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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신체정치를 꿈꾸다 : 혁명적 정치와 유토피아 요강, 1830~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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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리의 오스망화(化)

  1848년 6월의 투쟁은 상이한 두개의 근대성 개념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하나는 철저하게 부르주아적으로 언론과 시장에서 자유를 추구하며, 화폐권력에 수반되는 종류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축이고 또 하나는 인구 전체의 빈곤을 다룰 능력이 있는 사회주의공화국을 추구하는 축이었다. 결국 사회공화국을 향한 6월의 혁명은 실패하고 전자가 승리한다. 그 이후 제 2제정이 시작되면서 나폴레옹 3세에 의한 권위주의적인 통치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프랑스 경제 상황의 주요한 반전과 맞물려 있었고, 이 시기에 센 지역의 도지사를 맡고 있었던 오스망 남작에 의해 파리 시가 정비된다. 파리는 곧 새로운 철도망의 중심이 되고 국가경제에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오래된 노동자의 주거지역은 파괴되었으며, 대로는 분절되어 사라졌다. 이러한 도시 사회의 변화는 계급간의 간극을 심화시키게 되었다. 도시의 안쪽은 중산층들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적색 벨트’를 형성하며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파리의 오스망化는 오스망 스스로의 창조적인 생각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1848년 이전부터 만들어진 도시와 사회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신체정치로서의 공화국과 도시

1789년 대혁명 이후 공화국은 ‘짐이 국가’라는 봉건주의적이고, 권위적인 사상을 풍자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오노레 도미에는 ‘공화국’을 ‘젖먹이는 여성’으로 표현하였으며 그것은 이상적인 공화국의 이미지가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노레 도미에,<공화국>,1848.



























  이러한 해석은 1840년대의 좌파 사회주의와 유토피아의 프로그램에 깊이 새겨진다. 이상적 공화국의 이미지는 도시의 이미지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 이는 커다란 도시가 곧 국가라는 관념이 자리 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1840년대 대부분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계획을 통해 정치적 ․ 사회적 ․ 물질적 유기체 형태를 형성하기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신체정치의 모습이다. 이들의 공화국과 도시에 관한 전반적인 생각은 비슷했지만 도시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수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고 사상들은 혼돈을 빚었다.

3. 세계를 거꾸로 세우기

  1830년에서 1848년 사이의 유토피아적, 혁명적, 개혁적 이상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다. 잘못된 계몽주의를 바로잡고자 하는 책임감이 강해졌고, ‘인민’의 의지를 표출하여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파리라는 신체정치 안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느낌이 팽배하게 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입헌군주제가 마련되었지만 귀족적인 변화에 실망한 사람들은 다시 공화주의를 그리워하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노동자와 진보적 지식인은 사회주의적 대안을 마련한다.

  “사회적 신체가 정의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귀족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 급진적인 혁명주의자 오귀스트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독재 권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사상은 19세기의 과학적, 기술적 변화와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1871년 파리 코뮌 학살로 인해 좌절한다. 반면 평화롭고 점진적인 변화를 원했던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은 19세기의 새로운 신체정치는 창의적이고 건설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상상한 신체정치는 산업인(industrial)이 적절한 생산조직과 유용한 노동을 소유하고 국가의 개입 없이 효율적인 행정으로 통제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무지한 대중을 교육하고 정책적 사안을 결정하기 위해 과학자, 예술가 등 교육받은 엘리트가 위계적인 권력을 지녀야한다고 주장했다. 대중들을 하나로 통합할 도덕적 동기부여는 도덕원칙에 근거하는 새로운 형태의 그리스도교에서 찾았다. 이후 많은 생시몽주의자들은 계속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키워나갔다. 반면 푸리에는 건강하고 열정적인 본능이 “문명”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합당한 대우를 받는 “팔랑스테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산과 소비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공간을 조직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4. 1840년과 그 모든 것들

  수많은 작가들 또한 사회주의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들에 의해 논의가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이 진단한 문제점은 문명과 산업, 시대착오적인 귀족과 사제들의 권력, 개인주의, 불평등(특히 여성), 가부장제, 사유재산과 신용, 자본주의와 통제 없는 산업주의, 국가 기구의 부패, 공통의 이익을 중심으로 노동자가 조직과 연대를 체결하지 못한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사회운동의 목적과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평등과 자유, 공화주의와 공산주의, 연합에 대한 의미가 변동을 겪으면서 정치적 해석과 행동이 혼란스러워졌다. 각각의 용어에 대한 논쟁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평등 : 복지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 물질적 평등과 도덕적 평등, 계급․성별․지위를 떠나 동등한 임금을 벌 권리와 품위 있게 대우받고 존중받을 권리가 대립했다. 대부분의 개혁가들은 개인의 위엄과 자존심을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손을 들었다.

-생산조합 : 생시몽주의자들은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이익을 연결하는 거대 이권 연합과 계급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행동할만한 힘과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프루동을 비롯한 몇몇 사상가들은 노동자 스스로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을 지지했다.

-공동체와 공산주의 : 프루동은 중앙집중식 정치권력을 혐오하여 공동체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들은 공동체를 조직하고 통합하여 산업, 교육, 재산, 노동, 생활, 법규, 정치 등이 관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과 작업의 조직 : 푸리에의 소규모 산업을 통해 자유로운 노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 생시몽주의자들의 효율적인 노동 분업의 대규모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견, 프루동의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었다. 이런 논의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고, 아직까지도 해결책이 부족하다.

5. 도시 문제 : 오스망 이전의 근대성?

  세자르 달리는1840년에《건축과 공공사업 잡지(르뷔)》를 출간하였다. 이《르뷔》에는 대규모 공공기획을 선호하는 생시몽주의 성향과 이성적이고 조화로운 푸리에주의적 성향이 합쳐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의 지식인들은 도시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침공에서 방어하기 위한 요새 건설, 교통개선 계획을 보완하는 것 등등의 도시의 거리를 정리하는 구체적 계획들이 추진되었다. 오스망의 활동과 다른 점은 오스망의 그것만큼 대규모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과 행정가들이 도시의 예산을 초과하기 주저했다는 것뿐이다. 수많은 발상들이 쏟아져 나왔고 ‘새로운 유형의 도시 모델’이 구상되었다. 데자미는 노동과 생활 양면으로 공동체 조직이 운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업군대는 철도, 문화, 임업, 운하 등의 작업 기획을 실행해야 하며 건강과 위생 문제를 신중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공동체가 자리 잡는 지점에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가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을 위해 토지는 합리적으로 운영, 통제되어야 한다. 실로 이것은 완전한 신체정치에 가까웠다.

  푸리에주의자, 콩시데랑, 페리몽은 이와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철로가 건설되는 것은 인간의 이익을 해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여겼다. 특히 페리몽은 구체적인 문제 개선방안을 제시한다. 그는 도시가 전통적인 중심부로 돌아가야 하며, 그 다음에는 성장하는 여러 부분과 응집력 있고 조화롭게 외향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오스망의 계획과 방향은 달랐지만 그만큼 많은 개조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페리몽은 오스망과 달리 자본의 순환과 토지, 부동산의 사적 투기에 기대려 하지는 않았다. 페리몽의 계획이 진지하게 논의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메이나디에는 오스망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철로를 건설하고 철거하여 도심부를 재활성하고자 했다. 그 또한 건강과 위생 문제에 철저했으며 교외와 시골을 자연에 접하기 위한 대안적 휴식처로 마련하였다. 이러한 메이나디에의 계획들은 1850년에 오스망에 의해 구현된다.

  위의 사상가들(콩시데랑, 페리몽, 메이나디에 등)은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의 이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유토피아적 이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계획을 세웠다. 오스망이 1848년 이후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근대성을 다듬었다는 데에는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오스망의 발상이 이 계획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6. 1848년에 잃어버린 것은?

  1848년 이후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하여 그 개념 또한 탄압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신체정치로서의 공화국은 부정되었다. 그로 인해 도시를 표현하는 표상은 급격하게 상이한 방식으로 분리되었다. ‘감정을 가진’ ‘신체정치’로서의 도시는 제 2제정의 상업적 세계에 의해 매장되었다. 자본주의화가 된다고 하여 신체정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클라크는 자본의 힘에 맞서서 과거의 황제권력 주위에 신체정치의 감각을 재구축 하게 되었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분명히 ‘젖먹이는 국가로서의 신체정치라’는 발상은 사라졌다. 이는 모든 인간을 살리는 형태의 도시와 정치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당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에 맞추어 자기 자신을 개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결국 도시를 소유하고 자신의 이익에 맞게 개조한 것은 오스망을 비롯한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이었다. 상업자본주의는 인간을 무한한 경쟁으로 끌어들였고 노동자와 여성 등의 약자를 무책임하게 방치했다. 그들의 가난과 궁핍은 그들 스스로의 책임에 맡겨졌다. 들끓던 논쟁도 잠잠해졌고 창조적 사상가들은 모두 쫓겨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30년에서 1848년 사이에 시도된 도시에 대한 상상적 실험은 뒤에 이어질 많은 사건들의 예비단계가 되었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p9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