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전영택은 목회자, 종교가이면서 동시에 소설가라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는 작가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추구하는 휴머니즘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 본위의 예술을 추구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전영택은 민족과 문화의 생명은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회자로서, 작가로서 전영택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끌고 교화하고자 했고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인간성 회복에 충실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의식이 작품 속에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이 글은 1948년『문예』를 통해 발표된「크리스머스 새벽」을 중심으로 전영택의 기독교 의식에 대해 분석한다.「크리스머스 새벽」은 해방 전후를 통과하며 고통을 겪는 한 가정이 신앙심을 통해 고통을 극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대의 급변기를 배경으로 쓴 작품이기 때문에 작가가 인간적인 갈등과 종교적 이상을 어떻게 조화하였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70편에 가까운 전영택의 소설을 모두 분석하지 않고 단 한편의 작품으로 작가의 의식을 평가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은「크리스머스 새벽」에 나타나는 기독교 의식을 찾아보는 것으로 한정한다.
Ⅱ. 본론
1. 죄와 회개
남편인 강열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3년 징역을 살고, 상해로 달아나서 임시정부와 대한독립당에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다시 잡혀 7년 징역을 마친 인물이다. 가정을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 양복점을 시작하였으나 그 또한 망하게 된다. 마리아는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교회로 나가 예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강은 마리아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좌절한다.
『돈이 있어야겠다. 돈이 힘이다.』강은 강대로 돈에 대한 압박과 돈의 필요를 절실히 느꼈다. 좀 큰 돈을 벌어서 사나이의 큰 배포를 펴보려고 하여 금광에 손을 댄 것이었다. 그래서 마리아의 말에는 비웃듯이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547)
마리아는 술을 마시고 횡포를 부리는 강에게 함께 예배당에 가야한다고 설득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547)"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인용하며 회개해야만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회개란 기독교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즉 하늘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결국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적 선의 개념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은 법률로 재단할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하늘의 마음과 그 이웃,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를 얻는다. 술과 돈에 대한 욕구는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수단이기 때문에 본심을 사라지게 한다. 강은 결국 마리아를 떠난다.
2. 화해와 용서
강은 공산당에서 일을 하다가 잡혀 들어갔다가 모든 것을 뉘우치고 마리아에게 돌아온다. 마리아는 이미 서울로 내려와 있었다. 후에 강은 동지들과 일본군의 탄압, 그리고 궁핍한 생활 때문에 반동으로 공산당에 들어갔다고 해명한다. 마리아는 그런 강을 위로한다. "물론 그렇지요. 하나님께서는 다 용서하시지요. 무얼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시겠소…………참말 시장하시겠는데 무얼 좀 잡수셔야지(555)" 마리아는 강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모든 것을 용서한다. 마리아는 남편 없이 고생했던 순간들을 잊은 채 강을 온전히 받아들여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간다. 아이들도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잘 따르게 되었다. 강은 지나온 삶을 뉘우치고 회개하게 된 과정을 증언한다.
처음에는 꼭 죽구 싶은 생각뿐이야……춥기는 지독히 춥고, 온 몸이 얼어들어와서 잘래야 잘 수가 있어야지 이를 악물고 굳은 힘을 쓰고, 몸부림을 하구 지랄을 하구 야단을 하면서, 잘듯 잘듯 하다가 밤을 밝히구 하다가, 하루는 밤인데 몇 시나 되었는지 세상이 괴괴하고 쥐죽은 듯한데 그래두 어떻게 잠깐 잠이 들었지, 글쎄 분명히 똑똑히 당신의 목소리로,
「여보, 영애 아버지」(557)
하두 답답해서 나 있는 감방벽에 있는 낙서를, 전에 들어왔다가 나간 사람들이 써놓고 나간 글씨를 하나씩 들여다 보았지.
「김일성, 스탈린 망해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따위의 글씨 장난이 여기 저기 있는데, 한모퉁이 자그마한 글씨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한 것이 똑똑이 눈에 띄웁데다. …(중략)…그 전에도 보기야 보았지. 보구두 「흥! 예수쟁이」하구 무심히 보았지. 그런데, 그날은 왜 그렇게 까만 글자가 도드라지게 꼭 부각으로 새긴 것처럼 보이는지 (558)
강은 처음에 아내의 목소리를 통해서, 두 번째는 감방벽에 낙서처럼 써져있는 성경의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에서,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나락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이념의 투쟁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게 된다. 순수한 믿음을 지녔던 아내에게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돌아온 강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마리아 역시 변함없이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내의 사랑뿐이다. 마리아와 강은 이렇게 진심을 확인하고 화해한다. 화해는 미운 마음을 버리고 조건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3. 시대와 신앙
광복을 맞게 된 마리아는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계몽 운동을 시작한다. 자신도 독립운동을 하며 고생한 적이 있었던 터라 더욱 감회가 새롭다. 그런데 공산당 때문에 몸을 숙이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집안에 예고 없이 들어와 아이들을 위협하고, 집을 내놓으라며 쫓아내려 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두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내려간다. 서울에 내려와서도 고생을 하지만 남편을 만나 새 생활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새 생활이라는 것은 정치적으로 일방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그렇게 가장 충성을 했건마는 놈들은 나를 본시 장로의 아들이구, 여편네와 자식이 이남에 가서 침략자 미국의 앞잡이요, XXXXX의 앞잡이 노릇을 하구 있으니, 너두 이남하고 통하구 있으리라 하면서, 갑자기 집어 넣는단 말이지, 기가 막히지(556)
그 밤중에 그 「멸망」이란 말이 들리면서 속으로「이게 멸망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나구, 「김일성이두 이전 멸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구나」하는 생각이 나구, 그러다가 「옳다 나두 멸망이로구나, 아주 영원히 멸망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나서, 속이 아주 답답하구 안타까워 그러던 차야.(558)
공산당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가족들이 남한에 있다는 이유로 억압을 받아야 했던 강이 치를 떨며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강은 공산당에게 억류되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중 아내의 목소리를 통해 신앙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 신앙의 회복은 아내가 있는 남한으로 가는 것,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공산당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믿게 된다. 그에게 있어 김일성이 지배하는 땅은 하나님이 없는 '멸망'에 가까운 땅이다. 반면 아내가 있는 남쪽 땅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곳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강은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용서하신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니 영애 어머니는 물론 용서하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남한은 자신이 회개하는 땅이며, 용서를 구하고 영생을 얻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강은 아내와 자식과 상봉하여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가난한 생활 안에서도 성경을 읽고 찬송가 소리가 그치지 않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
강열의 이분법적 사고 - 북한=멸망=죄악 / 남한=영생=회개 - 는 전영택이 의도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해방한 이후이고 전영택 스스로도 이데올로기적 혼란 속에 있었을 것이다. 거기에 종교인으로서 의무감과 책임감까지 포함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많은 연구들이 이 작품의 화해와 용서의 모티브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 소설 안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전영택의 사상적 고민을 기독교적 윤리의 모습으로 바꾸어 이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Ⅲ. 결론
기독교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마르코 12:31)는 복음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작품 속의 강열은 이웃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과 가족마저 사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의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 의식은 정치적인 공간 안에서 벌어진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모든 이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검열하여 공산당에게만은 해당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강의 머리속에 이미 공산당은 멸망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박애주의, 휴머니즘이라 할 수 없다. '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인간적인 잣대로 전환하여 필요할 때에만 이용하는 것이다. 「크리스머스 새벽」은 기독교적 사상이 시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따라 방어적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영택은 해방 전 「화수분」을 통해서 가난한 가족의 죽음을 그렸다. 이 소설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삶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그야말로 종교적인 몫이며, 동시에 문학이 해소할 수 있는 요소이다. 「화수분」의 화자가 그들을 삶에 끼어들어 직접적으로 도움은 주지 못하지만 그들의 삶에 연민을 더하고, 조건 없이 애정을 담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크리스머스 새벽」은 종교적 의식이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지 못하는, 전작에 비해 종교적 ․ 문학적 의의가 부족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윤혜옥, 『전영택 소설에 나타난 작가의식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논문, 1995.
전영택, 표언복 엮음,『늘봄 전영택 전집』1권, 1997.
정문권,『전영택 소설 연구』, 배재대학교 석사논문, 1997.
최재선,『한국 현대소설의 기독교 사상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박사논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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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손을 다 못본지라... 수정해서 다시 올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