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춘>
공간과 화폐의 인식은 근대성의 인식과 맞물린다. 시․공간은 화폐로 구획되어 판매된다. 한국의 모더니즘 작가 이상은 근대성의 인식을 바탕으로 도시공간을 소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여러 가지 가치들이 변질되는 양상을 불안하게 지켜본다. <봉별기>에서 '나'는 금홍에게 정조라는 것을 강요하지 않고 매춘을 권장한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매춘을 권장한다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태도는 금홍의 직업이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막을 권리가 없다는 식이다. 근대성 안에서 몸과 화폐를 맞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춘은 스스로를 근대적인 감각으로 드러내는 적절한 기제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매춘부들도 도시 안에서의 매춘행위가 얼마나 현실적인 것인지 알고 있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몸의 가치를 화폐와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파리의 공장 노동자들은 아내나 딸이 매춘하는 것을 또 다른 노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회의 시선 안에서 매춘부들은 당당하게 신체와 화폐를 교환했다. 그리고는 화려한 장신구와 화장을 사용해 매력을 더하고, 도시의 무감각해진 사람들의 식욕을 돋우는 매력적인 여자로 변해갔다.(1125) 매춘부들은 자신의 신체를 화폐화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남성적이고 권력적인 시선을 전유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상품성을 매겨 근대성을 온몸으로 체화하면서 근대의 남성성을 비웃는다. 퇴폐와 타락의 혁명적인 측면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의미한다.
그녀들은 돈의 기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며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남성들로부터 대가를 얻는다. 남성들은 매춘부와 보낸 시간을 화폐로 보상하지 않으면 심한 수치심을 느낀다. 매춘부는 도시에 생긴 수치심의 상처이며 사회는 돈으로 그것을 치유한다. 그녀들은 자신들을 부도덕으로 치부하면서도 간절히 열망하는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화폐를 통해 사회를 이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적인 것을 숨기거나, 점잔은 척 위장하지 않는다.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에 그려진 올랭피아는 전신 나체로 침대에 누워있음에도 전혀 외설적인 분위기를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적인 욕망이 가득 찬 감상자의 시선을 무시하듯이 정면을 똑바로 바라본다. 여기에서 신성화되지 않은 여성의 몸은 창녀를 나타낸다. 관람자들은 "비너스 대신 모델이 된 거리의 여성은 파리의 밤과 같다"고 생각하고 격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네는 몸은 벌거벗었으나 시선은 그렇지 않은 창부를 표현함으로써 독창적인 방식으로 남성적 시선의 기대에 도전한 것이다.
매춘부들은 정기적으로 의료검진을 받았는데 이러한 검진들은 매춘부들을 규제하고 훈육․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검진에서는 여성의 질을 직접적으로 검진을 했는데, 이러한 감시는 진단적이고 징벌적인 기능을 지닌다. 매춘부들은 의료검진을 받으러 정기적으로 보건국을 찾아와 줄을 서 있으면서 수치심을 맞보아야 했다. 그것은 도시의 불결한 인간들이라는 낙인을 찍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매춘부들은 이러한 남성적인 시선에 위장된 열정이나 진심어린 경멸로 응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화려함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웃음을 흘렸고 도시의 남성들은 그들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케이드에서는 모든 여자의 몸에서 성적인 키마이라가 되어 그에게 눈짓을 보내온다. 그의 '타입'이라는 환영으로서 말이다."(1109)
<도박>
도박과 매춘부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음란하고 난잡한 쾌락을 인간의 운명인 것처럼 만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미신과 같은 모습이다. 따라서 사창가와 도박장에 존재하는 희열은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으로 인해 자신에게 돈이 떨어지는 것은 여자가 순조롭게 포옹에 응해준 것과 같다.
도박은 수많은 숫자조합의 가능성에 의해 운명을 결정짓는다. 그러한 도박은 열정을 포함하며, 그 열정을 정신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매우 고귀한 것이라고 에두아르 구르동은 말한다. 손 안에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황금보다 정신적 환희가 더욱 가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은 탈마, 탈레랑, 로시니, 발자크는 노름꾼의 모습을 띤다고 언급한다. (1121) (여기서 말하는 “노름꾼”의 의미는 보다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박은 자기 맘대로 사람에게 비참함과 모욕을 안겨준다. 도박의 열정을 정신적으로만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쾌락은 공포가 섞여 있을 때만 비로소 인간을 도취시키는데 도박은 이 여건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주식거래는 도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의 경제 발전 전체는 자본주의 사회를 점점 더 거대한 국제적인 도박장으로 바꾸어 간다. 도박에서와 같이 주가의 등락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발생한다. 따라서 부르주아도 도박꾼과 같은 정신상태에 빠지기 쉽다.(1126) 오히려 도박은 확률이 50:50으로 정확히 나뉘어져 있고 예상이 불가능하지만, 주식은 약자가 강제의 뜻대로 움직이게 되며 부정도 가능하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도박꾼의 심리. 도박꾼은 전능하고자 하는 나르시시즘적이고 공격적인 소원을 추구한다. 빨리 오르가즘에 도달하고자 하는 심리가 높을수록 도박의 메커니즘의 포로가 되기 쉽다. (1151) 도박꾼들의 욕망은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의지는 자기애의 충족과 같다. 도박은 자기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되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도박의 시간이 짧을수록, 즉 단판 승부일수록, 패가 적을수록, 패를 돌리는 시간이 짧을수록 기분전환의 요소가 강해진다. 도박꾼은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다른 어떠한 암시도 눈치채지 못한다.
도박은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비난받는다. 인간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정신적인 유희에만 머무르지 못한다. 도박을 하면서도 화폐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수읽기’와 같이 침착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근대의 사람들은 시간의 영원함을 도박장에서 느낀다. 보들레르는 도박장에서 탕진되는 힘과 열정이 대단하다고 지적하면서 그것을 모으면 로마의 민중과 로마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1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