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신의 세계에서 인간을 분리해내었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다양한 생활 방식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 방식은 생각하는 주체,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로 사람들에게는 이성이라는 것, 신에게 의존해서 자립적이지 못했던 인간들을 자유롭게 했다. 하지만 그 자유로움만으로는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걸 데카르트는 자각했다. 사람의 이성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지만 물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유롭기만 해서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릴레오의 관측법을 적극 활용. '신체'의 기능을 이성에 비해 훨씬 열등한 존재로 생각했던 데카르트도 과학을 이용하기 위한 신체, 즉 시각과 촉각의 감각은 그나마 중요한 것이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근대인'인 우리는 우리 신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사고의 중요성, 증명할 수 있는 공식과 결합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면서 살기 시작했다. (데카르트 <빛에 대한 고찰>)
그 이후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람을 배제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성적인 사고라는 건 뭘까?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옳고 그른 생각이라는 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을 설정한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데카르트 이하 많은 철학자들과 정치인들, 경제인들. 사회를 조정하기 합당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윤리와 도덕이 설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성적인 사람과 비이성적인 사람이 발생하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우리 사이에서 '광인'이라고 명명되었다. 데카르트 이전, 중세시대 이전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인과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이루고 도움을 주고받는 등 자유로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변질 되어 버린 것이다.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수용의 공간 안에 모이게 되고, 그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만들어진 광인.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광인이란 존재…. (미셸푸코, <광기의 역사>)
그럼 이제 소설이자 영화인 <향수>를 좀 더 쉽게 만날 수 있겠다. 18C 프랑스. 주인공 장바티스트는 후각이 매우 예민한 인물이다. 그는 세상에서 맡을 수 있다는 온갖 악취 속에서 태어난다. 눈을 뜨기도 전부터. 부모라는 존재와는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구출된다. 장바티스트에게는 인간의 정 보다도 향기에 먼저 매료되고 만다. 텍스트는 이 부분을 좀 과장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이 된 장바티스트는 말을 하지 못한다. 즉 타인과의 소통 방식이 없었던 것이다. 주변의 친구들은 자신과 다른 장바티스트를 두려워하고 괴롭힌다. 여기서 이미 한 명의 ‘광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적 사유는 사람들을 시각과 촉각에 모든 감각을 묶어버렸다. 장바티스트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존재, 즉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광인이다. 하지만 장바티스트는 단지 우리가 눈으로 느끼는 것을 후각으로 느끼는 것뿐이다. 따뜻한 물, 따뜻한 대지와 풀, 차가운 물, 개구리까지도….
그러다가 이 친구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에 매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느끼는 아름다움과 등치될 수 있는 아름다운 향기. 그에게는 그 여인의 향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바로 빛인 셈이다. 실수로 그 여인을 죽여 버렸지만, 평생토록 그 향기를, 빛을 간직하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장바티스트는 향수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자신이 느낀 사람의 향기를 향수로 보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장바티스트는 그 아름다운 향기가 생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라스로 떠난 장바티스트는 도시를 찾는 여정에서 자신의 향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은 이것 역시 우리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어렵고, 발견하지 못할 경우 좌절하고는 한다. 장바티스트의 행동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사람은 자두를 팔던 소녀이다. 장바티스트는 그라스에 도착해서 나만의 향기, 세상 사람들이 모두 환호할 향기를 만들어내겠다고 매우 강하게 결심한다.
그라스에서 그는 여러 가지 향수제조법을 배우고, 여러 시도 중 가장 적합한 제조법과 재료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재료는 모두가 알다시피 아름다운 여인이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외모가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다. 장바티스트의 문법으로 이해하면 아름다운 향기가 아름다움을 결정한다.) 결국 열세명의 여인을 살해하면서 세상 누구도 만들 수 없는 향수를 만든다. 그와 동시에 체포되고….
그러나, 이미 완성된 향수의 기운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매료되어 그를 천사라고, 예수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자신의 본능에 충실해지지. 그 장면은 영화를 본 모든 이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동성애도 포함되지. 영화를 보면서 저게 무슨 짓들이냐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향수는 하나의 은유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편하다. 그것은 ‘광기’의 자유이다. 데카르트가 이성으로 묶어버렸던 광기의 자유. 그것이 바로 향수의 향기로 발산되면서 갇혀있던 상자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제 이해할 수 있을까? 교회의 교리로, 윤리로, 법으로, 질서로 갇혀있던 '정상인'의 광기가 분출된 것이다. 주교까지도. (여기서 예수의 모습과 대조되지.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윤리를 주고자 했다면, 장바티스트를 예수처럼 표현해서 정 반대의 도덕, 광인의 도덕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이성적이었던 모든 사람들은 장바티스트에게 무릎을 꿇는다. 여기에 바로 위대한 광인의 승리가 있다. 위대한 광인의 승리.
사람들은 향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마치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처럼. (여기서는 고야의 그림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장바티스트는 자신의 목적을 완성하고서도 만족할 수가 없다. 완벽한 향기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자두소녀'에게서 인정을 받는다. 위로도 받게 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은 사랑할 수도, 사랑 받을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추악하고 괴로운 냄새가 진동하던 생선시장. 그곳의 사람들에게 자기를 희생하고자 한다. 최초의 사랑. 최초의 사랑받음이자 최초의 희생으로….
신의 세계에서 분리되어 이성으로 꼭꼭 묶여 있던 인간을 향수로 풀어헤쳐서 다시 광기의 시대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를 이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앞에서 나는 위대한 광인의 승리라고 했다. 광기는 묶여있던 우리의 이성을 파헤치고 영화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광기의 해방은 왜 필요했을까.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이성과 신체가 자유롭기를 바라는 누군가(짐작할 수 있는)의 의도였으리라. 우리 속에 잠재된 광기가 자유를 얻을 때 근대의 종말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근대가 종말을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할 수는 있다. 광기의 위대한 승리에는, 작가의 위대한 근대 ‘비꼼’이 담겨있다. 비꼼으로 비판하기.
영화를 보면서 추접하고 더럽다는 느낌만 받은 것이 아니라 뭔지 알 수 없는 해방의 기운을 느꼈다면, 우리들도 분명 언젠가 <매트릭스>의 빨란 약을 먹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 시온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