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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전」패러디 희곡 분석
-채만식의 「심봉사」, 최인훈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오태석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1.「심청전」다시 쓰기
린다 허천은 패러디의 목적을 '자아반영성 self-reflexivity'에 있다고 말한다. 예술은 자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보는 '거울'로, 과거의 텍스트를 거울로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패러디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패러디는 과거의 텍스트를 대할 때 '경의'와 '경멸'을 동시에 포함한다. 과거의 텍스트는 도전하고 해체시켜야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린다 허천는 같은 맥락에서 패러디를 '차이를 가진 반복' 또는 '비평적 거리를 둔 영속'으로 정의한다. 패러디는 과거의 텍스트를 새로운 역사의식으로 재창조하는 일종의 전략이다. 이는 과거의 텍스트가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낙관하는 것을 깨우치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반성까지 시도한다. 오늘날의 패러디는 새롭게 하는 힘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고전을 '다시 쓰는' 행위는 전통성을 재발견하고 유지하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색다른 충격을 받게 한다. 독자는 고전을 마주하면서 친근함과 낯섦을 동시에 겪게 되는 것이다.
판소리계 소설인 「심청전」은 시대마다 다른 시각과 형태로 각색되었다. 1936년, 1947년 채만식에 의해, 1978년에 최인훈에 의해, 그리고 가장 최근, 1990년 오태석에 의해 다시 써진 「심청전」이 그것이다. 「심청전」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친근한 고전이므로 대중성을 지니고 있어서 극이 각색 되었을 때 많은 관심을 얻었다. 네 차례에 걸쳐 재창조 된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은 각 작가의 특성과 시대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세 작가가 활동한 시대는 분명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30년대는 일제 말기로 식민지인으로서의 채만식의 의식을 볼 수 있을 것이며, 1978년 군사정권을 겪으며 체험한 최인훈의 의식도 볼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또한 한국사회가 자본주의 시대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이므로 쉽게 넘겨볼 수 없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마다 우리에게 '심청이'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고전의 「심청전」이 각 작품마다 어떻게 변화하는지, 각각의 작품이 어떻게 다른 의미를 지니는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작품 분석
2-1. 식민지 시대 이데올로기의 전복 - 채만식 「沈봉사」
채만식은 1936년과 1947년 두 번에 걸쳐 「심청전」을 각색한 희곡 「심봉사」를 발표한다. 1930년대에 활발한 소설 활동으로 유명했던 채만식이 희곡 작품을 여러 편 발표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우선 「심봉사」(1936)의 구성은 이러하다.
1. 심청이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봉사 아버지의 양육을 받는다.
2. 심청이 동냥, 품팔이를 하여 부친을 봉양한다.
3. 심봉사가 탁발승에게 공양미 300석 시주를 약속한다.
4. 심청이 공양미 300석을 대가로 선인들에게 몸을 판다.
5. 심청이 임당수에 몸을 던져 죽고 장가의 눈이 먼다.
6. 심봉사는 1년이 지나도록 눈도 못 뜨고 가산도 탕진한다.
7. 뺑덕어미가 황봉사와 도주한다.
8. 왕후가 걸인 잔치를 연다.
9. 왕후와 장승상 부인이 궁녀 김씨에게 심청이인 척하라고 시킨다.
10. 심봉사가 궁녀 김씨와 만나고 눈을 뜬다.
11. 심봉사가 자신의 눈을 찔러 다시 장님이 된다.
채만식의 「심봉사」(1936)는 총 7막중 5막까지 원작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채만식이 「심청전」을 소재로서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원작을 재구성하고자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심봉사」는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용궁에 갔다가 왕후가 된다는 신화적인 요소들을 모두 제거한다. 심청이 이미 물에 빠져 죽고 없는 현실을 믿지 못하던 심봉사는 심청의 죽음을 재확인하며 비극을 다시 체험하게 된다. 후반부의 전면적인 개작은 채만식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이것을 각색함에 있어서 첫째 제호를 「심봉사」라고 한 것, 또 「심청전」의 커다란 저류(底流)가 되어 있는 불교의 '눈에 아니 보이는 힘'을 완전히 말살 무시한 것, 그리고 특히 재래 「심청전」의 전통으로 보아 너무도 대담하게 결막을 지은 것 등에 대해서 필자로서 충분한 석명이 있어야 할 것이나 그러한 기회가 앞으로 있을 것을 믿고 여기에서는 생략하고 다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러한 태도로 집필을 한 것은 아닌 것만은 말해둔다.
채만식의 이 언급에 의하면 그가 각색한 극은 '눈에 아니 보이는 힘'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한다. 따라서 심청을 살려내는 환상적이고 설화적인 부분은 완전 생략하였으며 기존의 「심청전」에서 드러난 교훈적인 부분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청전」에서 나타나는 교훈성은 심청의 '효(孝)'이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공양미 300석을 받지만 그 300석은 앞을 볼 수 없는 심봉사가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심봉사에게 남겨진 돈은 모두 뺑덕어미의 술값과 놀이 값으로 탕진하고 심봉사는 다시 혼자 남겨지게 된다. 앞으로의 삶을 혼자 살아가야 하는 심봉사에게 공양미 300석은 무의미해진다. 심봉사를 눈 뜨게 하는 것은 심청이의 존재이다. 심청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자 심봉사는 눈을 번쩍 뜨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었고 모든 희망을 잃은 심봉사는 자신의 두 눈을 찌른다. 심봉사를 살게 하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은 딸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심청은 자신의 효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다. 채만식은 이런 역설을 통해서 전통사회의 윤리의식에 회의의식을 품는다. 채만식은 조선사회에서 강요된 집단의식으로서의 효의 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 감추어진 현실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채만식은 「심청전」을 각색하면서 효(孝)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을 회의하고 그것을 전복시키고자 하였다. 효 정신은 1930년대 군국주의의 강화에 의해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와 결부되었다. 따라서 효 정신은 전통적인 윤리관에서 조선의 우민화를 위한 식민지 교육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채만식이 당연시 되었던 절대적 가치에 의심을 품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대상은 심봉사 자체가 아니라 심봉사와 심청의 의식을 지배하는 효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식민지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는 군국주의적 지배담론이었다.
「심봉사」(1947)는 이전의 「심봉사」(1936)에 비해 인물들의 세부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1. 심봉사가 과거를 대비하여 글공부를 한다.
2. 심봉사가 탁발승에게 공양미 300석 시주를 약속한다.
3. 심청이 공양미 300석을 대가로 선인들에게 몸을 판다.
4. 송달이 찾아와 심청이 결심을 바꾸도록 설득하지만 심청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5. 심청이 임당수의 제숙이 되어 물에 빠져 죽는다.
6. 홍녀는 심청이 죽은 후 송달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심봉사 앞에서 심청이인 척해 주겠다고 제안한다.
7. 심봉사가 홍녀와 만나고 눈을 뜬다.
8. 심봉사가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된다.
두 번째 패러디 희곡인 이 극은 심봉사의 역할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과거를 준비하는 그는 살림과 현실에 관심이 없는 지식인이다. 이렇듯 세상 물정을 모르다보니 세속적인 탁발승에게 공양미 300석을 약속하고 만다. 심봉사의 행동에 보다 인과관계가 분명해지고 우연성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이 극의 장점으로 드러난다. 이 작품에는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한 명인 송달은 심청을 사랑하여 심청의 행동을 만류하려 한다. 그러나 심청은 그러한 송달의 제안을 거절한다.
심청 : 장차 눈을 뜨시게 허는 것도 뜨시게 허는 것이려니와 그렇게라도 해서 공양미 3백 석을 여일히 시주를 해드렸기 망정이지 만약 못했어보세요. (…중략…) 혀가 오그라져 벙어리가 되구, 봄배팔이에 앉은방이가 되구, (…중략…) 그 괴롬을 풀어드린 것만 해도, 제 목숨 하나 값은 넉넉히 한 것 같아요. 저 겉은 목숨 열도 아깔 것 없죠.
송달 : 그렇지만 대체 효도를 하는 데도 분수가 있구, 한정이 있는 법이지. 효도요 부모를 위하는 노릇이라고 그래 자식이 생목숨을 끊어야 옳아? 그게 차라리 불효지 어떻게 효도가 되는고?
송달은 이성적으로 심청을 설득해보려 하나 심청은 어떠한 초월적인 힘에 의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심봉사와 심청은 구시대의 패러다임의 의식을 그대로 지닌 인물이다. 그에 비해 송달은 그들을 설득하고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송달은 심청을 설득할 수 없었고 비탄에 젖어 심봉사를 위로할 방법을 찾는다. 심청이 죽은 후 심봉사를 위로하고자 하는 송달은 홍녀를 심청으로 속인다. 기쁨에 눈을 떴던 심봉사는 심청의 죽음을 다시 확인하고 개안을 거부하며 자신의 눈을 찌른다.
심봉사가 자신의 비극을 재인식하면서 스스로 벌을 내리는 장면은 오이디푸스의 그것과 유사한 면을 보여준다. 채만식은 심봉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비극적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소설에서는 풍자와 해학으로 유명한 채만식이 이렇게 비극적인 희곡을 썼다는 것은 의문점이다.
2-2. 폭력적 현실과 인간의 좌절 - 최인훈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최인훈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옛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고 자신이 재구성하는 부분은 세밀하게 첨가하여 역동적으로 구성한다. 특히 심청이 용궁에서 남성들에 의해 폭행당하는 장면은 대사 하나가 없이 지문과 무대장치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이는 최인훈이 희곡이 무대에 오르며 갖게 되는 특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는 이러한 구성을 형식적 구성에 국한하지 않고 내용의 극적 요소로 살리고 있다.
1. 심봉사가 백미 삼백 석 시주를 약속한 것을 심청에게 말한다.
2. 심청이 뺑덕어미의 소개로 색주가에 몸을 판다.
3. 심봉사와 뺑덕어미가 백미 백오십 석만 시주하고 나머지로 색주가를 차리기로 한다.
4. 심청이 '용궁'이라는 색주가에서 성(性)적 노리개로 산다.
5. 인삼장수 김서방이 심청을 구해 조선 가는 배에 태운다.
6. 심청이 해적들에게 잡혀가 비참한 노예처럼 산다.
7. 심청이 조선으로 돌아온다.
8. 심청이 눈멀고 미친 늙은이로 도화동에 산다.
이 극에서는 심청을 중심인물로 내세워 착취당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심청은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서 창녀로 팔려나간다. 그 이전에 심청을 몰아낸 것은 심봉사의 욕심이었다. 심청을 수양딸로 팔아서라도 두 눈을 떠야겠다는 심봉사의 이기심이 심청을 고민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심청이 팔려 나가고 나자 딸의 몸값을 오롯이 시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절반을 색주가를 차리는 데 쓴다. 심봉사가 뺑덕어미에게 버림을 받는다거나 피해자가 되는 장면은 이 극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심봉사는 뺑덕어미와 함께 심청을 돈과 교환한 악덕하고 비인간적인 남성성이 된다. 심봉사의 폭력으로 심청의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팔려나간 심청은 여러 남성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다. 그러나 심청은 거부하지 못한다. 폭행을 당하는 심청은 비인간적인, 인형에 불과할 뿐이다. 남성의 폭력성은 용으로, 심청의 무력함은 감정 없는 인형으로 대체되어 나타난다. 이 때 심청은 인간이 아닌 하나의 교환가치로서의 상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김서방은 그러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심청을 인간으로 대하는 인물이다. 매파도 심청이 김서방과 떠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김서방이 그만한 대가를 돈으로 지불했기 때문이다. 심청은 김서방의 마음을 진심으로 여기고 자신의 몸을 적극적으로 내어준다. 그러나 먼저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탔던 심청은 다시 해적에 의해 폭행을 당한다. 이제 심청은 교환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무기력한 물질이 되어버리고 만다. 조선에 돌아와서도 심청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심청은 가족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버림받은 인물이다.
용띠 심봉사, 용으로 형상화 되는 매파의 손님들과 해적들은 남성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심청은 여성성이 폭행의 대상이 되고 짓밟히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을 띤다. 최인훈의 심청은 채만식의 심청과 같이 신화적 의미를 상실하고 있으며, 현실의 무게에 깊이 잠식되어 있는 피해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남성성의 폭력은 여성들의 조력에 힘입는다. 뺑덕어미와 매파가 그러한 인물인데, 이는 여성에 대한 폭력성을 전적으로 남성에게 돌리지 않고 물질로 매개되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이 극은 윤리에 기대어 보다 나은 삶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물신주의가 만연한 사회구조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늙은이가 된 심청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과거를 미화해서 들려준다. 무참히 짓밟힌 과거에서 멈추어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김서방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심청이 아이들에게 용궁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심청 자신이 희망하는 환상의 세계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미 앞을 못 보는 늙은이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때서야 갈보가 된다. 심청의 좌절은 희망의 소멸과 함께 발생된다.
최인훈은 자신의 희곡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락한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은 타락을 인식하고, 그것에 비난을 보내거나 어떤 진정한 듯 보이는 것으로 보상하는 것보다는, 타락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타락을 진정성으로 바꾸기 위하여, 타락 속에서 싸우는 일일 것이다. 현실의 모순과 억압이 아무리 가혹하다 할지라도 그 모순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모순과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일이 우리가 할 만한 일이 아닐까? 작품의 전면적 개작, 특히 한자어를 비한자어로 바꾸고, 과거형 어미를 현재형 어미로 바꾸는 작업이 그의 한국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연장선상에서 수행되고 있음은 당연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작가의 훌륭한 인간적 성찰이며 문학적 성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 어렵고 성실한 작업이 역사적 현실을 배제하고 비역사적인 현실을 지향할 때, 개작이 갖는 의미는 어느 정도 한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생각된다.
위의 언급을 통해 최인훈의 개작활동은 타락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부조리한 모순과 대결하고자 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시대에 대한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미학적 대결을 원했고 따라서 갈등이 주축이 되는 희곡을 이용한 것이다.
2-3. 희생을 통한 정화 - 오태석의 「심청은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오태석의 「심청은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는 1990년 10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심청전의 본래 모습을 본 딴 것이 아니라 액자식 구성으로 '심청전'의 원래 이야기의 중간에 삽입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후 다시 환생하여 왕비가 되기 전 용왕과 함께 1990년대의 세상을 구경하러 나오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때 용왕은 심청에게 용궁으로 다시 돌아와 왕비가 되어야 할 것임을 일러줌으로써 이들의 여행이 「심청전」의 외곽 구조에 삽입된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구조는 「심청전」을 액자 밖 이야기로,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를 액자 속 이야기로 파악할 근거가 된다. 이 작품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심청이 용궁으로 떨어지고 서울로 올라가는 용왕과 동행한다.
2. 서울, 정세명은 도둑을 잡다가 아킬레스건을 잘리고 심청이 도와 병원으로 간다.
3. 정세명은 인수의 꾐에 넘어가 화염병을 만드는 비닐하우스로 들어간다. 심청은 그를 말리려 하다가 비닐하우스에 불을 내고 정세명은 얼굴에 화상을 입는다.
4. 용왕은 방화사주죄로 끌려가고 얼굴이 망가진 정세명은 유원지에서 백가면을 쓰고 망치로 머리를 맞는 '인간 타게트 게임'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백가면을 보고 자신의 원수의 사진을 걸고 망치로 그를 때린다.
5. 감정이 격해진 손님들이 보조원을 도구로 때려죽인다. 심청은 보조원을 잡고 오열한다. 정세명은 죄책감에 자신을 잡아 가두라고 말한다.
6. 용왕은 두부를 먹으며 출소한다. 용왕의 권유로 세명과 여자들, 심청이 함께 배를 탄다.
7. 세명과 심청은 자신이 탄 배가 새우 잡이 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반대하지만 여인들은 섬을 돌겠다고 한다. 여자들은 심청의 동의 없이 집단의 막내로 받아들인다.
8. 심청이 반항하자 용왕이 심청을 배에서 밀친다. 정세명이 용왕의 목을 조른다.
9. 정세명이 용왕을 물에 빠트린 후, 여자들의 빚을 탕감해주고 데려가겠다는 전화를 주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기로 하였다고 매스컴을 통해 밝힌다.
10. 여자들이 물에 빠지는 모습을 보며 심청은 괴로워한다가 여자들 대신 자신이 빠진다.
11. 전화는 오지 않고 여자들은 모두 물에 뛰어든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와 마찬가지로 심청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말한다. 원작의 심청이 효성이 지극하고 예의가 바른 인물이었다면 오태석의 심청은 현실감각에 맞는 윤리를 갖춘 인물이다. 이 극에서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의 삶을 존중하기 위해서 인당수에 빠진다. 이는 과거의 가치관에서 확대된 윤리관이며 인간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근대적인 윤리관이라 하겠다. 따라서 과거의 심청이 전통적 윤리관에 입각한 바람직한 자식의 모습, 여성상이었다면 오태석의 심청은 현대의 윤리관에 적합한 여성상,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용왕과 정세명은 기존의 심청 캐릭터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혹은 변화된 인물이다. 이들은 과거의 심청을 현대로 소환하는 역할을 하며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고 제시한다. 그런데 이들은 현실을 소개하면서도 긍정적이거나 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정세명을 도우려는 심청을 귀찮아하거나 지갑을 찾아주면 오히려 의심을 받는 현실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바라보지 않는 용왕의 모습에서 의아함을 느낄 수 있다. 용왕은 용궁에서 떠남과 동시에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로 변화한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에 불을 내도록 심청에게 사주한다. 이는 현명한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방화사주죄로 잡혀가고 만다. 정세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심청이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이미 만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인물이다.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하는 그는, 그 스스로도 세상물정을 잘 알지 못하고 매번 당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배 안에서 빚을 갚기 위해 몸을 팔겠다는 여인들을 구하려고 든다. 그러나 그의 해결책 또한 암울하다. 몸을 팔아 빚을 갚겠다고 했던 여인들은 애초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팔려나가기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파악한 그는 방송사를 불러 억지로라도 그들의 인권을 지키겠다고 나선다. 나름대로의 윤리관을 지닌 인물이지만 오히려 여인들을 물에 하나씩 빠뜨리는 비인간적인 행동을 자행한다. 그 행동을 저지하고자 하는 인물은 심청이다.
심청은 용왕과 정세명의 행동을 지켜보며 현대사회의 모습을 파악하고 가슴 아파 하기만 한다. 그러다 마지막 배 안에서 용왕이 여인들을 팔아넘기려하고, 정세명이 그들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물속에 빠뜨리는 모습을 본 심청은 자신을 희생하여 그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멈추려고 한다. 심청은 자신이 물에 빠지면 뱃사람들이 또 돈을 줄 거라며 그 돈으로 빚을 갚으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물에 빠진다고 해서 돈이 다시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순진한 심청의 발상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더 많은 여성들을 물에 빠지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무엇이 윤리적인 것이고, 무엇이 인간다운 것이며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유효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과거의 윤리관의 심청을 현대사회로 소환하여 오태석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오태석은 여자를 사서 돈을 벌려는 용왕의 흑심과 현대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정세명,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분노에 가득 찬 비인간적인 인간들의 행위를 심청이의 윤리관으로 단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심청의 그러한 노력도 결국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것이 현대사회의 딜레마이며 비극인 것이다. 오태석에 의하면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의 심청은 각박해진 세상을 정화하는 의미를 지닌다.
심청이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허물을 자기 몸 바쳐가지고 물로 씻어내는, 일종의 정화기능 같은 게 있잖아요. 뭐랄까 육신이 물로 들어갔다가 다시 씻겨져서 나오는데, 그것이 개안(開眼)과 연결되고.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한테 효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그런 것이 다 정화기능인데, 그런 기능이 요즈음 필요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것, 그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거죠. 무슨 얘기냐 하면 지금 우리가 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곧 눈을 뜨게 되는 게다.
위의 오태석의 말에 의하면 심봉사의 개안은 심청의 효성과 순수함 때문이며 그 정화의 기능으로 세상의 '개안'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이 쯤 되면 작가가 심청을 소환한 이유도 명백해진다. 그러나 그의 극 안에서 심청이 세상을 정화하는 의미를 충분히 수행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심청의 자발적인 죽음이 뒤에 남은 여성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근대적인 심청의 윤리의식이 현대의 모순 가득한 사회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비극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글의 구성이 명료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용왕과 심청이 갑작스럽게 서울로 올라가는 장면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예언'이라고 하는 우연성에 의존하는 전근대적인 의식도 볼 수 있다. 또 새우 잡이 배에 탄 여인들이 몸을 팔러 간다는데 환호를 하는 장면 등은 현실성이 부족하여 작가의 의식이 탄탄한지 의심하게 한다. 현대의 문제점을 나열할 뿐 그 이상의 작가의 시대의식을 반영하지 못한 것은 큰 약점으로 볼 수 있다.
3. 결론
지금까지 「심청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세 편의 희곡을 분석해 보았다. 각각의 줄거리 요약에 지나지 않는 부분이 아쉽지만 각 작품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각 시대마다 변용된 「심청전」은 그 시대의 특성을 나름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채만식의 「심봉사」는 고전 원작에 거의 충실하였다. 그러나 신화적 동기를 제거한 점, 심봉사가 딸을 잃게 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벌을 받은 점 등을 근대적 요소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근대적 요소는「심청전」에 나타난 전근대적 윤리관을 군국주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점유하던 시대의 가치관을 전복하는 무기로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린다 허천이 지적한 '차이를 가진 반복'으로서의 패러디를 잘 활용한 면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채만식의 극이 산문적 요소가 많아서 지루하고 구성이 치밀하지 못함에도 의미를 지니게 하는 요소이다.
두 번째로 최인훈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원작과 비슷한 줄거리를 이어가지만, 인물들의 행동의 인과 관계가 분명하고 캐릭터가 명확하기 때문에 근대적 특성을 지닌다. 이 극은 심청의 삶을 중심으로 여성의 핍박받는 현실을 고발한다. 윤리적인 인물인 '심청'을 피해자로 설정하고 물신주의적 세계와 권력자들의 폭력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오태석의 「심청은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는 세상을 정화하는 의미로 '심청'을 현대세계로 소환한다. 용왕과 정세명이라는 새로운 인물들과 함께 접하는 현대사회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모습을 바라만 보던 심청은 마지막에 모든 비인간적인 행위를 접고 자신의 희생으로 정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행동을 감명 깊게 받아들이는 자도 없을 뿐 아니라 이해하는 자도 보이지 않는다.
세 편의 극은 고전을 작가가 활동하는 당대사회에서 다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 극들이 지니는 차이는 시대의 변화와 작가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을 다시 쓰는 행위의 의미도 상세하게 고찰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각의 작가들이 희곡이라는 장르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함에도 그들이 어떠한 관점에 서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원래는 소설가였던 채만식과 최인훈이 그들만의 특성을 약간 양보하고 비극적인 희곡을 선택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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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문학과지성사, 2000.
린다 허치언, 『패로디 이론』, 김상구․윤여복 옮김, 문예출판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