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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길을 잘못 찾는 일은 흥미로울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
길을 잘 모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를 헤메는 일, 마치 숲속을 헤매듯 도시를 헤매는 일에 필요한 훈련은
길을 찾는 일에 필요한 훈련과는 전혀 다르다.
도시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간판들, 도로의 이름들,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집들, 노점들, 술집들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방식은
숲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자기 발에 밟힌 잔가지로부터,
멀리 어느 황새의 요란한 울음소리로부터,
갑자기 나타난 고요한 빈터에 불쑥 피어 있는 한 떨기 백합으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방식과 비슷하다.
내게 이 배회의 기술을 가르쳐준 도시가 파리였다.
학창시절의 공책 압지에 찍힌 미로 속에서 최초의 흔적을 드러낸
나의 꿈을 실현해준 것도 파리였다. - 발터 벤야민
레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pp.318-319
그러고보니 내가 20대에는 가졌으나 30대에 잃은 것은 '걷는 경험'이다. 어느 순간부터 겨드랑이에 땀이 차고 신발에 물이 젖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부족하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나의 '사적 공간'이 부족했던 20대에는 서울의 거리가 '내 것'이었고, 카페와 빌딩 사이의 빈 공간을 잠시 사유할 수 있었다. 내 공간이 충분해진 지금은 걷지 않는다. 주차가 가능한 공간에 차를 세우고 실내공간을 배회한다. 내가 잃은 건 '완전한 타인'과의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