을 시작한다. 자신에게 돈이 특별히 필요하지는 않지만 집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자신의 아들(기종이)이 큰 후에 교육비로 쓰기 위해서 일을 한다고 말한다.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으로 받은 임금을 사용하는 사람이 건강한 문화적 생활을 누리는 수준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남순은 건강한 문화적 수준을 누리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 소속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노동자가 된다. 시집을 제대로 가지 못한 신체적 불구자로서 경제적으로라도 가족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어야 한다는 자책감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부모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일을 하러 집을 떠난 남순이를 마치 심청이와 같이 지극한 효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효와 관계없이 남순이 집을 떠나 노동자로 일하기 전에 남편의 학대와 가족들이 준 눈치가 남순을 집 떠난 유랑민이 되게 만들었을지 모르는 일이다.「암(癌)」의 옥점이 근대적 사유를 통해 문제를 극복한 여성이라면, '동양적 윤리관'을 지닌 순종적인 여성의 모습과 가족 공동체에서 소외된 노동자의 모습을 동시에 갖춘 남순은 전근대와 근대의 충돌에서 좌절당한 인간이다.
2-3. 공동체 의식의 붕괴 -「저녁」(1935)
「저녁」은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가정의 생계를 꾸려나가던 가장의 역할이 상실된 명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여기에도 명철의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데 이를 통해 그가 제강소에서 일하고 있을 때까지는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 가고 있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명철이 병에 걸려 집에만 누워있게 된 후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병에 걸린 명철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집 안팎으로 시달려야 한다. 아픈 가족 구성원, 특히 가장은 가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마저 집에 돈이 없어서 산 사람도 죽게 생겼다며 한탄한다. 명철은 이 이야기가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는 것이며 자신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병자에게는 가족 또한 편안한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이는 위의 <누님>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소외되는 개인의 비극이 가정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가족 뿐 아니라 친구, 이웃으로부터의 소외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친구의 배신과 모욕은 과거의 가치관과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매우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었던 친구의 집은 벽이 높아지고 자신의 목소리마저 외면하는 차가운 장소가 된다. 명철이가 진수의 집에 찾아 간 장면에서는 집의 담이 높아지고 상호 소통이 자유롭지 않게 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큰 기와집 대문 위에는 확실히 대리석으로 맨든 진수아버지의 커다란 문패가 붙어있었다. 명철이는 밖앝 대문에서 불러보려다가 안청이 깊어 들리지 않겠기에 중문까지 들어섰다. … 대답이 없다. 또한번 불러보았다. 역시 잠잠하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 명철이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불러보았다.
예전처럼 집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이웃들이 어려움 없이 드나들던 집의 모습이 아니다. 집의 형태 변화는 그 가정의 경제적 능력을 반영하며 또한 집 안의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과거에는 집 밖의 거리가 사생활의 일부였으나 이제는 집이 독자적인 생활공간을 부여받는다. 봉건적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개인적 공간으로 의식과 주거 형태가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한 주거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능력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독자적인 생활공간은 부자들에게 먼저 나타나며 곧 빈곤층에게 욕망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도 진수의 집은 사적인 공간이 되었고 외부인은 집 안에 있는 귀중품을 노리는 적이 된다. 큰 기와집의 대문은 그를 방어하는 요새의 모습을 띤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을 호의적으로 받아줄 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친한 옛 친구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적이 된다.
3. 결론
가족은 부부의 결합, 아이의 출생과 양육과 같은 생물학적 필요성에 근거하는 동시에 사회질서에 의해 제한을 받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가족도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 것이다. 현재의 '가족적'이라는 단어는 친밀하고 소규모적인 관계,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과거의 전통적인 가족은 소규모적이지 않았으며 사적이지도 않았다. 각자의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지만 상호보완적이었고 윤리적 도덕관이 분명했다. 이러한 가족의 변화는 명백히 사회의 변화와 관련을 맺는다. 변해가는 경제구조에 맞게 가족의 형태는 변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적 가족의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족의 형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대가족의 형태가 핵가족의 모습으로 끊어지고 뒤틀어지는 과정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김소엽은 핵가족화의 원리가 자본주의 소산임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현재의 가족의 모습이 정착되기까지 전통적 가족관이 위협을 받아야 했던 당시의 수난을 기억하게 한다. 그의 소설을 통해서, 현대사회에 경제적 이유로 헤어지는 부부와 떨어져 생활하는 기러기 아버지, 심하게는 부모 살해와 자식 살해가 벌어지는 가족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떠한 변화가 있었으며 어떠한 어려움이 발생했는지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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