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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수사법과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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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시 장식의 교체

  1859년~60년의 파리는 경제적 발전과 도시화의 물결로 도시를 개조, 재건축하면서 장식물이 증가했다. 장식품들은 대부분 종교적 조각상과 나폴레옹 동상이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마을 입구의 십자로에 성모상을 세우는 것에서부터, 대도시의 최고 정점을 이루는 거대한 조각상에 이르기까지 시각적인 기획으로 일상생활에 침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념 건조물은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던 자유주의적 기념 건조물을 의식하듯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오래전부터 파리의 공화정과 자유를 상징했던 '마리안느' 장식이 반혁명적 이상과 긴밀하게 연관된 교회의 상징들로 대체된 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1848년의 혁명 실패의 결과이며 보나파르트주의의 상징이었다. 이렇듯 제2제정기간 동안 각각의 계급과 공동체는 자신들만의 수사법과 표현을 만들었고 그것은 곧 도시의 이미지가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수사법과 표현들이 어떻게 이루어져 갔으며 어떤 효과를 발휘했느냐이다.

2. 질서

  1848년, 부르주아와 노동자 사이에서 열띤 토론과 투쟁이 만연하던 시기에 "질서"라는 용어를 둘러싼 의미도 다양해졌다. 노동자들은 무질서의 원인으로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무정부주의와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투기, 시장 붕괴, 실업, 탐욕, 직업안정성과 노동자의 존엄성 와해 등을 꼽았지만 부르주아들은 반대로 자유사상과, 보헤미안 등의 위험인물과 천박한 군중을 부추기는 유토피아주의자들을 꼽았다. 부르주아들은 공공질서의 와해를 일으키는 위험한 계급의 망령에 대해 공포감을 느꼈다. 따라서 정치적 탄압과 검열제도가 심해졌고 은폐되고 은유적인 의미와 풍자들이 정치적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는 혁명기의 역사를 대중적인 이미지로 형성하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이미지와 표현과 정치적 수사법의 소용돌이와 혼란은 가중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더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주제들이 있다. 이 이미지들은 부르주아가 그들만의 질서를 위해 위험계급을 지정하고 위협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3. 알레고리의 형성

  파리는 계속해서 두 개의 계급과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 단순화된 이미지로 나타났다. 1848년에 노동계급과 위험계급의 차이가 분명히 판명되었지만 결국 권력은 부르주아에게 쥐어졌다. 그 기회를 이용해 대부분의 부르주아들은 위험계급과 노동계급, 그리고 노동계급을 옹호하던 자들까지 "타자"로 만들었다. 도시의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세워지면서 타자와 타자가 아닌 자들의 사회적․물리적 구분이 간단히 나뉘었다. "파리가 변모하면서 노동인구를 변두리로 강제로 쫓아내자 수도는 두 개의 도시가 된"것이다. 타자가 된 자들에게는 유해한 폭력성이 가해졌다. 그와 동시에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선제공격을 정당화하려는 이미지와 표현을 구축했고, 혁명가들은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노력했다. 지배권력이 분리한 "타자"는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부자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문명과 제국의 자궁인 오리엔트, 혁명과 자유의 상징인 여성이 바로 그것이다.

3-1. 노동자

  부르주아들은 노동계급이나 위험한 계급을 만나기 원하지 않았다. 군중은 전복적인 요소와 무질서를 숨기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녀들은 대로를 쉽게 돌아다녔고 경찰은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군중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부르주아는 공간을 개방하여 빈민층과 노동계급을 대로에서 쫓아냈다. 더 많은 공간이 물리적으로 개방될수록 위험계급의 지역은 게토화되고, 인종적으로 부과된 사회적 관행을 통해 문할, 폐쇄되어야 했다. 이렇듯 부르주아는 오스망이 마련한 공간에서 사회공간적 배제와 질서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3-2. 오리엔트

  부르주아들은 노동자들을 문명과 격리된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노동자를 타자화하면서 발생한 이러한 연상은 "문명"과 "질서"를 정의할 때에도 이용되었다. 미슐레는 이를 뒷받침하듯이 문명을 "이성, 정신, 서방, 남성이 자연과 물질과 동방과 여성 속에 있는 그들의 기원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그에 대해 권위를 확립시키려 하는 투쟁"이라고 말했다.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인 이미지는 수많은 낭만주의 작가에 의해 강화되었다. 오리엔트는 부르주아의 환상 속에서 가정을 교란시키는 위협으로,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비합리적인 오리엔트를 우월한 계몽주의적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이드는 이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명명한다.

3-3. 여성

  순종적이지 않고 통제 불가능한 여성은 자유와 혁명을 상징했다. 공화국을 대표하는 강한 여성의 이미지는 부르주아들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부르주아는 상반되는 여성의 이미지를 창출해내었다. 위고는 이것을 회화적으로 묘사한다. 노동자 진영의 여성은 빨간 모자와 헐렁한 코르셋을 입은 공화국인 반면에 검은색 옷을 입은 신사들의 공화국은 요조숙녀 같은 공화국을 갖게 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알프레드 르 프티,<두 공화국>,1872.

























 부르주아는 고분고분한 가정의 여성을 맹렬히 추종했고 그에 관한 물질적 토대로 결혼을 사업으로 보게 되었으며 부르주아의 성공을 위해 가정 경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결국 부르주아의 여성은 남성의 업적을 지지하고 헌신하는 성모의 역할로 주조되었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종교적 조각상으로 도시 풍경을 압도했다. 노동자와 오리엔트(자연으로 상징되는), 여성은 비슷한 수사법과 표현으로 은유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두 공화당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5. 중앙집중화와 탈집중화

  부르주아들은 "타자"를 설정하여 자신들의 위치를 침범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체를 설정하려고 했다. 제2제정은 황제를 합법화하여 모든 권위를 중심으로 모으려고 했다. 그들은 국가란 자본을 중앙집중화하는 강력한 기관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직접적인 경제 통제권과 경제에 대한 간접적인 영향력을 높인다고 보았다. 금융자본과 국가의 궤도에 포함되지 않는 경제생활 영역은 거의 없었다. 생시몽주의자들은 제국의 경제정책과 자본의 중앙집중화에 합법성을 부여했다. 1960년 이후에는 과도하게 강력해진 중앙집중화가 저지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부르주아와 노동자 운동 모두에서 커지기 시작했다. 정치적 탈집중화를 주장하던 세력은 새로운 운송시스템과 통신시스템을 추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중앙 정부가 더 쉽게 지방을 통제, 관리 할 수 있는 교량이 되었다. 코뮌은 정치적 탈집중화를 위한 투쟁이었으며 파리의 자치문제를 정식의제로 설정했다. 그러나 도시의 자치화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지녔다. 혁명적인 파리가 후진적인 지방을 정복하고 지배하며 계몽 해야 한다는 생각도 만연했다. 코뮌이 탈집중화라는 시의 자유를 위해 봉기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순수하게 공동체에 관한 것인지, 계급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는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6. 결론

  도미에는 제2제정의 역사를 "전통적으로 여성형이던 자유가 손발이 꽁꽁 묶여 1851년의 쿠데타와 1870년의 스당 패배라는 두 개의 대포 사이에 놓여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여성과 자유, 공화국은 오래전부터 같은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의 이미지가 제2제정기에 다음과 같은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보나파르트주의의 질서유지를 위한 폭력 때문이다. 알레고리 안에 묶여 있던 사람들은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엄청난 투쟁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 비극은 그들의 일상생활에 새겨졌고 지금까지도 쉽게 벗겨지지 않고 있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379~4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